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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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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인 그대에게

등록 2009-09-30 10:54 수정 2020-05-03 04:25
〈지붕 뚫고 하이킥〉 사진 문화방송 제공

〈지붕 뚫고 하이킥〉 사진 문화방송 제공

불확실한 일정과 불규칙한 일과를 팔자로 알고 사는 나에게 요즘 들어 모처럼 규칙적인 습관이 생겼다. 바로 출근길과 퇴근길의 하루 두 차례 통장 잔고 확인이다. 그러나 아무리 떨리는 가슴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기다려봐도 세 개의 통장에는 각각 6170원, 1250원, 2410원이라는 현금인출기 출금도 안 되는 숫자가 찍힐 뿐, 두 달 전 넘긴 원고의 원고료는 들어올 기미가 없고 월급날까지는 까마득하다. 그때마다 잠시, 소규모 금융기관에서 일하는 고모의 부탁에 무리하게 가입한 적금과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 결혼식에 내놓은 축의금을 떠올린다. 거기에 얼마 되지도 않는 기부 내역까지 되짚어보는 데 이르면, 돈 앞에 소심하고 치사해지는 나 자신에 내가 놀랄 지경이다.

그런 나에게 요즘 생긴 또 하나의 규칙적인 습관은 문화방송의 새 시트콤 을 보는 것이다. 그동안 등의 히트작을 연달아 내놓았던 김병욱 감독의 새 작품인 은 그의 전작들이 그랬듯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가족 시트콤의 틀에 기상천외한 로맨스를 더했다. 툭하면 남학생들의 젖꼭지를 꼬집어대면서도 “애들이랑 좀더 친해지려고”라며 소녀같이 미소짓는 ‘변태 교감’ 자옥(김자옥)과 자옥과의 밀회를 들키지 않으려 방독면을 쓰고 장대높이뛰기로 학교 담장을 넘는 칠순의 식품회사 사장 순재(이순재)의 열애는 초반의 웃음 포인트다.

하지만 현금 자산이 1만원도 채 안 되는 내가 이 작품에 꽂힌 것은 사실 ‘돈’ 때문이다. 재벌과 ‘서민’의 신분을 초월한 러브 스토리는 있어도 정작 돈이 없다는 게 이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쏙 빼놓는 TV 속 세상에서 꾸준히 돈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함께 다뤄온 김병욱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여러 종류의 폭력에 노출된다. 그게 비극이 될 수도 있고, 희극이 되기도 한다”는 그의 지론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래서 에서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산골에 숨어 살다 쫓기듯 서울로 올라와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던 세경(신세경)이 자동식 세차 기계에 빨려 들어갔다 나오자마자 하는 말은 “사장님, 저 자르지 마세요”고, 세경이 식모살이를 하러 들어간 순재의 집에서 주인집 손녀 해리(진지희)는 세경의 동생 신애가 제 인형을 만졌다는 이유로 ‘도둑놈’이라며 따귀를 올려붙인다. 세경이 잘리지 않으려고 밤새워 청소기와 믹서의 매뉴얼을 공부하고, 정음(황정음)이 고등학생인 준혁(윤시윤)에게 반말을 들어가며 과외에 매달리는 광경은 코믹하지만 그들 각자에게는 절박한 문제다. 결국 돈을 쥔 자가 돈 없는 자의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의 서늘함을 그 어떤 서적이나 강연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을 보며, 여전히 늘지 않은 잔고를 확인하고 돌아온 나는 어땠나 잠시 생각한다. 오늘 하루 텔레마케터에게, 마트 종업원에게, 아이돌 가수에게, 모든 ‘을’에게 내가 한 일은 폭력이 아니었을까. 답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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