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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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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가 재밌는 시대

등록 2010-01-27 17:55 수정 2020-05-03 04:25

한 회 놓쳤다가 다음날 왕따 될 뻔한 드라마가 오랜만에 나왔다. 1월 첫쨋주에 시작한 한국방송 다. 대왕 세종도 선덕여왕도 심지어 장금이나 허준도 아닌, 누군가의 이름 대신 ‘도망 노비를 쫓다’라는 의미를 담은 제목부터 는 독특한 사극이다. 병자호란 직후, 소현세자 사후의 인조 시대, 조선 땅 인구의 절반이 노비였던 그때를 배경으로 이 드라마는 도망친 노비를 잡아 현상금을 받아먹는 추노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여자들은 헐벗은 추노꾼들의 조각 같은 복근에 넘어갔고 남자들은 리얼한 액션에 찬사를 보냈지만, 흡인력 있는 스토리와 감각적인 영상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집안의 몰락으로 양반가 도령에서 추노꾼이 되어 저자를 떠도는 대길(장혁), 대길의 집안 노비였으나 도망쳐 신분을 속이고 사는 언년(이다해), 소현세자의 호위무사였으나 정쟁에 희생돼 관노로 전락한 송태하(오지호)가 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대길의 라이벌인 비열한 추노꾼 천지호(성동일), 대길에게 잡혀 주인집으로 끌려간 노비 업복이(공형진), 송태하의 동료였으나 그를 배반한 황철웅(이종혁)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들은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생생한 존재감을 갖는다. 심지어 13살짜리 계집종을 칠순 노인의 침소에 들게 하면서도 ‘문자’를 쓰는 추악한 양반들조차 소홀히 그려지지 않는다.

그리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기, 부모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기 등 뻔하고 흔한 과제들만 지루하게 수행하던 많은 드라마와 달리 는 그 다양한 인간들의 각기 다른 욕망을 끊임없이 부딪치게 하며 자가발전한다. 대길은 노비들을 잡으면서 언년을 찾아헤매고, 태하는 소현세자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도망치며, 천지호는 눈엣가시인 대길을 죽이고 싶어하고, 업복이는 노비들이 해방된 세상을 꿈꾼다. 충신에게 신념이 있듯 배신자에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며, 세도가 양반 또한 장애인 딸의 혼인을 고민하는 아버지라는 사실과 장애 때문에 서신 한 통 쓰지 못해 괴로워하는 그 딸의 사연까지 넓고도 깊은 이야기와 걸쭉한 입담은 같은 대하역사소설을 보는 듯 흥미롭다.

의 곽정환 감독은 전작 의 첫 회 마지막에 “수신료의 가치를 생각합니다”라는 문구를 삽입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다. 한국방송이 ‘땡박 뉴스’에 이어 김인규 사장 띄우기를 위한 ‘땡김 뉴스’를 시작했다며 비난받고, ‘명가’ 출신이라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한국방송 수신료 인상을 주장해 빈축을 사는 요즘 한국방송에서 모처럼 이렇게 수신료가 아깝지 않은 드라마가 나왔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의 천성일 작가가 기획 의도에서 남긴 “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지’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라는 문장을 종종 곱씹어본다. 인간이 노예인 것이 당연하던, 피가 터지고 살을 지지는 고문이 횡행하던, 희망보다 절망이 일상이던 그 시대의 이야기가 시청률 30%를 넘기는 지금은, 도대체 어떤 시대일까.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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