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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민주주의

등록 2014-04-29 14:30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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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섬옥수(?) 같은 손으로 매만지는 놀림. 지저분한 것들이 손길에 싹 씻긴다. 뽀드득뽀드득, 이 소리도 나쁘지 않다. 나는 설거지하는 남자다. 빨래가 있으면 세탁기도 돌리고, 전기밥솥에 밥이 없으면 밥도 짓는다. 면구하게도 30여 년간, 올해를 빼면, 손에 물을 묻혀본 기억이 별로 없다.

“여자친구랑 헤어졌니?” 이상행동에 엄마는 이렇게 묻는다. 그럴 만하다. 동생은 컴퓨터 게임, 아버지는 TV 독점, 나는 방 안에서 독서나 스마트폰 삼매경. 저녁 7시께 우리 집 실황이다. 밥 짓는 소리와 함께 그릇이 달그락거리면 다들 방에서 기어나온다. 코앞까지 밥상을 들이밀어야 숟가락을 드는 삼부자였다. 전업주부가 아님에도 엄마는 그걸 모두 해냈다.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는 눈빛을 하고서는.

마음속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회사를 그만둔 직후부터다. 늘그막까지 한결같이 가사를 하는 엄마의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나도 철이 든 걸까? 그래서 빨랫감을 세탁기에 밀어넣고, 주방을 닦고,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세탁기와 주방도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어도 몸은 ‘난리부르스’였다. 생각해보면 모든 걸 ‘한큐’에 해결하던 엄마는 정말 ‘나빌레라’, 한 마리 나비 같았다. 한 달이 조금 지나니 몸에 익었다. 아직까지도 설거지를 하고 나오면 옷에 물이 흥건하다.

뒤늦은 효심이 발동해서가 아니다. 이건 권리의 문제였다. “남성이 여자만큼 가사노동을 하지 않는 한, 그 노동과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인류의 모든 민주주의는 실패한다.”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의 말이다. 아침에 늦잠을 자는 엄마를 툭툭 쳐 “어서 밥해”라고 말하는 우리네 아빠, 양말을 휙 집어던지며 방문을 닫고 마는 토끼(?) 같은 자식, 거기다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있다면? 솔거노비와 다를 바 없는 삶, 가부장 속에서 여성이 겪어야 했던 현실이다.

세상이 나아지려면 가사 ‘분업’이 필요하다. 아주 철저하게 말이다. 한국인은 민주화를 자랑스러워하지만, 집·학교·일터 등 일상에서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 밥그릇과 접시가 주방에 가득 쌓여 있는 한 민주주의 실현은 언제나 고차방정식 풀이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가사노동은 머릿수대로 잘게 쪼개야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엄마, 아들, 딸이 N분의 1로 노동을 짊어지고서야 ‘민주’를 말할 수 있다.

김도연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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