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전가의 보도가 나왔다. 사회적 합의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2021년 6월17일 BBS 라디오 <박경수의 아침저널>에 나와 “차별금지법은 시기상조”라고 말하며 “입법 단계에 이르기에는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는 보수 진영에도 여러 입장이 혼재됐는데 “기독교적 관점을 가진 분들”도 있다며 특정 종교를 딱 짚어서 말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보수 진영 내에서도 확장된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런 입장은 6월20일 서울 강남역 11번 출구 앞에서 열린 ‘강남역 모여라’ 행사에서 다시 한번 확인됐다. 그는 이 자리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해 “당의 입장을 말할 정도로 논의된 것이 없다”고 했다.
이 말을 하기 불과 3일 전에 이준석 대표는 다른 ‘개인적 소신’을 밝혀 화제가 됐다. 그는 6월14일 KBS 라디오 <열린토론>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이미 상당히 숙성된 논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대부분의 사안에 공감대를 가지고 있으며” 동성애를 포함해 “개인의 특성에 대해 절대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의 이런 ‘개인적 소신’ 표명에 제법 많은 사람이 30대라는 그의 나이에 주목하며 차별금지법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권에서 세대교체가 확실히 효과를 갖는 것 같다고 긍정했다.
사실 상대적으로 나이 든 사람들에게 동성애는 ‘가족’이나 ‘도덕’ 같은 집단주의적 가치와 연결돼 이해된다. 진보적인 사람에게서도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몸으로는 움찔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반면 젊은 세대일수록 이런 문제를 이준석 대표의 말처럼 개인 특성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 사안은 전적으로 ‘개인의 권리’ 문제고 타인에게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강하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젊은 세대에서 ‘개인’과 ‘권리’는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당대표 선거로 이준석 대표의 전매특허가 돼버린 ‘청년정치’와 ‘세대교체’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20대를 중심으로 한 청년 세대에서 나타나는 반민주당 정서와 이준석 ‘현상’에 긴장하는 민주당이 특히 그렇다. 평등법을 대표 발의한 이상민 의원이 “생물학적 나이만 젊지 실제는 구태 정치와 다를 바가 없다”고 비판한 것이 대표적이다.
‘말 바꾸기’에 대해서 이준석 대표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것을 넘어 그의 말(과 그에 대한 논란)은 다른 정치인의 말과는 다르게 솔직하게 한국 정치의 대립 전선이 어떻게 그어지는지 담론적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한국 정치권이 ‘사회’라는 말을 무슨 의미로 사용하는지, ‘합의’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나아가 사회와 합의를 위해 ‘정치인’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하는지 잘 드러낸다.
우선 그의 말에서 지금 한국 사회에서 ‘논의’가 가장 부족한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다. 먼저 그는 이미 한국 사회에 “상당히 숙성된 논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 숙성된 논의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전체로서의 한국 사회일 것이다. 그런데 그는 3일 뒤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앞에 ‘입법 단계’라는 말을 붙인다. 즉 전체로서 한국 사회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상당히 숙성된 논의가 있지만, 입법 단계에서 논의해야 하는 ‘국회’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 논의가 부족한 것이다. 사회적 논의가 부족한 곳이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자기 ‘직업’이자 ‘활동 공간’인 정치권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드러낸 것이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의 이준석 대표에 대한 비판이 이 부분이다.(장혜영 의원은 6월17일 페이스북에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께 드리는 고언’이라는 글을 올려 “숙성된 논의가 단 3일 만에 갑자기 '미성숙 단계'로 돌변하다니, 자나 깨나 논리를 강조하던 이준석 대표답지 않다”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보자. 이 논의가 부족한 사회인 정치권에서도 가장 논의가 부족한, 아니 없다시피 한 곳이 어디일까? 그는 이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솔직하게 말했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그는 ‘강남역 모여라’ 행사에서 “당의 입장을 말할 정도로 논의된 것이 없다”고 했다. 즉 정치권도 논의가 부족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논의가 부족한 곳이 바로 이준석 대표 자신의 정당이라고 밝혔다. 그것도 논의가 부족한 게 아니라 “없다”고 했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치인과 비교해보면 그는 자신의 정당에 대해서도 매우 솔직하다.
그래서 그는 차별금지법에 우호적인 입장을 말할 때도 “정당 대표로서 개인 입장을 표명하기 굉장히 두렵다”고 했다. 그가 강조하는 것처럼 미국에서 공부하고 경험한 자신은 “개인의 특성에 대해 절대 차별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정치권, 특히 자기 정당은 구분해야 하는 사안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당히 혼재”돼 있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혼재”돼 있는데 이 말 앞부분에서 자기가 속한 보수 진영에 “혼재도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도 역시 그가 ‘혼재’라는 말을 사용해 판단이 부족한 곳을 보수 진영으로 특정한 것이 흥미롭다.
판단은 구별하는 행위다. 사람이 어떤 사안에 대해 판단하는 건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판단하는 것에 한해 사람들은 다른 이름을 붙인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구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구분된 것들 각각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에 따라 다시 별자리를 구분해 인식한다. 다른 것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판단이다. 사람은 구별하는 것을 통해 인식하고 인식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구분하지 못하면 판단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런데 그는 보수 진영이 동성애와 동성혼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혼재돼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논의가 진전이 안 되는 것은 사회가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내 사회인 보수 진영의 주축 국민의힘이 구별해야 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판단 불능’ 상태임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을 제외하고는 말이다.(그리고 탈식민주의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그가 그렇게 구분할 수 있는 이유를 “미국에서 교육할 때”라고 말한 것도 흥미롭다. 비아냥이 아니라는 꼬리표를 붙이기 위해서 말한다면 진보·보수 가르지 않고 서구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자기 말의 정당성 근거를 ‘공부한 곳’에서 찾는 것은 매우 흔한 ‘탈식민적’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제 찬반이 첨예한 사안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사회적 합의’라는 말에서 합의를 위한 논의가 막힌 사회가 어디인지를 이준석 대표의 말에서 판단할 수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은 사회적 합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위한 논의 과정에 있는 어떤 사회에서 막혀 있는 상태다. 사회적 합의란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만이 아니라 ‘합의’라는 결과를 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권의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과정을 오로지 ‘결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과정에서 자기 위치가 어디고 그 위치에서 해야 하는 ‘임무’를 은폐한다는 점인데 놀랍게도 이준석 대표는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사회적 합의를 결과로만 받아들이면 이 말의 사회는 정치에 면죄부를 제공한다. 결과로서 사회적 합의는 사회의 의미를 입법에 도달하기 전에 정치권 바깥에서 오로지 피 튀기며 치고 박고 싸우는 ‘시민사회’의 문제로 만든다. 그렇다면 입법과 정치권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인가? 시민사회 구성원의 피 튀기는 싸움의 결과에 법이라는 대관식을 치르는 게 그들 역할이다. 논의 과정에 있는 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사회 위에 분리돼 존재한다. 이는 정치도 통치도 아니고 오로지 영광을 받는 것으로 존재하는 ‘군림’이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를 과정으로 생각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논의가 부족한 사회는 한국 사회 전체가 아니라 입법이라는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법의 언어로 만들어내는 정치권이다. 정치권에서도 법의 언어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적 언어를 분명하게 말해야 하는 정치정당이다. 자신의 개인적 소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자신의 정당이 취한다면(혹은 ‘입장 없음’을 정치적 입장으로 전략적으로 채택한다면) 그 안에서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입을 떼고 말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안에 개인적 소신을 가진 바로 그 자신이다.
이준석 대표는 그 사안에 대해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혼재된 것”을 분리하고 분류하고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다.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자라는 말이다. 말할 수 있음에도 말해봤자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말조차 하지 않는 것, 그거야말로 ‘평범한 악’을 방조하는 것이라고 한나 아렌트라는 철학자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독일인 목사를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비판했다.
이준석 대표가 멈춘 부분이 여기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 논의가 부족한 사회인 자신의 정당에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말하는 것이다. 그가 말해야 하는 사회는 ‘바깥’ 사회가 아니라 자신의 사회인 국민의힘이라는 정치정당이다. 그는 “개인의 특성에 대해서는 절대 차별할 수 없다”, 즉 존재는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계몽된 자기 소신을 가지고 국민의힘 내에서 구분해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과 논의를 시작하며 그들을 ‘계몽’해야 한다. 교육에 몸담았으니 이준석 대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계몽해야 하는 것을 계몽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임무 방기인지를 말이다.
사실 여당이라고 다르지 않다. 비록 민주당이 이번에 평등법을 대표 발의했지만 실제로 얼마나 추진할지는 매우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이준석 대표가 차별금지법을 시기상조라 말했다고 민주당은 파상공격을 가하지만 상대 정당을 공격하는 재미만 챙기고 결정적 순간에 “사회적 합의” 운운하거나 국민의힘의 비협조를 탓한다면 민주당이야말로 구제 불능 최악의 정당이 될 것이다.
민주당이 상징성 공격에만 활용한다면나아가 민주당이 직시해야 하는 것이 있다. 만일 민주당이 이번에도 이준석 대표의 상징성을 공격하는 무기로만 차별금지법을 활용하고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면 “이준석 대표는 솔직하기라도 하지 민주당은 끝까지 비열하고 비겁”하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민주당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이준석 대표에게는 ‘솔직함’이라는 아이템을 하나 더 얻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이미 청년정치라는 담론으로 권위적이지 않고 솔직하다는 인상을 대중에게 주며 호감을 얻고 있다.
따라서 지금 민주당이 해야 할 일은 이준석 대표를 공격하는 것보다 차별금지법 논의 일정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이번엔 사회적 진도를 나가자.
엄기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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