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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나는 ‘빠순이’였다

등록 2009-09-02 17:32 수정 2020-05-03 04:25

‘잃어버린 10년’ 동안 무엇을 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빠순이’였다고 말하겠다. 원래 ‘술집 여자’를 가리키는 은어였던 이 단어는 1990년대 후반 남성 아이돌 그룹을 향해 “오빠 사랑해요!”를 부르짖던 소녀 팬들을 비하해 쓰는 말로 바뀌었고, 2002년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씨가 여고생들을 만나러 갔을 때 ‘오빠부대’와 착각한 나머지 ‘빠순이’라 칭하며 본의 아니게 보편화된 케이스다. 어쨌든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대학에 들어갔을 때 내 인생의 화두는 H.O.T였고, 나의 ‘빠순이’ 시절은 시작되었다.
등록금 투쟁에 참여하기도 했고, 토익 몇 점을 넘지 못하면 졸업을 시켜주지 않는다는 제도에 항의하기도 했고, 껍질이 까지도록 뜨거운 햇볕 아래 깃발을 들고 시내 한복판을 행군한 적도 있었지만 대학 시절 전체를 돌이켜봐도 나는 정치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승리의 순간으로 떠올리는 2002년 대선의 그날에도 나는 투표를 하지 못했다. 유행처럼 어학연수를 떠난 대학생 무리 속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외국에서도 나라 생각을 한 적은 별로 없었다. “대한민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는 나라”라는 광고까지 해가며 설레발치지 않더라도 대한민국은 나를 부끄럽게 하거나 열받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른 돌아가 신화 콘서트나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졸업반이 되었을 때 취업을 했다. 시트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정작 일하게 된 곳은 현대사 다큐멘터리팀이었다. 삼청교육대 피해자, 늙고 병든 북파공작원, 4·3 사건 유족들을 취재했다. 전화를 끊고 나면 죄책감과 무력감에 눈물이 흘렀다.
방송사를 그만두고 지금의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더 이상 타인의 상처와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현실’이나 ‘사회’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안도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이쪽에도 예상치 못했던 상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YTN 제작진이 징계를 받았고, EBS 담당 PD가 인사이동을 당했으며, 문화방송 〈PD수첩〉을 만들던 선배는 검찰 조사를 받았다. 물론 방송되는 드라마 대부분이 현저히 재미없어진 것까지 ‘각하’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만난 한 드라마 감독의 말은 나에게 의외의 깨달음을 주었다. 2000년 무렵 한국 드라마사에 길이 남을 걸출한 작품에 참여했던 그는 그런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2000년은 (작가와 감독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나오던 때”라고 설명했다. 한류 열풍이 불고 개인과 조직, 사회의 관계를 깊이 있게 그린 드라마들이 쏟아진 것도 그 10년 동안의 흐름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었던 결과였다.
나의 20대와 함께했던 대통령 두 명을 짧은 시간 동안 함께 떠나보내며 뒤늦은 고마움을 느낀 것은 그래서였다. 덕분에 ‘빠순이’로 살 수 있었다. 덕분에 한없이 가벼운 20대를 보낼 수 있었다. 덕분에 10년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최소 10년, 잘 버티고 잘 싸워야겠다. 그게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답인 것 같다.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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