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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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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대남입니다만

‘이대남’ 현상이 부끄럽고 불편하고 허탈한 ‘이대남’ 밖의 20대 남성들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 깃발 아래에서 반대 목소리 내기 시작
등록 2022-02-12 20:31 수정 2022-02-13 12:16
2022년 2월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20대 남성들이 꾸린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회견을 열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2022년 2월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20대 남성들이 꾸린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회견을 열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대선 한 달 앞, 제도권 언론과 양당의 관심은 온통 ‘이대남’(20대 남성)이다. “이대남은 전 연령대에서 가장 보수적”(<중앙일보>)이라고 못박거나, 이대남을 위해 ‘여성가족부 폐지’(국민의힘), ‘병사 월급 200만원’(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을 약속하고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인터뷰 발언)고 선언하는 식이다.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둔 2021년 4·7 재보궐선거 이후 ‘보수화된 이대남들의 표가 선거의 당락을 가를 것’이란 보도가 줄을 잇자, 지지율 1·2위 대선 후보가 모두 이대남들에게 총력 구애하고 있다. 재보궐선거 투표장에 나서지 않은 과반의 이대남과 표류하는 ‘이대녀’(20대 여성)의 표심은 계산되지 않는다.

‘최강 보수’로 명명된 이대남 현상의 복판에서 불편함과 갑갑함,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이대남’ 밖의 이대남들이다.

20대 남성들 ‘페미니즘 지지’ 나선 이유

“저는 허탈한 심정이에요.” 이대남 현상을 지켜보는 김태환(28·대학원)씨의 마음이다. 젊은 남성을 둘러싼 담론이 재보궐선거 뒤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걸 보며 “본격적으로 현실정치에서 활용하려는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을 둘러봐도 언론이 묘사하는 이대남의 특성(여성혐오, 소수자 차별 등)을 그대로 가진 이는 별로 본 적이 없다. “수많은 요소 가운데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겠지만 그런 전형성을 가진 사람은 없죠. 군대 문제를 비롯해 개선할 게 있으면 목소리를 냈어야 하는데 그동안 20대 남성들이 얼마나 목소리를 안 냈으면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이익관계에 의해 이용되는 걸까,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너무 문제제기를 안 했구나 하는 허탈함이 생겼어요.”

김연웅(27·취업 준비)씨는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정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차별과 폭력을 선거 의제로 끌고 오는 상황이잖아요. 제도권 정치가 금단의 열매를 따는 걸 보면서 우리 사회의 정치 역량이 이 정도인가 생각이 들어요.” 김태환씨와 김연웅씨가 동료 청년들과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라는 깃발 아래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한 이유다.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은 “정치와 언론이 펼치는 성별과 세대 갈라치기”에 반대하며 청년들이 꾸린 활동단체다. 이가현 ‘불꽃페미액션’ 활동가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의견을 모으고 이에 동의하는 15명 안팎의 청년 남성이 함께 활동 방향을 정해가고 있다. 회사원, 학생, 활동가 등 직업은 다양하지만 ‘성차별에 반대하고 성평등한 세상을 꿈꾼다’는 사실 하나만은 같다. ‘출범 기자회견’ 성격의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회견(2022년 2월9일)을 시작으로 이들은 대선 국면에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청년들의 요구사항을 공론화해나갈 계획이다.

목소리를 내는 데 고민이 없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조심스러웠던 게 있어요. 페미니즘을 말하는 데 여성의 목소리가 더 많이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남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게 맞나 하는 고민이 있었죠. (여성들의) 여러 활동에 연대하고 지지하는 방식으로 활동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거든요.” 김연웅씨의 설명이다. 김씨는 “이대남 프레임이 오히려 공간을 열어줬다”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대남 담론이 만들어지면서 반대급부가 생겼어요. 차별의 목소리가 20대 남성의 대표성을 가져선 안 된다는 생각에 적극 나서게 됐어요.”

“낙인 때문에 말 못하는 남성들도”

이들이 첫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성명서엔 375명이 이름을 올려 응원을 보냈다. “이 세상에 그저 이대남으로만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성명서에서 이들은 동료 청년 남성들에게 “‘남자다움’이라는 성별 고정관념과 가부장제의 악습이 부담스럽고 불편하다면, 성평등한 세상에서 차별과 폭력 없이 함께 살아가고 싶다면, 침묵에서 깨어나 함께하자”고 권한다. 김연웅씨는 “연대서명을 신청하는 글에 다양한 응원이 담겼는데 ‘나도 이대남인데 동의한다’는 생각을 남겨준 이가 많았다”고 했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백래시(반격)나 낙인을 우려해 말하지 못하는 또래 남성들도 있어요. 먼저 목소리를 낸 이들이 있으면 함께하기 수월할 거라고 생각해요. 이게 첫 계기가 될 거 같아요.”

청년층, 특히 청년남성 집단 안에 페미니즘에 대한 낙인과 소수자 혐오 정서는 실재한다. 그러나 집단을 벗어나 개인으로 대화를 나누면 설득과 합의가 가능하다는 게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에 속한 청년들의 생각이다. 김연웅씨는 “2017년을 전후해 백래시가 본격화되면서 페미니즘 관련 활동을 하면 교내에서도 조롱하거나 공격하는 분위기가 있던 건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의외로 일대일로 대화를 나눠보면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의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선 ‘잘 몰랐다’고 하거나 반대 의견을 보류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문제가 뭘까요. 성평등이라는 주제는 전세계적으로 일정 시점 이후 공감대가 형성됐는데도 한국의 제도권 정치와 미디어가 성숙한 태도로 공론장을 끌어가지 않고 차별과 혐오를 정당화하니까 청년층도 ‘조롱 문화’라는 하위문화에 머문 게 아닐까요.”

유호준(27·회사원)씨는 지금의 이대남 현상이 특정한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과잉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억울하고 답답합니다. 20대, 남성. 나이와 성별로 그룹을 나누는 것만큼 쉬운 분류가 없죠. 이런 손쉬운 분류에선 다양한 의견이 존중받기보다 목소리가 크고 극단적인 말을 하는 사람의 입장이 크게 반영될 수밖에 없고요.”

이대남 현상이 주목받으면서 20대 남성 내 이주민, 성소수자, 싱글대디, 비정규직 노동자 등 다양한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모두 묻히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반성폭력 활동, 총여학생회 활동에 앞장선 유씨는 페미니스트다. 그는 무엇보다 ‘차별을 긍정하는 이대남’이라는 프레임 아래 그 자신이 속한 동세대 남성들이 낙인찍히고 고립될까 걱정스럽다고 했다.

실제로 여론조사 등 각종 수치에서 이대남의 보수정당 지지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건 맞다. 하지만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유동하는 영역이 크다. 4·7 재보궐선거 당시 방송 3사(KBS·MBC·SBS) 출구조사에서 20대 남성의 72.5%가 서울시장 선거에서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했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이대남이 선거판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당시 연령대별 투표율을 보면 서울시장 선거의 20대 투표율은 46.9%로 모든 연령대에서 가장 낮았다. 20대 남성 절반 이상은 아예 투표장에도 가지 않았지만 이대남으로 분류되는 보수 성향의 청년 남성이 적극 투표에 나섰고, 여기에 이준석(국민의힘 대표)이라는 대표성을 가진 정치인이 결합하며 이들이 정치 고관여층으로 형질전환을 이룬 것이다.

2021년 12월12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당사 앞에서 여성 유권자 단체 ‘샤우트아웃’이 여성혐오에 편승해 대선을 치르려는 양당 후보들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맞은편에선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신남성연대가 맞불집회를 벌였다.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2021년 12월12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당사 앞에서 여성 유권자 단체 ‘샤우트아웃’이 여성혐오에 편승해 대선을 치르려는 양당 후보들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맞은편에선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신남성연대가 맞불집회를 벌였다.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차별과 폭력에 대표성을 줄 순 없어

이가현 활동가는 기자회견에서 “이준석은 서울에 거주하는 20대 남성의 특정 선택에 대해 안티페미니스트로서 정체성의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대남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주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에 앞서 ‘공정’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른바 조국 사태, 그리고 86세대로 대표되는 기성 정치권의 실패가 이들에게 끼친 영향이 크다.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 이대남 현상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건 이런 흐름이 청년층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 전반을 후퇴시킨다고 봐서다. “안티페미니즘이란 건 분명 페미니즘에 대한 폭력이고 여성에 대한 폭력인데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차별을 주장하는 집단에 서사와 대표성을 안겨주는 건 사회적으로 위험합니다. 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데 정치권이 암묵적으로 동의해주는 거니까요.” 김연웅씨의 설명이다. 행정학을 공부하는 김태환씨는 “이대남 담론이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게 우려스럽다”고 했다. “획일화되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게 없어요. 20대 안에도 다양한 의제와 입장이 있는데 그저 젠더갈등이란 프레임 하나로 압축해 납작하게 보여지고 있잖아요. 그걸 정치가 가져다 쓰고, 그런 과정이 민주주의를 해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결국 그런 구조를 바꾸고 프레임을 다시 짤 수 있는 건 청년들 본인뿐이다. 이들이 취업과 직장생활, 학업 등 각자의 버거운 삶이 있는데 짐을 지겠다고 자처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유호준씨는 “중국 문화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이 10년을 치열하게 보냈음에도 결국 시대로부터 뒤처지고 고립됐는데, 지금 20대들도 다른 집단과의 사회적 연대와 포용을 배우지 못한 채 그저 고립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고 했다. “여기에 이렇게 우리가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줄 거라고 봐요. 서로 많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합의를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중간쯤에서 만날 수 있기를

양극단에만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양극 사이에 놓인 수많은 개인의 힘을 김태환씨는 믿는다. “저는 세상을 스펙트럼으로 보는 사람이거든요. 헷갈리는 분들, 알고 싶어 하는 분들, 중간지점과 회색지대에 있는 분들을 만나 대화해나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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