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우보이 벨트는 멀쩡한 사람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제발 카우보이에게 양보하라. 번쩍이는 금목걸이와 장교 반지 또한 아저씨의 상징.”('긱' 10월호) 아저씨의 상징을 버릴 줄 아는 남자라면 레벨1. “깊게 팬 주름과 희끗한 머리가 ‘연륜의 미’를 상징함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번데기와 호두의 느낌이 판이한 것처럼 섹시하고 멋진 주름을 위해선 관리가 필요합니다. 남자는 피부가 두꺼워 주름이 굵고 깊게 패고, 한번 주름이 생기기 시작하면 없애기가 어렵기 때문이죠.”('레옹 코리아' 9월호) 주름에도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세심하고 섹시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남자라면 레벨2. “회색 슈트에 회색 코트는 언제나 안전하다. 단, 지루해 보이건, 초감각적으로 보이건 당신에게 달렸다.”('GQ' 10월호) 회색의 농담을 재치 있게 조절할 줄 아는 남자라면 레벨3 정도 될까.
번데기 주름과 호두 주름의 차이는
화장품을 품평하고 눈썹 모양의 유행을 논하는 기사를 여성을 대상으로 한 패션지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란 오해를 아직까지 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GQ' '에스콰이어' '아레나 옴므' '루엘' 등으로 형성된 남성 패션지 판에 올 들어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레옹 코리아' '젠틀맨 코리아' 'GEEK' 등 올해 창간한 남성 패션지다.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떠오른 30대 남성을 주 독자층으로 한다. 옷 잘 입는 법과 같은 패션 관련 내용뿐만 아니라 스포츠, 연애, 정치, 최신 전자기기 등 남성들이 읽고 싶어 하는 내용을 다루며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한다.
사실 패션지가 남성에게도 지침서 구실을 한 것은 이미 오래다. 1973년 발행된 '월간 복장계'는 남성복을 전문적으로 다룬 잡지였다. 그 앞으로는 국내 최초의 패션 종합지인 '의상'(1968~82년)이, 뒤로는 '월간 멋'(1984~93년)이 있었다. 이 시절의 패션지가 업계 종사자들을 위한 전문지에 가까웠다면 시간을 건너뛰어 1990년대 들어 발간된 잡지는 한층 대중화했다. 1995년 '에스콰이어'의 창간으로 해외 라이선스를 따온 남성 패션지가 창간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발간된 남성 패션지는 문화, 스포츠, 정치 논평 등 피처 기사에 힘을 실어 한국 남성 독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자리를 잡아왔다. 2012년 한층 판을 키운 남성 패션지 시장은 독자층을 세분화하며 세대별·취향별 특화된 정보를 제공한다.
일본 남성지 시장 1위 매체인 '레옹'은 지난 3월 한국판을 내고 ‘친절하고 유머러스한’ 30대 남성을 타깃으로 하며, 9월 창간한 'GEEK'은 국내 라이선스지로 20대를 주 독자층으로, 이탈리아에서 온 '젠틀맨 코리아'는 고급 취향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며 9월에 첫 호를 냈다.
올 들어 갑작스런 판의 확장에 대해 장우철 'GQ' 피처 에디터는 광고시장에서 남성 소비층의 가능성을 본 게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패션업계에서 남성들은 몇 년 새 꾸준히 구매력을 보이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은 남성 고객 매출 비중이 2009년 25%, 2010년 28%, 2011년 30%대로 증가세를 보이는 것에 주목해 지난해 9월 서울 강남점에 남성전문관을 열었다. 롯데백화점 또한 남성 전문 액세서리 편집매장 ‘다비드 컬렉션’을 비롯해 지난 9월에는 서울 소공동 본점에 국내 최대 규모 남성전문관을 열었다. 현대백화점은 서울 압구정동 본점에 남성 전용 구두 매장 메이페어와 잡화 편집매장인 로열마일 등을 개점했다.
베이비로션에서 아이크림으로
그렇다면 시장은 남성들의 어떤 변화를 읽고 반응한 것일까. 최근 창간한 남성 패션지에서 일하는 이아무개 에디터는 “남성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이 생겼다”고 분석한다. 남성 패션지의 주요 독자층은 1980~90년대 대중문화를 향유하며 성장한 세대와 대체로 일치한다. 1990년대 패션지를 읽으며 20대를 보낸 30대 중·후반이 취향의 바탕을 깔아놓았다면 20대 중·후반~30대 초반 세대는 본격적으로 패션을 말하기 시작한 세대다. 어릴 적 바르던 베이비로션을 초지일관 고수해오던 남성들로부터 애프터셰이브와 스킨, 로션, 아이크림을 구분하는 이들이 분화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화장하거나 눈썹을 다듬는 데 거부감이 없는 단계로 넘어왔다. 이 에디터는 외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남성이 많아진 것에 대해 “‘그루밍’을 다루는 기사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는 게 이를 방증한다”고 말한다. 수염을 어떻게 깎을 것인가, 남성 화장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두상과 얼굴형에 따라 머리카락을 어떻게 다듬을 것인가와 같은 내용의 기사를 읽으며 독자들은 자신의 취향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한단다.
남성 패션지는 비단 패션의 영역에서만 지침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기계·문화·정치평론까지 망라한 남성 패션지는 문화정보지로도 기능한다. 시사잡지의 주요 독자층이던 남성은 ‘읽을거리’에 대한 욕구가 강하다. 남성 패션지 독자들은 일상적으로 패션을 논하면서도 여전히 화보로만 채운 패션지에는 아직 익숙지 않다. 시사잡지를 정기구독하고 간헐적으로 패션지를 본다는 대학원생 박영봉(34)씨는 패션지를 통해 백과사전식 정보를 얻는다. 그는 “옷을 입거나 물건을 살 때 패션지의 화보를 보고 힌트를 얻을 때도 있지만 패션에만 집중된 잡지라면 아직 다 소화하지 못할 것 같다”며 “신문에서 자주 접하지 못하는 이들의 호흡 긴 인터뷰, 공구나 새로 나온 전자제품을 멋있는 비주얼로 다루는 게 좋아서 패션지를 사보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통해 주요 뉴스를 읽는다는 대학생 김준수(22)씨는 “포털 사이트에 뜨는 뉴스만 골라 읽다 보면 조각난 느낌을 받는 편이다. 남성을 위한 연성 콘텐츠를 접할 경로가 많지 않은데 남성 패션지에서 다루는 정치·문화와 관련한 재치 있는 기획 기사들이 좋다”고 말했다.
사실 국내 남성 패션지가 패션 이외의 것을 다루는 데 좀더 많은 비중을 할애하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여성 패션 시장에 비해 변화의 폭과 속도에서 차이가 나는 남성 패션 시장의 특성 때문이다. “여성 패션은 계속 변하고, 새로 나오는 정보만 전해도 페이지를 모두 채울 만큼 업계에서 생산되는 내용이 양적으로 많은데, 남성 패션의 경우 유행이 잘 바뀌지도 않고 남성 독자는 여성에 비해 유행에 덜 민감한 편이다. 그러니 ‘어떤 브랜드의 무슨 제품이 나왔습니다’라는 정보만으로는 부족하다. 살을 붙이고 깊이를 더해 내용을 만들다 보니 피처 기사가 강해진 면이 있다.” 'GEEK'의 심정희 편집장의 말이다.
해외 본사는 “왜 여자는 없고 텍스트가 많냐”
실제로 'GEEK'은 10월호에서 패션 관련 소식보다는 ‘여행’을 주제로 한 기사를 전면에 내세우고 패션 화보를 녹여냈으며 '젠틀맨 코리아'는 표지 모델 브래드 피트 기사, 남자들의 서재와 관련한 기사를 슈트 스타일링 기사보다 앞에 세웠다. 미국 'GQ' 본사로부터 ‘왜 이렇게 여자가 없나, 글은 왜 이렇게 많나’라는 평가를 들어왔다는 'GQ'는 올가을부터 아예 'GQ Styling'을 내고 ‘과감하고 향락적인 패션의 정수’를 즐길 곳을 따로 마련해놓고 본지에는 여전히 화보만큼이나 텍스트를 촘촘하게 채워넣었다. 이처럼 국내 남성 패션지는 피처 기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하나의 특색으로 자리잡을 모양이다. 민희식 '에스콰이어' 편집장은 '매거진 컬처'에 실린 인터뷰에서 앞으로 잡지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시각적 자극이 아니라 텍스트로써 인문학적 소양을 겸비한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남성 독자들은 해외 유명 브랜드가 난무하는 패션 기사는 너무 어렵고, 화보로 실리는 여행지는 일상과 동떨어져 있고, 잡지가 제시하는 ‘애티튜트’는 때로 버겁다고 한다. 진짜와 허세, 세련과 젠체 사이에서 길을 헤맨단다. “패션지가 제시하는 옷이며 제품들 중 아름다운 것이 많다. 그러나 솔직히 대학생 신분에서 사기 힘든 것이 대부분이다. 잡지를 보며 유행을 읽고 비슷한 제품을 인터넷 쇼핑몰 등에서 산다. 가격 대 성능비가 좋은 ‘저렴이’들을 기획해 실어주는 경우도 있지만, 보다 보면 다른 세상 얘기를 보는 것 같아 헷갈리기도 한다.” 김준수씨의 말이다.
잡지를 만드는 사람에게도 비슷한 고민은 이어진 듯하다. 심정희 편집장은 “기본적으로 패션은 하이 소사이어티, 럭셔리를 지향하게 되는데, 그동안 패션지 에디터를 해오며 이것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며 “내가 맨날 요트를 타고 몇백만원짜리 와인을 즐기는 게 아닌데 이런 것을 마치 잘 안다는 식으로 기사를 써야 하는 처지다 보니 피로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국내 라이선스지인 'GEEK'은 20대와 호흡하고 한국 시장에서 한국의 독자들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기획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즐겁다. 다만 해외 본지가 있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사들, 예컨대 9·11을 돌아본다거나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관련한 기획 기사를 쓴다고 할 때는 아쉬움이 있다”고 심 편집장은 덧붙였다.
해외 라이선스지는 한국판으로 어떻게 지역화할 것인가란 고민에 봉착해 있다. 기존 매체를 비롯해 올해 새로 창간한 남성 패션지 중에 유독 해외 라이선스지가 많은 이유는 광고를 얻는 데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란다. 업계 관계자는 “해외 라이선스지는 대부분 수십 년 역사를 가진 유명 매체를 기반으로 한다”며 “해외 브랜드 광고는 본사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잘 알려진 잡지일 경우 유명 브랜드의 광고를 싣기가 더 쉬운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런 반면에 “라이선스지는 본지의 입김이 강하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전했다.
라이선스 잡지의 지역화 고민
많은 이들이 종이잡지에 회의론을 제기하는 와중에 몸집을 키워가는 남성 패션지 시장의 움직임은 흥미롭다. 한국에서 남성 패션지가 본격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한 지 20년이다. 20년 만에 다시 한번 판을 확장한 남성 패션지들은 각자의 개성을 내세우는 가운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 듯하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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