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은 다시 짐을 꾸렸다. 세 차례나 시외버스를 갈아탄 끝에 어느 한갓진 시골길가에 내렸다. 새벽에 서리가 내렸을 들판이 휑하니 누워 있을 뿐, 혼자였다. 순간 좀 당황스러웠지만, 버스는 저만큼 사라진 뒤였다. 청년은 자신이 추수 끝난 빈 들판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칠월의 땡볕 아래 더운 땅김을 뿜어올리던 논밭을 도저히 연상할 수 없었다. 며칠 사이에 백년을 다 살아버린 느낌. 청년은 울컥 솟아오르는 허탈감과 분노를 견디기 어려웠다. 죽는다면, 이대로 죽는다면… 그녀가 울어줄 것인가. 내가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할 것인가.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죽음은 또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작가가 되었다
산사에 짐을 풀었지만, 청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외교관이 되어 보란 듯 복수를 하겠다던 꿈 같은 것, 이미 계곡 물소리에 흘려보낸 지 오래였다. 함께 기숙하는 수험생들이 헌법 책을 들여다볼 동안에 청년은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늦가을 햇살이 따가웠다. 저 아래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땡초 주지의 오토바이가 보였다. 그는 대처로 나가 여자와 아이들을 보고 돌아올 것이었다. 돌아오는 오토바이 짐 바랑에는 이 꽂혀 있을 터였다. 산다는 게 이리도 탐욕스러운 것인가. 시간의 숨이 얼마나 긴지 상상할 여유조차 없는 청년은 그 순간, 미칠 듯 따가운 햇살 아래서 자신의 미래를 외곬으로만 정리해내고 있었다.

그때, 감나무 곁으로 바람이 살짝 불었을 것이다.
청년의 발 앞에 누렇게 색 바랜 신문지 한장이 굴러왔다. 청년은 무연히 그 신문지를 주워 들었다. 읽는 둥 마는 둥하던 어느 순간, 숨이 콱 멎었다. ‘사평역에서’라는 신춘문예 당선 시였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청년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했다. 목덜미를 익힐 듯 따갑게 내리쬐던 땡볕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눈앞에 무엇인가 전혀 새로운 물상이 보이는 듯싶었다.
청년은 얼른 방안으로 들어갔다. 일기장을 꺼내 정신없이 쓰기 시작했다. 가슴속을 콱 메우고 있던 커다란 덩어리가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울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슬픔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아니면 그 이듬해 청년은 작가가 되었다.
생의 어느 갈피에 꽂힌 시 한편
시 한편이 생을 바꿨다고 말한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 생의 어느 갈피엔가에는 시 한편이 숨어 있을 것이다.
담 너머의 미래를 전혀 설계할 수 없었던 한 정치범은 대신 제 발 밑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 전혀 다른 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이미 갇힌 영혼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는 그가 느낀 그 기막힌 찰나의 감동을 라는 책을 통해 함께 느낄 수 있다.
지난해 나온 라는 청소년 문예지에는 작가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학교 숲에서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며 엘리엇의 ‘푸루프록의 연가’를 외던 강은교, 보리밭길에서 우연히 주운 짝사랑 누나의 수첩에서 본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를 훔쳐 읽은 시인 박상률. 물론 책만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책이 없다면, 시가 없다면, 구량리역 작약꽃밭 앞에서 통학하는 누나들을 골려먹던 악동이 훗날 시인(이원규)이 된 사연을 어찌 들어볼 수 있으랴.
시집을 들여다본 지 오래되었다. 사본 지는 더더욱 까마득하다. 오늘, 시내에 나가면 모처럼 서점에 들러볼까나. 문득, 그때 나를 산사로 내몬 옛 애인이 그립다.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김남일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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