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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수류탄이 빚은 ‘아비규환’… 구해낸 아기와 구한 청년의 만남

1968년 10월 꽝남성 주이선사 마을 학살의 고통… 한베평화재단 위령비 재건립 도왔지만 “한국 정부, 학살 피해 구제 필요”
등록 2025-05-29 16:50 수정 2025-06-05 12:52
판짜(왼쪽)가 2025년 4월28일 베트남 꽝남성 주이선사 자신의 집을 찾아온 응우옌티자인을 만나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에 입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이야기하고 있다.

판짜(왼쪽)가 2025년 4월28일 베트남 꽝남성 주이선사 자신의 집을 찾아온 응우옌티자인을 만나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에 입은 상처를 어루만지며 이야기하고 있다.


스물일곱이던 베트남 청년 판짜는 수류탄 파편에 왼쪽 다리 살이 떨어져 나가 뼈가 드러나 보이는 피투성이 아기를 안고 달렸다. 한 살배기 아기가 잘못될까 걱정하는 동시에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로 12㎞나 되는 거리를 쉴 새 없이 달려 병원에 이르렀다.

이렇게 살아난 아기 응우옌티자인(57)이 2025년 4월28일 판짜(84)의 집을 찾아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만났다. 난청으로 귀가 잘 안 들리는 판짜는 깊게 파인 상처가 선명한 응우옌티자인의 다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아버지야”라고 되뇌었다.

1968년 10월 폭우로 주둔지가 침수된 청룡부대 2대대 5중대의 한 소대가 꽝남성 주이쑤옌현 주이선사 짜쩌우촌의 한 절로 대피했다. 한데 10월20일 밤 북베트남군이 이 절을 습격해 한국군이 피해를 입었고 밤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0월22일 새벽 베트콩을 수색하려고 마을로 진입한 한국군은 판짜의 집 방공호에 피해 있는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응우옌티자인이 2024년 새로 세워진 주이선 학살 위령비를 찾아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리고 있다.

응우옌티자인이 2024년 새로 세워진 주이선 학살 위령비를 찾아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기리고 있다.


이 자리에 있던 판짜의 부모와 동생 그리고 여섯 살 난 아들, 장인, 장모, 처제가 숨졌다. 응우옌티자인의 할아버지도 숨지고 어머니는 팔을 크게 다쳤다.

마을 보건소에 입원한 아내를 간호하며 밤을 보낸 판짜는 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 황급히 돌아와 참혹한 광경에 경악한다. 집과 방공호는 무너졌고, 피범벅이 된 가족들이 쓰러진 채 숨져 있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귀를 찔렀다. 바로 옆집에서 1967년 태어난 응우옌티자인이었다. 판짜는 자신의 아이와 부모의 주검 앞에서 애통해할 겨를도 없이 아기를 살려야 했다. 응우옌티자인은 목 뒤와 팔, 종아리 등에 중상을 입어 병원에서 3개월간 치료받았다. 이날의 학살로 방공호로 피했던 주민 60여 명 중 24명이 죽고 16명이 다쳤다.

무심한 세월이 고통 속에 흐르면서 판짜는 이날의 처참한 죽음을 기억으로 남길 계획을 세웠다. 뜻을 같이하는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조금씩 돈을 걷었다. 그리고 2000년 12월 한 달 동안 직접 위령비를 만들어 마을 들머리 도로변에 세웠다. 이곳에서 해마다 음력 12월25일이 되면 유가족들이 모여 합동제사를 지낸다.

응우옌티자인(오른쪽)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판짜 할아버지와 손을 맞잡은 채 이야기하고 있다.

응우옌티자인(오른쪽)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판짜 할아버지와 손을 맞잡은 채 이야기하고 있다.


한데 마을을 찾는 사람들, 특히 한국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도로변에 세운 이 위령비가 저지대에 있어 해마다 물에 잠겼다. 보다 못한 주이선사 주민들은 위령비를 다시 세우려고 2022년 한베평화재단에 기금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베평화재단은 2022년 하반기부터 2023년 3월까지 모금을 벌여 1380만원을 모았다. 23개 단체와 개인 1892명이 참여했다. 주이선사 인민위원회와 마을 주민들도 한국돈 490만원에 해당하는 건립 기금을 마련했다. 새 위령비는 2024년 3월 준공됐다. 번듯하게 세워진 새 위령비 뒷면에는 “비록 전쟁은 과거로 흘러갔지만, 망자에 대한 그리움은 영원토록 슬픔에 잠길 것이다”란 글귀가 새겨졌다.

새 위령비를 찾은 응우옌티자인은 할아버지와 함께 그날 세상을 등진 희생자들을 기렸다. 그리고 큰 상처를 입고 살다가 석 달 전에 유명을 달리한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판짜는 “학살 피해자와 생존자들이 이제 나이가 많아 건강이 안 좋고 경제적으로 어렵다”며 위령비 재건립에 한국인들이 도움을 준 것처럼 “피해자들을 돕는 데 한국 정부가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 전투부대(청룡·맹호·백마부대)가 주둔한 베트남 5개 성(꽝남성·꽝응아이성·빈딘성·카인호아성·푸옌성)에서 130여 건의 학살로 민간인 1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한다. 베트남 정부, 공공기관, 인민위원회, 군 작성 자료 등을 2021년 종합한 결과다.

 

꽝남성(베트남)=사진·글 이정우 사진가

*낯섦과 익숙함, 경험과 미지, 예측과 기억, 이 사이를 넘나들며 감각과 인식을 일깨우는 시각적 자극이 카메라를 들어 올립니다. 뉴스를 다루는 사진기자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변신한 이정우 사진가가 펼쳐놓는 프레임 안과 밖 이야기.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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