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믿기 어려운 소식을 접했을 때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한다. 영어에서 ‘보다’(see)는 ‘알다’(understand)와 거의 동의어처럼 쓰인다. 보는 것(시각)이 어떤 사태를 파악하는 가장 확실한 감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마술사들은 종종 믿을 수 없는 사태를 보여주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한다. 똑같은 길이의 막대라도 배경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로 ‘보이기도’ 한다. 보는 것이 바로 진실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몸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마음의 눈에 비친 것을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음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면서 사태를 파악하는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헷갈리기도 한다.
잃어버린 손이 자꾸만 아프다?
당신이 교통사고로 한 팔을 잃었다고 가정해보자. 수술로 인한 상처가 회복된 다음에도 십중팔구 당신의 사라진 팔에 달려 있던 손가락이 간지럽거나 아픈 증상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현상을 신경학에서는 ‘환상통’(Phantom Pain)이라고 한다. 사라진 팔의 유령이 나타난 것이다. 상식으로는 분명 사라지고 없는 몸의 팔이 마음속에서는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없지만 있는’ 현상이다. 반대 현상도 있다. 유명한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는 분명 자신의 몸통에 붙은 다리를 남의 것으로 인식해 깜짝 놀라는 현상을 비롯해 수많은 사례를 보고하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헷갈리게 한다. 모든 것을 몸을 구성하는 요소들(있는 것)로 환원해 과학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해야 하는 현대의학으로서는 당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개 이럴 때는 문제에 접근하는 기존 방식을 의심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어떤 문제를 야기한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그 문제를 풀 수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의 라마찬드란이 제시해 성공한 환상통 치료법은 어이없게도 환자의 눈을 속이고 마음까지 속이는 것이었다. 아예 있는 것과 없는 것, 몸과 마음의 경계를 허물고 매트릭스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남아 있는 손을 거울을 향하게 놓고 거울을 바라보면 사라지고 없는 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남아 있는 손을 움직이면 환자의 마음 또는 뇌는 거울 속의 사라진 손도 살아서 움직이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렇게 거울을 통해 뇌를 훈련하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사라진다고 한다. 사라진 손을 살아서 움직이는 것으로 인식했으니(눈과 마음을 속였으니) 그 손이 아픈 이유도 사라진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사고로 마비된 자신의 다리가 제 기능을 회복하도록 하는 치료법을 개발했는데, 그것은 마음속에 특정 음악의 멜로디를 떠올리며 거기에 맞춰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과학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음악이라는 파트너를 만나 중요한 문제 하나를 해결한 것이다. 이처럼 기존 틀을 벗어나는 엉뚱하고 발칙한 상상력은 과학의 적이 아닌 친구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축적된 뇌와 신경계에 대한 연구는 몸과 마음,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분을 더욱 애매모호하게 했는데, 역설적이게도 문제의 해결책은 그 경계의 소실로 얻은 새로운 관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풀리기 시작한 문제보다 풀어야 할 문제가 훨씬 더 많다. 그중 하나가 전혀 생물학적 활성이 없는 약물을 복용했는데도 극적인 치료 효과를 보이는 ‘플라시보 효과’다. 약을 처방한 의사가 그 분야의 명망 있는 전문가거나 당신이 존경하는 사람이라면 효과는 더 커진다. 효과 범위도 좋아졌다고 착각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암 덩어리의 크기가 줄어드는 수준까지 가능하다. 과학의 관점에서는 없어야 할 것이 너무도 뚜렷하게 있게 되는 현상이다.
아무런 이상도 없이 눈이 먼 여성들여기서는 상식과 과학이 심각하게 부딪친다. 상식적으로 의학은 질병으로 인한 환자의 고통과 증상을 완화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실천 행위다. 하지만 과학적 의학에서는 있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현상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규범이다. 그래서 그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억제하는 전략이 선택된다. 새로 개발된 약의 효과를 증명하려면 그 약을 복용한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의 효과를 비교해야 하는데, 플라시보는 비교 대상일 뿐 자체로서의 가치를 가지지는 않는다. 플라시보는 적극 수용해야 할 친구가 아니라 오히려 물리쳐야 할 적이거나 기껏해야 측정 도구일 뿐이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이라도 플라시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것을 무시하기보다는 통제하는 길을 택한다. 약효를 증명하려면 그것이 플라시보보다 우수함을 보여야 한다는 규범을 채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플라시보를 최대한 억제해야만 약의 우수함을 보일 수 있게 되었고, 임상시험에서는 환자뿐 아니라 약을 처방하는 의사까지 무슨 약을 주는지 몰라야 하는, 다시 말해 환자와 의사의 눈과 마음을 속이는 ‘이중 눈가림’(Double Blind)이라는 방법이 황금률이 된다.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심리적 교류와 인간적 공감을 사전에 차단해 플라시보 효과의 발생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환상통의 사례에서는 눈속임과 마음속임이 몸과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치유의 방편이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몸과 마음 사이의 장벽을 더 높이 쌓게 된다.
이중 눈가림의 전제는 몸에 일어나는 생물학적 반응과 마음이 몸에 미치는 영향은 서로 독립적이며, 플라시보는 이 중 예측 불가능한 마음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험약품의 총효과에서 플라시보 효과를 빼면 그 약품의 진정한 생물학적 약효가 된다고 본다. 여기서 마음은 이해하고 활용해야 할 인간적 자산이 아니라, 몸에 영향을 주지만 예측 불가능한 통제 대상이다. 몸은 진정으로 있는 것(실체)이고, 마음은 있는 것 같지만 없는 몸의 잡음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심신의학 전문가 앤 해링턴은 저서 (살림 펴냄)에서 이에 대한 많은 반례를 보여준다. 크메르루주에 의해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 특히 남성들이 고문당하고 살해되는 모습을 강제로 봐야 했던 캄보디아 여성 중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약 200건의 사례를 보고한다. 이들을 검사한 결과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는데, 그들은 앞을 볼 수 없게 된 이유를 ‘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울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항암치료제의 효과에 강한 신념을 가졌을 때는 현저한 치료 효과를 보이다가, 임상시험 결과 효과가 없는 걸로 증명됐다는 신문 기사를 본 뒤 병세가 극도로 악화돼 사망하게 된 환자의 사례도 있다.
물론 이 사례들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더 면밀한 과학적 검토와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몸과 마음,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우리의 사유 양식이 오히려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다고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있다. 문제풀이의 핵심은 과학이 축적한 데이터가 아닌, 우리가 의심해보지 못했던 문제풀이의 방식 속에 있을 수 있다.
몸과 마음을 속이려면 진정한 믿음이 필요그러나 이중 눈가림이 임상시험의 황금률로 자리잡은 이후 플라시보를 통제해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연구는 많아도 플라시보 현상 자체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있지만 없거나, 없지만 있다’는 말은 논리적 모순이고, 과학은 그런 모순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거울을 이용한 환상통 치료에서는 환자의 눈을 속이고 이렇게 속은 눈이 다시 마음을 움직여 몸의 통증을 사라지게 한다. 생물학적으로 아무런 활성이 없는 밀가루를 먹었을 뿐인데도 심각한 두통이 사라지는 플라시보는 ‘진정’으로 약물 효과를 믿는 마음속임이 다시 몸을 속여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의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최면이 잘 걸리지 않듯, 속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몸과 마음은 기대처럼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몸과 마음을 속여 새롭고 긍정적인 경험을 하려면 역설적이게도 진정한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플라시보는 바로 그 ‘진정성’이 몸으로 드러남을 뜻하는 반응이다.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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