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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 계엄

편집장의 편지
등록 2018-08-14 16:10 수정 2020-05-03 04:29

전두환은 군을 믿지 못했다. “군대라는 데가 이상한 뎁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난 지금도 솔직히 무서운 단체가 군대입니다. 장군들은 내가 잘 아니까 그렇지만 젊은 간부들은 패기가 대단해요.” 1986년 11월1일 3부 요인과 함께한 부부 동반 만찬에서 그는 속마음을 드러냈다.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 뒤 6년째였다.

이듬해에는 더 직접적으로 말한다. “군대가 나오면 항상 쿠데타 위험이 있어.”

전두환은 요술방망이와 다를 바 없는 계엄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가 7년 동안 대통령 하면서 군대를 한 번도 안 써먹었지요. 지금도 명령을 해서 비상계엄을 하든지 위수령을 하면 싹 쓸 수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이 참가한 1987년 6·10 국민대회가 열린 다음날, 청와대 대접견실에서 열린 우수학회 대표 초청 오찬에서 한 엄포였다. “그러나 바둑을 두다가 잘 안 된다고 자꾸 쓸고 하면 바둑은 안 늘고 성격만 나빠집니다.”

시민들을 ‘싹 쓸 수 있다’는 계엄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둑판에 비유한 전두환은 8일 뒤 군에 병력 출동을 준비시켰다. 국가안전기획부장, 국방부 장관, 3군 참모총장, 수도방위사령관, 국군보안사령관 등을 청와대에 불러놓고서 ‘비상조치’를 전제로 군병력 배치 계획을 결정했다. 그는 ‘비상조치’가 “계엄령에다 플러스알파”라고 했다. 다시 8일 뒤 출동 준비가 된 군에 정상근무 지시를 내렸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자칫 11번째 계엄으로 기록될 수 있었던 순간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는 1986년 하반기부터 비상조치나 군부 동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매번 막판에 계엄 카드를 뽑지 않은 이유는 ‘패기 대단한’ 군인의 출현 때문이었다.

한때 자신이 그랬다. 1979년 10월26일 다음날 내려진 계엄체제에서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있던 그는 상관인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등 하극상으로 끝내 권력을 차지하지 않았던가. 전두환에게 패기 대단한 군인은 불의에 저항하는 ‘정의로운 군인’이 아니라 권력을 찬탈할 수 있는 ‘또 다른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이 물러난 지 30년이 지났다. 모두 사라진 줄 알았던 패기 대단한 군인들이 다시 나타났다. 주인공은 육사 38기로 생도 시절 전두환의 쿠데타 소식을 접했을 조현천 전 국군기무사령관이다. 그가 육사 출신 선배 전두환을 보며 무엇을 배웠을까? 그는 2016년 11월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 민심이 불붙자 차근차근 계엄을 준비했다. 여럿이 합세했다.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 장준규 전 육군참모총장….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에 딸린 ‘대비계획 세부자료’란 문건 등을 통해 계엄의 구체적 실행방안까지 세웠다. 끔찍하지만 내란을 꾀한 이들의 음모가 성공했다면 11번째 계엄으로 기록될 뻔했다.

‘11번째 계엄’ 계획엔 공통점이 있다. 1987년, 2007년 광장에 모였던 수십만 시민들은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지난해 모의된 계엄은 1년이 훨씬 지나서야 알려졌다. 군대 내에서는 쉬쉬했다. 결과야 실패였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취약성이 표출됐다.

군에 대한 민주적 통제, 군의 민주화는 아직 멀다. 불법적이라는 기무사의 계엄 문건이든, 합동참모본부의 합법적 지침서인 이든 이들 문건에 배어 있는 군의 의식은 시대착오적이다. 기무사 작성 문건을 보면 진보를 ‘종북’으로, 제주4·3을 ‘폭동’으로, 계엄 해제 시도시 국회의원 대상 현행범 사법처리로 ‘의결 정족수 미달 유도’ 등의 반헌법적, 반민주적, 반역사적 인식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은 또 어떤가. 5·16 쿠데타를 ‘군 내에서 개혁 의지의 분출’로, 10월 유신과 계엄을 ‘사회질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정당화한다. 엘리트 군인들의 비뚤어진 시각이 투영됐다.

교정되지 않는다면 패기 대단한 군인은 언제 또 나올지 모른다. 계엄은 11번 가운데 이번 한 번 실패했다.

류이근 편집장 ryuyige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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