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앨범이나 서랍 속 편지 뭉치에서는 가끔 잊혀져서 다행인 이야기들이 튀어나온다. 초등학교 때까지 어버이날에 꼬박꼬박 부모님께 효도를 맹세하는 카드를 쓰는 착한 어린이였던 나는 얼마 전 그 속에서 부모님이 보실까 두려운 문장을 하나 발견했다. “나중에 꼭 서울대 장학금 받고 가서 효도하겠습니다.” 받아쓰기 100점을 받으면 언젠가는 꼭 서울대에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나는 뭘 좀 모르는 어린이였던 모양이다.
2010학년도 대학입시 정시 합격자 발표가 한창인 새해 첫째주에 시작된 한국방송 은 바로 그런 ‘서울대 드림’에 대한 드라마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잘나가는 로펌을 뛰쳐나온 변호사 강석호(김수로)는 사립 병문고등학교의 재단 청산 업무를 맡는다. 그러나 ‘삼류 똥통’으로 이름난 병문고가 과거 자신과 갈등을 빚었던 왕봉건설에 인수돼 자립형 사립고로 변신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한 강석호는 인수를 막기 위해 병문고 재건 프로젝트를 주장한다. 프로젝트의 내용은 ‘천하대 입시 특별반’을 만들어 국립 천하대, 즉 드라마 속 서울대에 5명의 학생을 합격시키겠다는 것이다. 지루하고도 치열한 시간의 누적으로 이루어지는 수험이라는 소재가 두바이에 빌딩을 올리듯 뚝딱 전개되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일본 만화 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난 때문에 할머니와 함께 살 방 한 칸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 백현(유승호),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엄마 때문에 늘 속상한 풀잎(고아성), 과학고와 자립형 사립고 출신의 똑똑한 형들에게 주눅 든 찬두(이현우) 등 특별반 학생들을 모으는 과정에서 강석호는 가차 없는 독설로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너희 같은 놈들이 똑똑한 놈들에게 당하지 않으려면, 속지 않고 패배하지 않으려면 방법은 공부뿐이다” 혹은 “천하대 가지 않는 한 네 인생도 별 볼일 없긴 마찬가지”라며 불안을 고조시킨다. 강석호는 ‘학벌주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학벌주의’로 푼다. “이 사회 보기 좋게 엿 먹이는 길은 천하대 가는 것”이라는 ‘천하대 드림’이다.
1999년 수능 이후 대학입시 따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살아온 나지만, 그런 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나보다 열두어 살쯤 어린 수험생들에게 미안해진다. 천하대에 가지 못하면 인생은 별 볼일 없다는, 패배하는 거라는, 속고 살 거라는 비관 대신 천하대가 아니어도 인생은 괜찮다는 믿음과 서로 엿 먹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지 못한 어른의 한 사람인 것이 부끄러워서다. 2010년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에서 내놓은 ‘교육’과 ‘청소년’에 대한 드라마가 동시대의 그 무엇도 제대로 들여다본 흔적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민망함을 더한다.
하지만 “불평만 늘어놓는 찌질이가 아니라 룰을 뜯어고치는 사람이 돼라”는 강석호의 말 한마디는 가슴에 새길 만하다. 서울대도 천하대도 가지 못했지만 ‘룰’을 뜯어고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6월 교육감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최지은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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