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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쿤은 불법체류자?

등록 2009-05-28 17:27 수정 2020-05-03 04:25
<세바퀴>. 사진 문화방송 제공

<세바퀴>. 사진 문화방송 제공

사람이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일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내 부모가 부끄러워지는 경험일 것이다. 집에 데려온 친구를 향해 “그래, 아버진 뭐 하시고?”라고 묻는다든가, 친구가 찻잔이라도 깼을 때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라며 무안을 준다든가. 꼭 우리 부모님이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누구나 그렇게 부모님을 숨기고 싶거나 아예 그 자리에서 도망쳐버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게 마련이다.

문화방송 를 좋아했던 것은 우리 엄마나 막내이모 같은 ‘아줌마’ 들이 모여 풀어놓는 질펀한 수다가 재미있어서였다. 동네 반상회처럼 왁자지껄한 이 프로그램에서 김구라나 조형기 같은 아저씨들은 도통 힘을 쓰지 못하고, 동방신기나 슈퍼주니어 같은 꽃미남 청년들은 마시던 물병을 탐내고 다리를 쓰다듬는 아줌마들의 손길에 꼼짝없이 희롱당한다. 그래서 솔직히 정치적으로 항상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에는 그 ‘주책’마저 슬쩍 웃어넘기게 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우린 가족인데, 그 정도쯤이야.

그 에 얼마 전 아이돌 그룹 2PM의 타이 출신 멤버인 닉쿤이 출연했다. 어머니가 중국인이고 아버지가 타이인인 그가 ‘니치쿤 벅 후르베치쿨’이라는 본명을 이야기하자마자 스튜디오는 웃음바다가 되었고, 개그우먼 김지선은 엉터리 타이어로 닉쿤에게 말을 걸었다. 게다가 닉쿤이 “친구 어머니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 고정 패널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을 때 개그맨 김태현은 역시 패널인 동료 김현철이 자신의 자리를 불안해하며 “쟤 불법체류인지 알아봐”라고 말했음을 폭로했다. 당황한 김현철이 “한국 사람 아닌데 한국말을 너무 잘하니까”라며 수습하자 MC 이휘재와 김태현은 그에게 한국 사람인데 한국말을 못하니 불법체류자 아니냐며 화살을 돌렸고, “확인 결과 두 분 다 불법체류 아니랍니다”라는 친절한 자막과 함께 ‘불법체류 개그’는 간신히 종료되었다.

물론 웃자고 한 얘기였을 것이다. ‘이주노동자’ 대신 ‘불법체류자’라는 말이 당연하게 쓰이고 “흑인치곤 예쁘다”라는 말은 비판받아도 “타이인치곤 하얗다”는 말은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대한민국에서 아시아, 특히 동남아인에 대한 무례함은 대개 당당한 법이다. 그러나 몇 달 전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서 닉쿤을 향해 “자기 전에 (가족사진을 보며) 다시 마음 잡고 밧 생각하면서 내일도 열심히 벌어야지 하면서 자요”라던 김지선의 농담은 타이에 알려질까 두려울 정도였다. 입장 바꿔, 미국에 진출한 비나 보아 같은 한국 가수들이 토크쇼에 나가 “컥커쿼컥” 따위 엉터리 발음의 한국말과 마주하고 “달러 벌러 왔느냐”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을까. 다문화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없는 사회에서 관련 예산만 책정한다고, 교과서에서 가르친다고 문화 융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부끄러움이고, 그 다음에 배워야 할 것은 최소한의 예의다.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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