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부를 주어진 지식을 주워담는 것으로 여긴다. 학교에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공부 이외의 능력을 알아봐주는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어떤 지식이 얼마나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가슴을 울린 지식은 탐구욕을 자극해 미래의 거름이 된다.
수명 늘린 건 유전자 아닌 문명
진화생물학과 노년의학을 공부하다가 문득 중학교 때 생물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대충 이런 얘기였다. 화초를 가꿀 때 너무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면 꽃을 잘 피우지 않는다. 꽃은 열매와 씨를 맺어 후손을 퍼뜨리려 피는 것이고 그러려면 벌과 나비를 끌어들여야 하므로 향기와 아름다움을 진화시켰다. 자연의 조건이 가혹할 때는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빨리 많은 씨를 만들어 뿌려야 후손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일찍 꽃을 피운다. 그런데 조건이 너무 좋으면 후손을 퍼뜨리기보다는 자신이 살아남는 편이 유리하다. (지금이라면 여기에 ‘유전자의 입장에서’라는 말을 덧붙였을 것이다.) 그래서 꽃을 잘 피우지 않는다. 식물은 고난 속에서 더 아름답게 꽃피운다!
이 이야기는 온갖 고난을 겪으며 얕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생식의 임무를 완수한 다음 바로 생을 마치는 연어 이야기에 비하면 훨씬 덜 극적이다. 하지만 연어의 사례와 함께 생명의 본질 또는 적어도 생명의 기본적 경향성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생명은 어떤 경우든 번식의 성공률을 높이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 현상을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쉽게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닫고 ‘이기적 유전자’라는 말을 만들어 크게 유행시켰다. 생명은 그것이 품고 있는 유전자의 빈도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생명체의 몸은 유전자가 운전하는 자동차와 같다. 이 논리에 따르면 생식을 끝낸 개체는 생을 마감하는 게 자연의 원리에 맞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째서 생식의 임무를 완수하고서도 자식과 함께 늙어갈 만큼 오래 사는 것일까?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갓 태어난 조선인 아이의 기대수명은 24살 전후였지만 2007년에는 무려 79.4살로 늘어났다. 우리는 100여 년 전에 태어난 조상보다 무려 3배나 오래 살게 된 것이다. 생명과 인류의 장구한 역사에 비추어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이루어낸 성과치고는 엄청난 것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수명을 연장하는 유전자가 진화했을 수는 없다. 이러한 성과는 주로 영양과 위생 상태를 개선해 전염병을 극복하고 출산 횟수와 영아사망률을 크게 낮추었기에 가능했다. 인간의 수명을 늘린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인류의 문명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 몸의 생물학적 구조와 기능,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유전자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리고 평균수명이 10년 남짓이던 수렵·채취 생활에 적응된 것이다. 당시의 주요 사망 원인은 포식동물의 공격, 추락 같은 사고, 전쟁, 독이 든 음식, 감염, 출산에 따른 사고 등이었을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도 그런 위험한 상황에 적응된 몸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이제 그 몸이 적응한 위험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니 생리적 능력의 여분이 생겼고 이것이 수명 연장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분의 삶은 10만 년 이상 혹독한 자연에 적응하면서 진화해온 생물학적 조상과 1만 년 남짓 그 위험을 줄여온 문화적 조상의 덕이다. 우리 몸속에는 그 두 조상이 공존한다.
그러니까 노화는 문명을 진화시킨 인간에게만 있는, 생명의 역사 전체에서도 무척 특이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인간 수명의 한계는 없는 것일까? 생리적 현상을 통제하는 현대 문명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그 답은 우리 몸속의 진화적 조상과 문화적 조상이 현실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진화적 조상은 우리를 노화에 관한 과학적 탐구로 이끌고, 문화적 조상은 더 오래 건강하게 살려는 욕망을 부추긴다.
욕망에 기생하는 과학어떤 과학은 욕망에 기생하기도 한다. 2005년 말부터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줄기세포 파동이 바로 그런 과학의 모습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그리고 생명 연장 기술을 통해 큰돈을 벌려는 욕망은 일부 과학자와 언론을 이미 무병장수의 꿈을 이룬 듯 행동하게 했다. 그 꿈이 조작된 데이터에 의한 것임이 밝혀진 지금도 장수와 노화방지에 대한 욕망은 죽지 않았다. 검색창에 ‘노화방지’를 입력해보면 수많은 노화방지 식품·화장품·클리닉·운동법·학술정보들이 나타난다. 물론 이중 설득력 있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거의 없다.
어떤 과학은 욕망에 기생할 뿐 아니라 그것을 부추겨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노화를 연구하는 과학자 중에는 인간의 수명을 수백 년까지 늘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드 그레이 같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중에 유통되는 노화방지 상품과 담론이 진실을 심하게 왜곡한다고 비판한다. 2002년에 수십 명의 노화 연구자들이 모여 발표한 ‘인간 노화에 관한 의견서’는 대부분의 노화방지 상품이 과학적 근거가 없고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경고한다. 이 의견서는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만, 우리 몸이 진화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문화적으로 연장돼온 생명의 길도 한계에 이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러나 욕망으로 무장한 문화적 몸은 과학마저 도구로 삼는다. 미국노화방지의학회(A4 M)는 세계 73개국에 1만2500명의 회원을 거느린 거대 학회로, 교과서와 학술지를 발간하고 세계 각지에서 대규모 학술대회를 연다. 이 학회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당연히 노화방지 상품을 파는 회사가 부담한다. 그들이 발간하는 책의 제목은 ‘새로운 노화방지의 비밀’ ‘젊음의 호르몬’ ‘성장호르몬과 함께 젊음을 키우세요’ ‘시계를 멈춰라’ 등 모두 선정적인 것들이다.
진화 과정에 숨겨진 노화의 비밀하지만 노화 자체의 비밀도 모른 채 노화방지의 비밀을 풀 수는 없다. 기계는 그것을 설계·제작한 인간의 의도와 제도를 따라 이력을 추적할 수도 있고 수명을 늘리기로 작정만 한다면- 당연히 한계는 있겠지만- 그렇게 못할 이유도 없다. 우리 몸은 기계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수십억 년 또는 수십만 년에 이르는 생명과 인간 종의 진화를 거쳐왔으므로 그 이력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노화의 비밀은 여전히 진화 과정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노화의 단서는 분자와 세포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분자와 세포 역시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제하에 노화의 원인을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우리는 생존과 생식의 대가로 늙는다’로 요약된다. 진화의 동력인 자연선택은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기에 유리한 형질만 선택한다. 어렸을 때 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아이를 낳기 전에 죽을 확률이 높으므로 그 유전자는 자연에서 점차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유전자가 40살 이후에 병을 일으킨다면 그 유전자는 인구에서 제거되지 않는다. 발병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유전자를 후손에 전한 다음일 테니까.
노화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늙게 하는 형질은 생존과 생식에 유리하지 않으므로 자연에 의해 선택되어 널리 퍼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려서 병을 일으키는 형질과는 달리, 자식을 낳기도 전에 일찍 죽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래서 유전자풀에서 제거되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 노화는 진화의 직접적 결과가 아니라 자연이 생존과 생식에 능한 형질을 선택하고 남은 찌꺼기인 셈이다.
현대의학이 조만간 획기적으로 노화를 막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에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불로초가 없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더구나 노화의 비밀은 우리가 조작할 수 있는 분자와 세포보다는 기나긴 생명의 진화 과정 속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욕망에 근거한 노화‘방지’ 의학보다는 늘어난 생명의 시간과 주어진 조건을 향유해 생명의 가치를 높이려는 ‘노년’ 의학이 장수시대의 답인 이유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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