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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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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목마르다

등록 2017-03-04 19:21 수정 2020-05-03 04:28
정용일 기자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정용일 기자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두툼한 누런 봉투 하나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보낸 사람, 전남 해남 황산중학교. 받는 사람, 편집장 혹은 ‘독자와 함께’ 담당자 앞. 익일특급. 소인 날짜 2월6일. 봉투엔 형형색색 17개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잡지·신문·5행시 형식으로 에 보낸 감사편지들이다(위 사진). 황산중 학생들이 직접 A4, 8절, 4절 크기의 노랑·연두·초록·분홍·빨강·검정·하양 종이에 잡지를 오려 붙여 편지를 썼다.

하얀 눈밭에 눈발이 날리고 눈사람과 가지만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연두색 A4 종이에 가지런히 적은 5행시 하나. ‘한: 한국인으로 태어나 레인 위만 달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겨: 겨울을 맞이하며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레: 레인 위를 벗어나 주위를 둘러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2: 2016년 한 해 동안 책을 보내주셔서 여러 이슈와 정치 상황, 교훈을 받았습니다. 1: 1(하나)뿐인 우리나라 최고의 언론사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좋은 내용과 진실을 담아주세요!! 황산중학교 3학년1반 오상엽, 도움 김두현.’

황산중 학생들은 2016년 3월~2017년 2월 ‘1020 캠페인’에 참여했다. 1020 캠페인은 구독료를 낼 여력이 없는 10대·20대 모임에 후원금을 모아 을 무료 배송하는 사업이다. 2월24일 현재 1020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학급·동아리·학생회·공부방 등은 33개에 이른다. 황산중에선 지난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020 캠페인 참여를 신청한 홍선희(27) 교사에게 2월22일 전화를 걸었다.

신청 계기.

동료 교사가 그동안 모아둔 을 수업에 활용해보라며 넘겨주고 학교를 떠났다. 여러 호를 한 번에 놓고 보니 수업에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매호 한 권뿐이라 많은 학생들과 잡지를 어떻게 나눠 볼까 고민하던 차였다. 지난해 2월 지면에서 1020 캠페인 광고를 봤다. 한 반에서 토론수업을 하려면 최소한 매호 20부 정도 필요할 것 같았다.(황산중은 전교생이 80명 안팎으로 한 학년에 한 반씩 있다.) 바로 신청했다.

로 수업하는 방법.

일주일에 두 차례 방과후수업에서 활용했다(아래 사진). 크게 세 종류의 방법이 있다. 첫 번째, 토론수업. 토론할 기사를 1개 정한다. 10~15분 동안 학생들이 기사를 읽는다. 기사에 관해 ‘생각할 거리’ 세 가지를 칠판에 적고 프린트물로 나눠준다. 4명씩 조를 짜서 의견을 나누고 정리된 의견을 종이에 적는다. 토론이 잘된 조는 나와서 발표한다. 그렇게 한 주에 두 번씩 매주 수업하면 학생들이 아는 것도 많이 쌓이고 말하기·토론 능력도 크게 향상된다.

두 번째, 글쓰기 수업. 학생이 흥미를 느끼는 기사나 교사가 같이 읽자고 제안하는 기사 하나를 정한다. A4 종이에 기사를 요약하고 자신의 의견을 적는다. 교사가 글을 첨삭한다. 일종의 논술수업이다. 1, 2, 3학년 모두 이렇게 글쓰기 수업을 했고, 방학 숙제로 내줬다. 1학년은 의견을 쓰게 하면 너무 어려워해서 ‘신문 일기’처럼 기사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학교 태블릿PC로 검색해서 내용을 이해하고 요약하는 것까지만 한다. 그렇게만 해도 생각이 쑥쑥 자라는 게 느껴진다.

세 번째, 표현하기 수업. 기사를 보고 주제를 정한다. 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 구조 과정을 복기해보자’와 같은 주제. 그걸 글로만 쓰는 게 아니라 잡지에 있는 글자와 사진, 그림을 오려 붙여 자기만의 신문·잡지를 만든다. 에 보낸 감사편지도 학생들이 알아서 수업에서 했던 방법대로 만든 것이다.

홍선희 제공

홍선희 제공

학생들 첫 반응과 1년 뒤 반응.

그 반응이 나에겐 정말 중요했다. 학생들이 처음엔 이 뭔지도 몰랐다. 주간지라는 개념이 없었다. 잡지도 아니고 얇은데 신문은 또 아니고…. 일단 한번 구경해보라고 했다. 학생들이 단어도 다 모르고 내용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나도 한계를 많이 느꼈다. ‘아이들이 잡지를 읽기엔 너무 어린가’ 싶었다. 그런데 3학년부터 2학년, 1학년 순으로 기사 내용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 학기가 지나자 학생들이 방학 때도 을 기다렸다. 카카오톡과 문자메시지로 ‘잡지 언제 오냐’고 묻기 시작했다.

갈수록 학생들이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특히 세월호 기사를 읽으면서 자기가 원하는 지식을 스스로 채운다는 느낌을 받았다. 초반엔 재밌는 기사부터 찾아 읽던 학생들이 이젠 정치 기사를 먼저 읽기 시작했다. 학생들끼리 ‘정치 얘기’를 하기도 했다. 가장 크게 변화를 느낀 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황산면에서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시국선언을 할 때였다. 어느 날, 반장 학생이 전화해 ‘시국선언에서 발언할 생각이니 기대하시라’고 했다. 나중에 동영상을 보니 그 학생이 동네 어르신들 앞에 나가서 ‘자유발언’을 했다. 요지는 ‘지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우리가 배운 것과 너무 다르며, 을 보면서 정치에 대해 배운 건 우리가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사회가 변한다는 것’이었다. 은연중에 학생들도 타인에 대한 관심과 공감,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이 생긴 것 같았다. 나에겐 정말 큰 의미로 다가왔다.

수업 준비하면서 인상 깊게 본 기획 연재물.

역시 세월호(관련 연재 '세월호는 끝나지 않았다'). 2014년에 벌어진 일이지만 2년이 지난 뒤에도 이 지속적으로 다루는 걸 보면서, 세월호 참사가 단지 우리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아니라 당연히 함께 해야 할 고민과 과제라고 생각했다. 학생들과 재밌게 토론한 기사는 동성애나 양성평등 기사들. 학생들에겐 생소한 주제였고 편견을 갖기 쉬운 주제였는데 의견을 나누다보니 몰랐던 부분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최근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연속 특집호를 본 소감.

솔직히 말하면 세월호 특집호에 비해 임팩트가 약했다. 학생들도 ‘박근혜·최순실’ 특집호가 처음 나왔을 땐 ‘대박이다, 우리가 (이 이슈를) 먼저 알게 되는구나’ 하면서 굉장한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5~6주 계속 나오니까 학생들도 ‘그 주제의 기사만 읽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과 거부감을 느끼고 재미없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평소 잡지 후반부에 ‘재밌는’ 읽을거리가 많았는데 특집호에선 해당 이슈를 다루는 분량이 많고 표지도 매호 같은 이슈로 나와서 그런 것 같다. (잡지가 숨 쉴 틈이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이번호부터 발행하는 탄핵·대선 연속 특집호에 바라는 점.

기획 자체는 좋다. 대선 주자 인터뷰는 꼭 보고 싶었다. 에서 본 ‘보수 인사’ 인터뷰가 쏠쏠하게 재밌었다. 진보적인 인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사들을 골고루 다뤄주면 좋겠다. 학생들과 독자가 기사 내용에 관해 생각해보고 갈증도 채우는 기회를 주면 좋겠다. 재밌는 기사도 많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2월8일 졸업한) 황산중 제자들에게 한마디.(홍선희 교사는 3월부터 인천으로 근무지를 옮길 예정이다.)

아이들이 눈과 귀를 닫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모른다고 해서 혹은 나랑 상관없는 문제니까 관심 갖지 않고 투표하지 않겠다고 하지 말고, 내 주변부터 지자체, 국가까지 크고 넓게 생각하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자기가 관심을 보인 만큼 관심을 받을 테니까. 아이들이 따뜻한 사회에서 살면 좋겠다. 그럴 만한 아이들이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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