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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롤모델로 탐나지 않나

등록 2009-09-17 10:30 수정 2020-05-03 04:25
<탐나는도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탐나는도다> 사진 문화방송 제공

라는 만화를 드라마로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순정만화를 보지 않는 내게는 생소한 원작, 게다가 제주도에서 대부분을 촬영해야 하고 주인공 중 한 명이 금발의 백인 청년이라는 설정은 들을수록 산 너머 산이었다. 유명 원작을 샀다가도, 한류 스타를 잡았다고 큰소리쳐놓고도 엎어지는 드라마가 부지기수인 이 바닥에서 과연 저 허황돼 보이는 이야기가 드라마로 나올 수 있을까? 캐스팅을 마쳤다기에 제작을 걱정했고, 촬영에 들어갔다는 말에 편성을 걱정하다 훌쩍 1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요즘 주말 저녁 8시에 맞춰 문화방송에 채널을 고정한다. 조선 인조 시대인 17세기, 탐라도(제주도)의 철없는 해녀 버진(서우)과 부녀자 희롱죄로 유배 온 ‘귀양다리’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암행어사인 박규(임주환) 도령, 동양의 도자기에 반해 일본 나가사키에 가다가 난파당해 휩쓸려온 푸른 눈의 사나이 윌리엄(황찬빈)이 주인공이다. 귀신 같은 신인 서우의 깜찍한 연기와 두 꽃미남의 매력으로 이어지는 풋풋한 로맨스는 평생 드라마 속 연애에 공감해본 적 없는 건어물녀의 가슴마저 뒤흔들 만큼 훈훈하지만 그게 이 작품의 다는 아니다.

영 계산이라곤 나오지 않았을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밀어붙여 만들어낸 제작자가 “제주도라는 변방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양의 사대부 문화와 유럽 문물이 유입되면서 벌어지는 소통의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듯 의 또 다른 주인공은 ‘탐라’라는 세계 그 자체다. 소용돌이 속의 역사가 변방의 철학을 얹고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목숨을 걸고 물질하는 해녀들이 한양으로 보낼 진상품에 허리가 휘는 사연이 구주절절하고 조선에서 탐라국을 독립시켜 왕이 되려는 제사장의 야심이 그럴듯하다. ‘도깨비’로 불리던 이방인 윌리엄이 탐라 사람들에게 커피를 끓여주며 서로를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는 장면은 감동적이기조차 하다. 사전제작 기간 덕에 충분히 공들인 컴퓨터그래픽(CG)으로 단장한 탐라의 풍경은 당장 제주로 달려가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버진이 감을 빻아 천을 염색해 윌리엄에게 갈옷을 만들어주는 과정이 자연과 더불어 빛을 발한다. 전에는 외국어처럼 들리던 제주 사투리 역시 무심결에 따라 하게 될 정도로 정감 있다.

그런 의미에서 는 ‘전통’과 ‘문화’라는 요소를 드라마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해낸 사례일 것이다. 정부 관계자든 방송사의 높은 분들이든 입만 열면 외치는 ‘한류’의 진정한 롤모델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러나 이 즐거움도 얼마 남지 않았다. 가족 드라마가 강세인 시간대라 시청률이 저조하자 방송사 쪽이 20부작 예정이던 이 작품을 16부에서 조기 종영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소탐대실’의 교훈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시대이니 놀랍지는 않지만, 그 와중에 요만큼이라도 사는 재미를 주는 드라마까지 빼앗기는 건 역시 서운하다. 웅얼거리고 싶은 손가락이 자꾸만 시청자 게시판 가까이 가려는 걸, 꾹 참는다.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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