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저 바닥에 누워’로 부르던 선생님이 있었다. 하도 열띠게 수업하는 통에 칠판 맨 아래 써놓은 대목을 설명할 즈음이면 허리가 거의 90도로 꺾이는 모습이라 붙은 별명이다. 여고생의 감성을 자극할 요소는커녕 유난히 ‘모든 면에서 빠지는 느낌’의 선생님이었는데 그런 그를 또 유난히 좋아하는 몇몇이 있었다. 왜냐고 물으니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서”란다. 불쌍해서 좋아한다고? 어리둥절해하자 이런 말이 따랐다. “독점할 수 있잖아.”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완’전히 ‘판’을 바꾸겠다고 ‘열일하는’ 최문순 강원도지사에게 무척 송구하나, 그때 그 소녀 중 한 명이 요새 그에게 꽂혀 있다. 이유는 이거다. “거슬리는 게 하나도 없잖아.”
그는 다른 주자들과 달리 그리 ‘잘난 느낌’이 아니다. 지지율도 낮다 못해 아예 흔적이 없다. 본인조차 경선 통과를 자신하지 않는다. 심지어 자칫 “일자리까지 잃으면 안 되니까” 지사직을 유지하면서 휴가 내고 시간 쪼개 뛰겠다고 한다. 그래도 패기만은 짱짱한 덕에 특유의 “네네” “그렇습니다” “올립죠” 말투와 어우러져 묘한 즐거움과 안정감을 준다. 꼭 이기겠다는 욕심은 없지만 꼭 재미있게 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독특한 ‘헐렁미’까지 더해져 그를 인터뷰하는 진행자들도 종종 웃는다.
그는 3선 도지사 이전에는 비례 국회의원이었다. 당 지도부 눈치를 보지 않았다. 법안 갈등이 있을 때는 의석을 던지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그 전에는 방송사 사장이었고 더 전에는 노조 위원장이었다. 사회문제를 생생히 고발하는 현장취재 보도물 <카메라 출동>을 만든 이이기도 하다(맞다. 그 불쌍해 보이던 기자). 응당 내세울 만한 경력임에도 나는 그가 강원도 행정 책임자가 된 이래 과거 이력을 들먹이는 걸 거의 듣지 못했다. 이번 대선에 뛰어들면서도 그 흔한 지역 대망론 한 번 언급한 적이 없다. 편안하다 못해 허술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야무지게 자기 언어를 벼려왔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정치인으로서 훈련이 잘된 사람이다.
지난해 그가 완판한 강원도 감자(사진)와 아스파라거스 온라인 판매는 민생 정치의 좋은 사례이다. 행정의 효능감을 피부로 느끼게 해줬다. 최문순이 다 옳은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거슬리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한다. 말과 행동에 구체적인 ‘현장 경험’과 ‘근거’를 갖췄다.
그는 극심한 격차 사회의 해법으로 1차 분배인 노동과 임금을 통한 개입을 강력히 주장한다. 강원도에서 첫 삽을 뜬 ‘취직 사회책임제’(기업이 정규직원을 새로 뽑으면 도에서 1인당 월 100만원씩 월급에 더해줌)를 전국적으로 넓힐 것을 제안한다. 우후죽순 격인 저출생 대책도 잘 간추려 모아 양육기본금으로 묶어주자고 한다. 강원도는 만 네 살까지 월 40만원씩 별도로 ‘꽂아’주는데, 전국에서 출생률 저하 속도가 가장 더디다고 자평한다.
불공정·불평등·빈부격차 해소가 시대정신이라는 최문순이 꼭 추진해야 할 정책이 있다. 우리 사회의 모순이 누적되고 응축된 현장이 학교이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교육’은 없고 ‘학습’만 있다고 안타까워했으나 팬데믹을 거치며 더 지독한 민낯이 드러났다. 이젠 ‘학습’조차 없다. 그저 ‘평가’만 있다. 청년 세대를 옥죄는 능력주의도, 청년도 안 된 아이들이 살인적인 과잉학습에 시달리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교육 문제 정점에는 대학 입시가 있다. 일찍이 이 지면에서 “입시, ‘뽑기’ 외에는 방법이 없다”(제1254호)며 “대학은 ‘뺑뺑이’로 가자”(제1279호)고 외쳐온 나는 대선을 앞두고 다시 한번 호소한다. 기본 자격을 갖췄다면 누구나 추첨으로 대학에 갈 수 있게 하자. 당장 국공립대부터 모든 대학은 공짜로 다니게 하자. 무상 등록금은 각종 청년 지원책과 기본 시리즈에서 논하는 재원보다 훨씬 적게 든다. 우리 사회의 판을 완전히 바꿀 이 정책, 완판남이 꼭 흥행시켜주시라.
김소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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