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3월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각각 13%, 43% 인상하기로 결정한 국민연금 개혁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뒤 청년세대 등의 반대 목소리가 크다. 사진은 4월11일 ‘연금개혁청년행동’이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계단 앞에서 ‘연금개악 규탄 집회’를 여는 모습. 연합뉴스
*이 글은 김애란 작가의 소설 ‘입동’의 전개 및 주요 내용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잘 짜인 이야기의 구조에 대해 가르칠 때 학생들과 함께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입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읽는다. 소설의 도입이 막 지나는 지점에서 서울 외곽에 많은 대출을 끼고 첫 집을 장만한 주인공의 아내는 “영우도 여기 좋아”라고 말하는 아들에게 왜 여기가 좋냐고 묻는다. 영우는 “응. 부릉부릉이 엄청 많아. 엄청 멋있어”라고 답한다.
여기까지 읽고 ‘영우가 왜 이렇게 대답한 것 같냐’고 묻는다. 이야기에는 말 한마디, 탁자 위의 꽃병 하나 허투루 쓰이는 것이 없어야 함을 상기시킨다. 이야기하다보면 한 명 정도가 머뭇거리면서 답한다. “영우가 교통사고로 죽나요?” 그렇다고 말하며 학생들에게 창작자는 남의 작품을 읽을 때 그저 읽으면 안 되고 작가가 앞과 뒤의 이야기를 어떻게 촘촘하게 연결하는 구조를 짜놨는지를 파악하면서 읽어야 한다고 알려준다. 연결고리가 길고 촘촘할수록 멋진 작품이다.
이야기 읽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선형적 읽기’다. 읽기의 가장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읽는 것은 선형적 행위다. 문장을 따라 시간을 들여 쭉 하나의 선을 그려가며 읽는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이 시간이 드는 선형적 읽기를 지속시키는 가장 큰 요소는 문장이다. ‘다시, 책으로’의 저자 매리언 울프의 말처럼 문장은 ‘느껴지는 감각의 양식’이다. 김애란의 문장은 매력적이다. 독자는 김애란의 문장을 정보나 의미 전달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느낀다. 그러니 계속 읽는 것이다.
또 다른 읽기가 있다. 함께 공부하는 한 국어 교사가 개념화한 것을 빌리면 ‘구조적 읽기’다. 이야기는 앞의 문장과 지금 문장, 그리고 바로 뒤의 문장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문장이 드러내는 사건에는 훨씬 이전에 발생했던 사건이 영향을 끼치며 길게 연결된다. 또한 지금 벌어진 사건은 바로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한참 이야기가 진행된 다음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때 독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 그래서 앞에서 작가가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 내가 ‘긴 고리’라고 말하는 장치다.
보통 복선이라고 말하는 이런 긴 고리들이 이야기를 선형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으로 만든다. 바로 연결되고 의미가 드러나는 시간적인 ‘선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뛰어 연결되며 공간적인 구조를 갖추게 된다. 이때부터 독자는 문장을 넘어 구조를 읽는 재미를 느낀다. 눈 밝은 독자일수록 여기서 작가가 왜 이 말이나 소품을 배치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언제 연결해 딱 맞추는지, 그 긴 고리의 시간적·공간적 정합성을 흥미진진하게 추리하고 관찰한다. 이야기를 하나의 총화된 것으로 엮어내는 고리들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 그것이 읽는 역량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가정관리사 여성은 20년 전 도둑에게 털릴 것을 미리 알려준 애순의 딸을 위기에서 구해준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화면 갈무리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금명이 대리 시험을 거부한 다음 도둑질했다는 누명을 썼을 때의 이야기다. 주인의 함정에 빠져 금명이 꼼짝할 수 없을 때 그를 구해준 것은 집안일을 돌보던 ‘가정관리사’ 여성이다. 그와 언니 동생 하는 사이인 주인은 금명을 아냐고 화내며 묻는다. 그러자 그 가정관리사는 안다고 맞받아친다. 사실 그는 애순과 관식이 여관에서 탈탈 털리고 쫓겨난 다음 몰래 그 여관으로 다시 들어가 주인이 도둑이라는 것을 알려줬던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 그가 그걸 왜 알려주냐고 묻자, 애순은 “언니도 털리면 속상하니까, 속상하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애순의 딸에게 돌려준 것이다.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일 수 있지만 이야기는 이처럼 긴 고리로 구성된다. 잘 만든 작품은 이 긴 고리가 시간적·공간적으로 낭비 하나 없이 딱 맞춰 등장하고 풀리며 구조적 안정성을 잘 갖추고 있다. 문제는 고리가 길수록, 여러 개일수록, 또 고리들이 서로 얽혀 있을수록 길어지고 읽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쇼츠처럼 단 하나의 에피소드만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지는 이야기의 형식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복잡하다. 유튜브처럼 친절하게 이 고리들을 하나하나 다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에 익숙해지면 작품이 불친절하게 느껴져 대중은 안 읽는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런 시대에는 ‘친절한 작품’과 ‘좋은 작품’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괴리가 있으며 그 균형점을 잘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역으로 보면 읽기는 ‘긴 고리’에 대한 감각을 키운다. 흘러가는 사물들이 바로 직전과 직후의 것으로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여겨지는 것들과 긴밀하고도 긴 고리로 연결됐다는 것에 대한 감각을 키운다. 이 감각이 있어야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 시작점이 어디인지 거슬러 올라가며 상관없어 보이던 것들이 그 시간 동안 어떻게 서로 연관되며 지금의 사건을 만들었는지 구조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근대사회의 시민들에게 가장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이 읽기를 통해 생기는 이 긴 고리에 대한 감각이었다. 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당장의 사건에 흥분하며 사건의 직전과 직후에만 주목한다면 어떤 사건의 의미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눈앞의 사건에 흥분한 ‘군중’과 달리 시민은 그 뒤의 보이지 않는 고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었다. 고리를 찾아 올라가며 사건의 시작점이 어디라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사건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고 해법도 달라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 다른 이야기를 의견이라 불렀고 의견들이 겨루고 토론하는 곳이 근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인 ‘공론장’이었다.
나아가 긴 고리에 대한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란 ‘즉각적 등가교환’의 공간이 아니며 그런 방식으로는 사회를 만들고 유지할 수 없음을 알았다. 구성원과 구성원의 소통과 교류가 ‘주고받기’가 바로 이뤄지는 즉각적 등가교환이기만 하면 붕괴한다는 것이다. 즉각적 등가교환 관계에서는 구성원들의 운명이 연결됐다는 공유된 정체성이나 공통의 것에 대한 감각을 전혀 가질 수 없다. 그저 낱개로 흩어져 있을 뿐이며 공통의 운명에 맞설 수 없었다.
낱개로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긴 고리로 연결됐다는 것에 대한 감각으로, 근대 시민들은 더 의식적으로 즉각적 등가교환을 넘어 구성원들을 긴 고리로 연결하려 했다. 그래서 만들어지고 확장된 것이 상호부조 시스템이다. 대표적인 것이 건강보험과 국민연금 같은 제도다. 지금 내가 내는 건강보험료가 지금 당장 나에게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언젠가 시간적 차이를 두고 나에게 돌아오거나 더 길게 보면 내 후손에게 돌아오면 된다. 나아가 나와 직접 연결된 사람에게 돌아오지 않아도 공동체 내에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 시스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세상은 시간적·공간적으로 긴 고리로 연결됐다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문화적 산물이다.
흥미롭게도 이 감각을 키우는 ‘읽는 역량’ 역시 인간에게 유전되는 타고난 것이 아니다. 읽는 것은 명백하게 문화적인 것이다. 가만히 둔다고 저절로 유전적 힘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매리언 울프가 그의 책 ‘프루스트와 오징어’에서 말한 것처럼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않은 프로세스를 학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제도적 환경’이다. 이 제도적 환경이 보편적으로 갖춰질 때 아이들은 자기가 타고난 지역이나 가족과 같은 개인적 ‘운’을 넘어 긴 고리에 대한 감각을 가진 ‘읽는 역량’을 가진 사회적 시민으로 자랄 수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이 문화적 역량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교환과 다른 ‘증여/선물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증여/선물은 ‘주고’ ‘받고’ ‘돌려주고’의 세 과정으로 이뤄졌다. 이 세 과정이 시간차와 공간차를 가지고 긴 고리를 형성하며 순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차와 공간차가 없는 것도 문제이며 순환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시간차와 공간차가 없다면 그것은 즉각적 등가교환이 되고 순환하지 않는다면 신뢰가 붕괴한다. 무엇보다 길지만 순환한다는 것, 즉 시간차와 공간차가 있더라도 1)주면 돌려받으며, 2)받으면 돌려줄 것이라는 신뢰가 결정적이다. 이 신뢰가 집단적으로 깨져버리면 사회는 붕괴하며 사람들은 지금 당장 바로 돌려받을 수 있는 즉각적 등가교환만을 선호하게 된다.
사회를 형성하는 ‘긴 고리’는 인간 본성에 따른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집단생활을 하는 것을 넘어 상호부조 시스템 등으로 서로를 엮은 것은 유전자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다. 사회를 이루는 연결을 만들기 위해 소통하고 협력하고 집단을 이루는 역량은 유전적 역량일지 모르나, 그 역량을 엮어서 즉각적 등가교환을 넘어 증여/선물의 상호부조 시스템으로 확장한 것은 의식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정치의 역할은 분명하다. 하나는 긴 고리에 대한 감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에 대한 신뢰가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앞의 것은 읽는 역량과 직결된다. 그것도 구조를 잘 갖춘 글을 깊이 읽는 역량 말이다. 한 사회의 공론장 성숙도는 시민들의 이 ‘깊이 읽기’ 역량에 따라 좌우된다. 시민들이 가짜뉴스와 하루하루 휘발되는 자극적 가십에 넘어가지 않고 ‘정치적 토론’을 하려면 깊이 읽기 역량을 갖추기 위한 제도적 환경을 만드는 데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도서관과 독서에 대한 정책적 의지에 우리 ‘문명’이 걸려 있다.
다른 하나는 긴 고리가 작동한다는 것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긴 고리에 대한 불신에 단단히 휩싸여 있다. 여기에는 능력주의 폐해부터 자본주의 투기 심화 등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동했겠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이 국민연금 논란이다. 돌려주지 않을 것이고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만과 불신은, 차라리 모든 긴 고리를 깨고 즉각적 등가교환으로 만들자는 주장으로 확산될 것이다. 이것이 지금 한국 사회 전체에 불온하게 감돌며 (다행히 이번에는 계엄에 대한 탄핵으로 저지됐지만) 언제든 반격의 기회를 엿보는 극우화의 가장 근본적인 자양분이다. 돌려받지 못하고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 협박하며 불신을 조장해 신뢰의 지평을 점점 짧게 하는 것 말이다.
이는 특정 세대, 특정 젠더에서 특징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시대 전체를 감도는 전 지구적으로 공통된 보편적 경향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이미 짧아져버린 지금 당장 신뢰에 부합하는 정책만큼(위기의 순간 이런 접근은 필수적이다)이나 신뢰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보편적 정책이 필요하다. 여기에 극우화로 치닫는 세계의 운명이 달렸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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