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내 꿈은 H.O.T 숙소 화장실의 슬리퍼였다. 여고생 십중팔구는 H.O.T 아니면 젝스키스의 팬으로 정확하게 갈리던, 나 같은 잡지를 사서 자기가 좋아하는 멤버의 사진을 잘라 나누다 양면에 각각 다른 멤버의 얼굴이 실려 있으면 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오빠들’이 소녀들의 영혼까지 지배하던 1세대 아이돌의 시대, 시험이 끝나면 공개방송 한번 가보는 게 큰 꿈이던 우리가 그때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환상적인 장소는 바로 그들이 함께 사는 숙소였다. TV에서 고작 몇 분짜리 무대와 늘 똑같이 해맑은 미소만 볼 수 있을 뿐이던 우리에게 오빠들 여럿이 모여 살며 가족처럼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는 숙소는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것의 집결지였다.
SBS 는 바로 그 숙소의 내부, 아이돌의 사생활을 그린 드라마다. 보육원에서 자라 수녀가 되려던 고미녀(박신혜)는 쌍둥이 오빠 고미남을 돕기 위해 잠시 남장을 하고 오빠를 대신해 최고의 인기 아이돌 그룹 A.N.JELL의 새 멤버가 된다. 방송 전 ‘남장여자’라는 소재로 화제가 되었지만 등의 작품에서 매번 한발 앞선 상상력을 보여주었던 홍정은·홍미란, ‘홍자매’ 작가는 미남이 여자임을 주위에 들키기까지의 과정을 길게 끌며 긴박감을 조성하는 대신 일찌감치 같은 그룹 멤버인 황태경(장근석)과 강신우(정용화)가 사실을 알아채게 만들어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다.
물론 비현실적이기로 하자면 는 옛날 반 친구들이 노트에 적어 돌려 읽던 ‘나는 숙소 아줌마’류의 소설 못지않다. 미남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기쁘게 받아들이는 멤버들의 태도도 그렇고, 소속사 아이돌이 여자친구를 공개해도 계약 위반이라며 호통을 치긴커녕 함께 걱정해주는 사장(정찬)도 그렇다. 모든 현실적인 문제는 지극히 단순하게 그려지고 해결은 간단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르포 대신 팬픽의 길을 선택한 이 작품은 의외로 ‘신인 때는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누군가 총대 메고 예능 나가 망가져야 하는’ 현재의 아이돌 시장과 ‘새 멤버를 받아들이려면 나름의 내부적인 납득 과정이 필요한’ 팬덤의 메커니즘에 정확하게 눈높이를 맞추며 과거 혹은 현역 소녀팬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씩씩하고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은 미남이나 완벽주의자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구멍이 많은 태경의 캐릭터 역시 연기에 물이 제대로 오른 박신혜와 장근석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나고, 실제 가수이면서 아이돌 가수 역을 맡은 정용화·이홍기·유이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다. 미남 때문에 황당한 사고에 맞닥뜨리자 ‘몰래카메라’ 아니냐며 소심하게 “이경… 이경규씨~”를 찾던 태경의 모습은 작가들이 장르와 소재를 얼마나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 수 있는가를 보여준 명장면이기도 했다. 그래서 는 꿈이란 걸 알면서도 눈을 뜨고 싶지 않은 순간을 계속 이어가는 드라마다. 게다가 덕분에 화장실 슬리퍼가 되지 않고도 소원을 풀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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