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날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는데 밖에서 청소하고 오면 덥죠. 우리가 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지만 다 노인네들이니까.”
서울 노원구 ㅅ아파트 경비노동자 최아무개(75)씨는 5년 전 경비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라’는 그의 일은, 한여름 땡볕 아래 하기엔 꽤 힘든 일이다. 1층 베란다 아래 버려진 돌이나 상자, 화분을 옮기고 어질러진 분리수거장에서 쓰레기 분리배출 작업을 한다. 지하실 대청소를 한 날이면 한쪽으로만 창이 난 경비실이 유난히 후텁지근하게 느껴진다. 그는 “30년 넘은 아파트라 다른 초소는 사람 한 명 들어가면 꽉 차는 크기다. 바람이 통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이곳 경비노동자들이 한여름만이라도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게 된 건 2021년 7월부터다. 2020년 10월 노원 주민 1만7547명이 한 해 쓰고 남은 구 예산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를 두고 투표했다. 온·오프라인에서 주민이 원하는 정책을 물어 5개 선택지를 추렸는데, 주민에게 세금을 돌려주자는 ‘세금페이백’이 1위(43.6%), ‘아파트 경비실 에어컨 설치’가 2위(15.4%)였다. 3~5위는 ‘일하는 사람에게 빠짐없이 고용보험료 지원’ ‘노원구 장애인 자활센터 노동자 최저임금법 준수’ ‘노원구민 독감 무료 예방접종’ 순서였다.
주민들은 이 내용을 2021년 정책에 반영해달라며 노원구청장에게 전달했다. 구의회도 주민자치회도 아닌 민간이 실시한 투표 결과였지만, 노원구는 이를 받아들였다. 2021년 2월부터 아파트 경비실 에어컨 설치 사업에 2억여원이 투입됐다. 2020년 67%였던 노원구 아파트 경비실의 에어컨 설치율은 96%로 뛰어올랐다. 세금페이백 정책도 ‘저소득층 재난지원금’ 형태로 실행됐다.
노원 주민들의 이 도전은 ‘노원주민대회’로 불린다. 시작은 2019년이었다. 진보당 소속 최나영(46)씨는 1조원이 넘는 구 예산을 살펴보다가, 한 해 남는 순세계잉여금이 1천억여원에 이른다는 데 놀랐다. 남은 예산이 다음해 추가경정예산으로 활용되지만 ‘우리 집 가계라면 더 정교하게 짜지 않았을까. 주민에게 가닿지 못한 예산이 있다면 사용처를 주민과 논의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당, 지역 노동조합, 주민모임 등 50여 단체가 연계해 노원주민대회 조직위원회를 만들었다. 노원구 12만여 가구 우편함에 주민투표를 홍보하는 소식지를 배포했고, 길거리와 온라인에서 주민들이 원하는 정책을 물었다. 모은 의견을 5개 선택지로 추려 60여 곳의 투표소에서 주민투표를 했다. 투표소 앞에서 어느 정책에 투표해야 할지 엄마·아빠·아이가 토론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렇게 2019~2021년 가을마다 투표를 진행했다.
노원역에서 토스트 장사를 하는 배태연(62)씨는 3년간 노원주민대회에 참여했다. 배씨는 “소식지에서 처음 우리도 직접 정치할 수 있단 말을 봤을 땐 이게 되겠나 싶었다”며 “그런데 하나씩 우리가 투표한 게 실현됐다니까 ‘아, 이게 되는구나. 우리 같은 사람 한 명은 정치인이 안 보지만, 여럿이 같이 하면 보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질문 던지고 오해를 풀 기회 만드는 ‘직접정치’6·1 지방선거가 코앞에 다가왔지만, 후보들은 이름보다 소속 정당의 유니폼 색깔로 기억된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되는 거대 양당 위주의 지방선거 구도에선, 기초의원 후보들이 주민보다 당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런 대의정치의 한계 속에서, 노원주민대회는 주민이 직접 정치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원주민대회 공동조직위원장인 최나영씨는 “동네 꽃밭을 보고 ‘이걸 만드는 데 내가 낸 세금이 얼마나 들었을까, 나라면 더 적은 돈으로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누구나 할 때가 있지 않냐”며 “구나 구의회가 잘못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주민이 최소한 질문을 던질 기회, 오해를 풀고 갈 기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원주민대회는 2021년 말 노원구에 조례 제정을 요구했다. 매년 2월 구청이 전년도 세입세출 마감 결과를 공유하고, 주민 200명 이상이 요구하면 결산에 대한 주민감사회를 의무적으로 열자는 내용이다. 노원구청이 ‘상위 법령 위반 소지가 있다’며 요구를 각하했지만, 이번 지방선거에서 구의원에 도전하는 최나영씨는, 구의회에 입성해 주민들이 예·결산에 동참할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계획이다.
2022년 4월 국민권익위원회가 전국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의 운영실태 점검 결과를 발표했는데, 지방의원의 이해충돌 발생 의심 사례가 9600여 건, 지방의원이 지자체와 수의계약을 체결한 의혹이 100여 건에 이르렀다. 각 자치구가 예산 사용처를 구의회에 보고하고, 구·서울시·감사원 감사까지 받지만 주민의 불신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재 자치구 예산에 주민이 관여할 기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주민자치회·주민참여예산제도 등 일부 참여 기회는 보장됐지만 정해진 금액, 선정된 사업 범위 안에서 예산 사용 방안을 논의하는 정도의 권한일 뿐, 지자체의 예·결산에 대해 질문을 던지거나 구의회를 감시하는 역할은 하지 못한다. 노원구 하계1동 주민자치회에서 활동하는 한 주민은 “적은 돈으로 공원을 조성하거나 위험한 등굣길에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등 보람 있는 일을 많이 했지만, 전체 구 예산에 대해 정보를 요구하고 질의할 기회가 없다는 건 답답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주민들이 원하는 정책 1위로 ‘세금페이백’이 뽑힌 걸 보면 (주민 직접정치가) 기대했던 바와는 다를 수 있다”면서도 “진짜 중요한 의미는 주민이 순세계잉여금에 대해 직접 문제제기하고 감시했다는 사실이다. 그 자체로 구나 구의회는 주민을 한 번 더 신경 쓰게 된다”고 말했다.
노원주민대회의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방선거가 끝나는 여름, 조직위는 다시 소식지를 만들고 주민이 원하는 정책 선택지를 모은다. 조직위는 2022년 가을에도 투표를 진행해 구와 정치인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주민대회로 권리를 찾은 경비노동자 최씨는 말했다.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준 것도 고맙지만, 마음이 모일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들이 참 고맙죠. 이렇게 없는 사람, 서민들 이야기를 듣는 분이 의원님이 되면 좋겠어요.”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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