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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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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

등록 2021-11-07 16:19 수정 2021-11-1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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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걸려도 거창읍까지 가야 해요.”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사는 신원초 5학년 혜성이의 말이 유독 서걱거렸다. 신원면에는 병원은 없고, 보건지소만 있다고 한다. “보건지소에서 아이들 약도 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신원초 병설유치원에 다니는 연주의 엄마 말도 자꾸 마음에 밟혔다. 약국도 없고, 보건지소에서 아이들 독감 예방접종도 안 돼서 엄마는 아픈 아이를 데리고 자동차로 30분, 버스로 1시간 걸리는 거창읍까지 일부러 나가야 한다고 했다.

어릴 때 병치레가 잦았던 아이를 둔 엄마 마음이라 더 그랬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는 아파서 1년에 한두 번은 병원에 입원하곤 했다. 여행 가서 갑자기 열이 올라, 여러 차례 마음고생도 했다. 아이가 대여섯 살 무렵이었나, 강원도에 여름휴가를 갔다가 한밤중에 39℃ 넘게 열이 올랐다. 찾아보니 그 지역에는 소아과가 없었다. 다음날 자동차로 1시간을 달려 강릉에 있는 소아과까지 가야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살아서 겪어보지 못했던 의료격차를 체감했다. 그 뒤로는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 여행 갈 때마다 숙소 근처 병원, 특히 소아과 정보를 미리 챙겼다.

실제로 지역별 의료격차는 심각하다. 집에서 종합병원까지 평균거리를 계산해보면, 서울은 2.85㎞인데 경남은 31.54㎞로 종합병원이 가장 멀리 있다. 집에서 응급의료시설까지 평균거리는 서울은 2.94㎞인데 강원은 22.32㎞로 7배 이상 멀다.(국토교통부 ‘2020년 국토모니터링 보고서’) 병원만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의사도 많지 않다. 인구 1천 명당 의사 수를 보면, 서울은 3.1명이지만 충북 등 일부 지역은 1.5명밖에 되지 않는다.(2020년 보건복지부 발표)

“섬도 많고 열악한 의료환경이라 의사들이 안 온답니다. 있는 병원도 폐원할 단계에 와 있어요.” 정부가 공공의대를 설립해 지역 병원에 10년간 의무적으로 근무하는 ‘지역의사’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해 시끄러웠던 2020년 여름, 한 토론회장에서 만난 전남도청 공무원이 한 말이다. 그는 지역 의료격차가 너무 심각하다고 걱정했다. 군 단위 지역에서 딱 하나뿐인 의원을 운영하는 한 의사는 “환자를 가려 받을 수 없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진료과목을 다 본다”고 말했다. 그런 보건지소나 의원급 병원에서도 진료받을 수 없는 환자는 몇 시간 걸리는 대도시로 나가야 한다. 어릴 때 백혈병을 앓았던 신원초 4학년 민제는 주변에 큰 병원이 없어, 멀리 부산까지 정기검진을 받으러 다녀야 한다고 했다.

지역에서 사라지는 것은 병원만이 아니다. 학교도, 어린이집도, 약국도, 우체국도, 하물며 목욕탕까지 없어지고 있다. 하지만 ‘소멸위험지역’ ‘인구감소지역’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로는 이 모든 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곳에도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가 인구감소지역 89곳을 지정했다”는 냉정하기도, 건조하기도 한 뉴스 그 이상이 필요하다.

신지민 기자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9월과 10월 두 차례 머물며, 아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2021 소멸도시 리포트’ 두 번째 이야기를 전한다. 표지이야기를 읽다가 신지민 기자에게 몇 번씩 되물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 거창군 전체 버스 노선도를 다 외운다고? 정말이야?” “아이들이 말할 때 진짜로 ‘다문화가정’ ‘폐교’ 같은 단어를 쓴다고?” 서울에 사는 어른의 시선에서 낯선 상황이나 단어가, 신원면에 사는 아이들의 눈높이에선 익숙한 일상일 수 있음을 아이들에게 배웠다.

‘2021 소멸도시 리포트’는 지난호에서 3부작 연재를 끝낸 ‘서울 무연고 사망자 1216명 리포트’에 이어 <한겨레21>이 연말까지 공들여 준비하고 있는 심층리포트 가운데 두 번째 결과물이다. 김규원, 방준호 기자가 다른 지역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사라져 없어져서는 안 될 이야기를 계속 전하겠다.

황예랑 편집장 yrcom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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