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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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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밥솥을 숨기자

등록 2013-12-10 14:37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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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이상해. 예전 집보다 전기요금이 계속 덜 나오네. 왜 그러지?”

이사하고 달라진 게 있다면 전기밥솥이 없는 듯 생활한다는 점뿐이었다. 그 차이가 이렇게 큰가. 공동전기료는 더 내는데 개별 전기료는 훨씬 줄었다. 나는 요즘 주로 가스불에 스텐압력솥이나 뚝배기로 밥을 짓고 어쩔 수 없을 때만 전기밥솥을 쓴다. 고등학생인 둘째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저녁 급식 대신 집밥을 먹으러 허겁지겁 달려온다. 학교 앞 엎어지면 코 닿을 데로 이사한 덕이다. 딸아이는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뚝배기에 갓 지은 밥으로 독상을 차려주면 반찬이 없어도 잘 먹는다.

나는 예전부터 전기밥솥의 불 켜진 숫자에 예민했다. 그런 문제로 부부싸움까지 했었다. 몇 년 전 남편이 도시락을 싸느라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예약 기능이 있는 밥솥을 사준 게 화근이었다. 잠들기 전에 준비해놓으면 아침에 30분은 더 잘 수 있다고 나름 배려한 것인데, 나는 밤새 플러그를 꽂아놓는 걸 용납할 수 없다며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딸아이가 어릴 때 친구 집 밥솥에 48시간 넘게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와서 “엄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라고 그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전력 대란을 빌미 삼아 원전불가피론을 펼치는 이들 앞에서 생활 속 전기의존도를 줄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저항이었다. 전기요금 고지서를 내 결심에 대한 성적표처럼 받아보았다. 그랬던 내가 새 물건의 편리함 앞에 길들여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쌀을 불리지 않아도 현미밥을 차지게 만들어주는 전기압력밥솥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는 사이 식탁 옆 보온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 숫자가 금세 두 자릿수를 넘어가는 날이 늘었다. 그걸 쳐다볼 때마다 얼마나 뜨끔했던지.

그래서 올여름 이사하면서 아예 부엌에서 밥솥을 치워버렸다. 커피 물을 끓이거나 간단한 조리를 위해 즐겨 쓰던 전자레인지도 장 속에 집어넣었다. 일단 부엌에서 전기 조리기구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마음에서도 멀어졌다. 그렇게라도 해야 몸에 익은 습관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런데 전기요금이 줄어든 것보다 더 좋은 점은 조리할 때 억지로라도 창문을 자주 열게 된다는 사실이다. 내가 무의식중에 전기 조리기구 사용이 늘었던 이유가 부엌에서 발생하는 유해가스가 흡연보다도 폐암 유발과 더 밀접한 상관이 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싱크대 일체형 전자레인지가 유행할 즈음에 처음 본 기사였다. 무조건 새것으로 바꾸라고 부채질하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 아니었을까 의심스럽다.

아무튼 나는 불편하지만 다시 불꽃이 보이는 삶으로 돌아갔다. 불꽃을 위해 기꺼이 창문을 활짝 열어 바깥 공기를 공급받는 게 결국 우리 삶의 숨통도 틔워주리라 믿는다. 눈앞에서 불꽃이 보이지 않는 전기야말로 가장 비싸고 폭력적인 에너지가 아닐까. 가장 전기를 적게 쓰는 산골 벽촌 노인들의 피눈물이 고압송전선로를 타고 지방에서 서울로 흘러들어온다는 사실을 아프게 돌아보게 되는 요즈음이다.

김선미 저자*‘레디 액션!’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소소한 제안을 하는 코너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제안하고 싶은 ‘액션’을 원고지 6~7장 분량으로 적어서 han21@hani.co.kr로 보내주세요. 레디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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