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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있었고 정치는 없었다

등록 2026-06-18 21:35 수정 2026-06-23 14:34
주요 대학교 총학생회가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진행한 2026년 6월10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연세인 공동행동 및 시국선언이 열리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주요 대학교 총학생회가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규탄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진행한 2026년 6월10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에서 연세인 공동행동 및 시국선언이 열리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서울 송파구 일부 투표소에서 6·3 지방선거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일어난 이후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순수 시민’들의 분노를 가장 먼저 포착한 건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들과 부정선거 음모론을 주장해온 극우 유튜버들이었다. 극우 유튜버들은 명확한 근거 확인 없이 이 사태를 곧바로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연결하며 세를 확장하려 했다. 반면 화장품 공동구매나 고양이 사진 등으로 영향력을 쌓아온 인플루언서들은 이 분노를 활용해 대중의 호응을 끌어내는 데 집중했다. 이는 그들이 ‘탈정치적 순수 시민’으로서 기본적인 참정권 침해만은 용납할 수 없다는 최소주의적 민주주의 인식을 지녔기 때문일 수도 있고, 특정한 정치적 관점 없이 대중의 감정에 기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중요한 건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순수 시민’들의 분노 감정에 일정한 정의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분노 감정은 단순히 투표용지 부족이나 전북·경기도교육감 선거 결과 입력 오류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정도가 아니므로 재선거 대상이 아니다’라는 법적 판단만으로 해소될 수 없다. 이들의 분노는 이번 사태로 인한 특정 정당의 유불리를 따지는 당파적 반응이라기보다 참정권의 공백을 체감하게 만든 부실한 선거 운영 과정에 대한 감각적 반응에 가깝다. 따라서 정의당, 개혁신당, 국민의힘 등이 제기한 선거 소청에 대해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더라도, 민주적 정당성이 훼손됐다는 경험은 시민들에게 그대로 남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대학총학생회공동포럼이 시국선언을 통해 요구한 국정조사와 특별검사 도입, 책임자 처벌, 선거관리위원회 개혁은 대중의 분노를 제도적 언어로 번역하는 최소한의 장치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장치는 부정선거 음모론이 개입할 여지를 줄이고, 이미 음모론이 지배하고 있는 ‘올공 시위’와도 선을 긋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건 이번 사태에 대한 분노가 정치 전반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비롯했다는 점이다. 거대 양당은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참정권 훼손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 당파적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데 머물렀다. 거대 양당이 대중의 요구와 괴리된 채 극단적 대결 정치를 지속하고, 내부적으로도 ‘뉴이재명’ 대 ‘친노무현·친문재인’, ‘친장동혁’ 대 ‘친한동훈’으로 나뉘어 계파 갈등과 권력투쟁에 몰두하는 모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들의 전장 뒤에서 고금리·고물가·고환율로 민생경제는 악화하고, 가계부채는 증가하며, 자영업자들은 붕괴하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 노동자, 5명 미만 사업장 노동자는 여전히 근로기준법의 보호에서 배제돼 있고, 노인 빈곤율은 세계 최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양보호사와 학교 급식노동자, 청소노동자 등 필수노동자들은 저임금·고강도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20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자산 여부에 따라 소득 하위 20%와 상위 20%의 자산 격차가 무려 19배나 벌어진 ‘찢긴 세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조건 속에서 ‘탈정치적 순수 시민’의 등장은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에 대한 환멸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의 최종장이 이런 정치를 개혁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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