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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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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어떻게 국가폭력에 협력해왔나


수행자에겐 폭력의 악업 설파했지만 정치권력의 폭력에는 침묵한 석가모니…
후계자들은 ‘착한 폭력’ 논리로 정교유착
등록 2010-04-02 15:59 수정 2020-05-03 04:26

평소 조용한 북유럽 불교 동네가 최근 몇 개월 전부터 시끄러워졌다. 덴마크에서 티베트계 ‘카르마 카규’(噶擧派) 불교를 보급한 것으로 유명한 북유럽 불교 베테랑 라마 올레 뉘달(Ole Nydahl)이 이번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대부분의 덴마크 불자들이 속하는 중산계층의 많은 구성원이 그렇듯, 그는 이슬람을 노골적으로 혐오해왔다.

2008년 9월20일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247km 떨어진 바부니야 지역의 군부대에서 한 승려가 정부군 병사의 손목에 축복을 상징하는 실을 매주고 있다. EPA/ STR

2008년 9월20일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247km 떨어진 바부니야 지역의 군부대에서 한 승려가 정부군 병사의 손목에 축복을 상징하는 실을 매주고 있다. EPA/ STR

이슬람과의 전쟁 부추긴 덴마크 불교 지도자

덴마크에서 이슬람은 중산계층과 확연히 구분되는 가난한 중동계 이민자의 종교라는 점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평소 그가 알라를 “무서운 신”이라고 부르고 “이슬람 신도들은 자녀를 인구학적 무기라고 생각해 많이 낳는다. 유럽을 점령하기 위한 포석이다”라고 발언하는 것도 인구에 회자됐지만, 이번에 불자들의 한 모임에서 티베트 밀교의 (時輪)라는 예언집을 인용해 “전륜성왕과 야만인들이 미래에 벌일 전쟁은 바로 불자와 이슬람 교도 사이의 전쟁”이라며 ‘대이슬람 전쟁 준비론’을 편 게 논란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불교에 대해 ‘당연히 비폭력 종교’라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많은 북유럽인들이 라마 올레 뉘달의 ‘전쟁’ 발언을 접하고 적잖이 놀랐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놀랄 것도 별로 없었다고 봐야 한다. 불교가- 다른 많은 종교가 그렇듯- 적어도 수행자나 독실한 신도에 한해서 (악업을 막고 선업을 쌓자는 취지에서) 비폭력을 권한다는 것까지는 맞다. 하지만 비폭력을 사회화하는 데 불교가 여태까지 실패했다는 것도, 이 실패의 원인 중 하나가 석가모니 붓다 자신의 보수적 접근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전쟁과 정치를 전담한 크샤트리아 계급에 태생적으로 속했던 석가모니 붓다는 세속과 인연을 끊은 뒤 전쟁과 폭력을 멀리했다. 이유야 무엇이든 간에 다른 생명체에 대한 폭력이 폭력 행위자 본인에게 잔혹성을 훈습시켜 하나의 악업으로 그 의식 속에 계속 남아 해탈을 얻지 못하게 할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살생’이 근본오계 중 제일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실, 원시 불교의 계율관을 보면 단순한 ‘불살생’에만 머무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수행자에게는 전쟁하는 군주를 위해 사절의 사명을 띠거나, 칼 찬 군인에게 설법하거나, 별다른 이유 없이 군영에서 밤을 보내는 일 등이 금지돼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 불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이라는 대승불교 최고의 계율서는 제11경계(輕戒·이차적 계율)로 “군사 사절이 되지 말라”(通國入軍戒)는 계율을 제시한다. “불자로서 나쁜 마음으로 나라 사이를 통하며 명을 행하며 군진을 왔다갔다 소통하면서 장수를 일으켜 싸움을 붙임으로 많은 중생을 죽게 하지 말라.”

군사적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집에서 칼·몽둥이·활·화살 등 싸움이나 사냥의 도구를 보관하는 것 자체가 제10경계 “살생도구를 두지 말라”(畜殺生具戒)의 위반에 해당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행해지는 승려의 징집을 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금지하지 않은 이유는, 이 경전이 성립되던 시기에 승려의 입대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제자라면 폭력을 행하지 않는 것은 물론, 폭력의 희생자가 됐을 때에도 절대로 원한을 품지 말고 늘 착한 마음으로 응해야 했다. (Majihima-Nikaya)의 ‘거유경’(鋸喩經·Kakacupama-sutta)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비구들이여, 도적들이 여러분을 잡아 손잡이가 두 개 달린 톱으로 여러분의 몸을 한 토막 한 토막씩 잘라나간다 해도, 저들에게 악한 마음을 품는 이는 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을 당하더라도 자애로 일관하고 자비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야말로 탐욕과 화냄과 어리석음(貪嗔癡)을 멀리해 해탈을 얻는 길이라는 것이 초기 불교의 논리정연한 비폭력 가르침이었다.

여기까지는 거의 ‘교과서적인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가 초기 불교 경전에 기반을 두는 만큼 ‘불교는 비폭력적 종교’라는 북유럽인의 상식이 꼭 틀리지만은 않다. 문제는 석가모니 붓다와 그 제자들이 과연 어떤 차원에서 비폭력과 자애를 이야기했는가다. 그들이- 적어도 수행자 집단에 한해서- 개인적 차원의 비폭력을 권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과연 ‘국가’가 군림하던 사회에까지 비폭력을 권했는가는 훨씬 더 복잡한 문제다.

석가모니 붓다는 수행자 집단 안에서는 투표에 의한 민주주의적 운영을 당연한 상식으로 여겼지만, 바깥세상이 주로 군주들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다는 현실은 그대로 인정했다. 붓다가 수행자는 왕궁을 왕래하면 죄가 된다고 하는 등 애써서 ‘왕법’과 ‘불법’(佛法) 사이의 구획선을 그렸지만, 사회·정치적으로 비교적 보수적 입장에 선 그는 ‘왕법’에 대한 어떤 현실적 도전도 꿈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혁명가’라기보다는 군주가 처벌(danda)이 아닌 (자애로운) 법(dhamma)으로 통치 대상자들을 관리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늘 하던 ‘온건한 개혁의 조언자’였다. 2세기에 나온 (佛所行讚·Buddhacarita)이라는 붓다의 전기에 따르면, 그는 왕법이 불가피하게 잔혹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파악했음에도 끝내 ‘착한 군주’에 대한 미련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 미련을 버린다면 그의 보수적 시각으로 세상이 좋아질 만한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질 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미군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군법사인 토머스 다이어 군종 장교가 참선을 하고 있다. 그는 이라크 파병에 앞서 “불교의 기반은 평화주의지만, 전쟁은 평화의 필수적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미군 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군법사인 토머스 다이어 군종 장교가 참선을 하고 있다. 그는 이라크 파병에 앞서 “불교의 기반은 평화주의지만, 전쟁은 평화의 필수적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군주의 통치 인정한 ‘온건 개혁파’ 석가모니

착했으면 하는 군주들이 그래도 그 잔인한 기질대로 서로 전쟁을 벌인다면 과연 석가모니 붓다가 어떻게 했던가? “악행을 짓지 말라”고 힘써 권고하긴 했지만, 군주가- 예상대로- 그 권고를 무시하는 경우에는 그냥 포기하곤 했다. 예컨대 당시의 강대국이라고 할 갠지스강 하류 마가다(摩訶他)국의 국왕 아자타샤트루(阿闍世)는 한번 붓다에게 “밧지(Vajji) 공화국을 공격하면 성공할 것이냐”라고 물었다. 참고로, 아자타샤트루왕은 붓다의 가르침을 옹호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유폐해 아사하게 만든 ‘패륜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밧지 공화국은 ‘조화로운 공동체’의 모범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붓다는 당연히 밧지 공화국처럼 모든 일이 공평한 논의를 통해 결정되고 상하가 화목하게 지내는 사회를 공격해봐야 이로울 게 없다고 아자타샤트루왕을 말렸다( ‘유행경’(遊行經)). 말하자면 ‘자애로운 수행자’로서의 그 도덕적 의무를 다한 셈이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정복 군주 아자타샤트루왕의 밧지 공화국 정벌이 중단된 것도 아니었으며,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지속됐을 뿐이라는 점이다.

그러면, 이 패륜적 군주를 붓다가 그 뒤에 멀리했던가? 그것도 아니었다. 끝이 안 보이는 정복전쟁에 도덕적 명분을 잃고 피곤해질 대로 피곤해진 아자타샤트루왕은 불교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으며, 붓다는 승가의 유력한 보호자인 그를 적당히 반기기도 했다. 끝에 가서 붓다가 그에게 “당신에게 붓다를 섬기려는 착한 마음이 있기에 내세에 언젠가 붓다가 될 것”이라고 매우 낙관적인(?) 예언을 해주었다는 대승불교 경전()의 내용이 꼭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가장 자애로운 수행자와-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고통스러운 죽임을 당한 - 가장 잔인한 군주의 ‘동상이몽’은 붓다의 열반 때까지 지속됐다.

그러면 붓다를 ‘기회주의자’라고 매도해야 하는가? 꼭 그렇지도 않다. 그는 기회주의자라기보다는 개인적으로 자애로 일관할 수행자가 세속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멀리하면서 필요에 따라 싸움꾼들의 외호(外護)를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한 현실주의자였을 뿐이다.

석가모니 붓다 정도로 도덕관이 확고한 수행자는, 비록 국가 간의 싸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폭력의 악업적 결과에 대해 명확한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갈수록 국가와의 유착을 강화한 그 후계자들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국가라는 폭력기구와 가까이 지내다 보니 폭력 자체를 합리화할 필요성이 생긴 셈이다. 기독교적 ‘정의로운 전쟁’ 논리에서도 볼 수 있듯, 종교적 폭력 합리화의 전형적 전략은 “더 큰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작은 폭력을 불가피하게 쓴다”는 식의 이야기다. 예를 들어 대승의 수행법을 가르쳐주는 핵심 텍스트 중 하나인 (瑜伽師地論·Yogacarabhumi-sastra·4세기)은 ‘보살의 이타심’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예방폭력’ 논리로 통치자에 협조한 후계자들

“보살이 만약 재산을 탐해 많은 중생을 죽이려는 도적을 볼 경우, 또한 어떤 도적이 큰 덕망을 가진 이, 혼자서 깨달은 이 내지 보살을 해치려는 등 무간지옥에 떨어질 만한 악업을 지으려는 경우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차라리 이 악한 중생의 명을 끊어 나락에 떨어질지언정, 그 악한 중생으로 하여금 계속 무간지옥에 떨어질 만한 악행을 저지르게끔 방치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보살은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그 악한 중생의 생명을 끊어버린다. 그렇게 하면 보살계에 위반하지 않을뿐더러 많은 공덕까지 발생된다.”()

나쁜 중생에 대한 자비행으로서 그 중생을 ‘착하게’ 죽여주고 많은 공덕을 만들 수 있다는 논리는 이단자를 생화형하는 것이 그로 하여금 죄짓기를 중지케 하고 처벌을 감수함으로써 지옥행을 피할 기회를 얻게 하는 착한 일이라는 중세유럽 천주교의 논리와 어찌 이렇게 비슷할 수 있는가. ‘자비’라는 붓다의 구호, 그리고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의 구호를 외피적으로나마 계속 과시해야 할 불교 집단과 기독교 집단은 살생의 악행까지도 각각 ‘자비’와 ‘사랑’으로 포장해 살생을 전문으로 하는 통치자들과의 유착을 정당화한 셈이다.

이 인도 순례로 유명해진 현장(602~664)에 의해 648년 한역돼 동아시아에서 널리 유포되기 전까지만 해도, 제11경계 (“군사 사절이 되지 말라”)를 노골적으로 어겨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을 위해 걸사표(乞師表·군대를 보내달라는 요청서)를 지어준 원광대사는 자신의 행위가 “보살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자괴감이라도 내보였다. 그러나 을 자신의 저서에서 자주 인용했던 원효는 신라와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668년)에 종군했다는 데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에서 따온 ‘일살다생’(一殺多生·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많은 중생을 살린다)이라는 표현을, 태평양전쟁 시절에 조선 승려들의 일본군 입대를 강권한 권상로(1879~1965) 등 친일 승려도, 한국전쟁 시절에 중국 승려들에게 “군에 입대해 미국이라는 마왕을 항복시켜 조선을 돕자”고 외친 친공산당 승가의 지도자 거찬(巨贊·1908~84)도- 그 정치적 입장은 비록 정반대였지만- 똑같이 열심히 인용했다. 지배자들에게 참 유용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불교를 ‘평화적 종교’라고 생각하고 라마 올레 뉘달의 호전성에 놀랐던 북유럽 불자들도, 불교 논리상 ‘이단과의 전쟁’이 가능하다고 보는 라마 올레 뉘달도 각자 나름대로 불교를 정당하게 해석했다고 본다. 석가모니 붓다는 열반을 얻자는 차원에서 수행자들에게 폭력의 악업을 경계했지만 사회적 폭력의 진원지인 국가를 ‘현실’로 인정했으며, 그 후계자들이 국가의 폭력 행위를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착한 폭력’의 논리까지 개발해 국가를 위한 ‘정신적 무기’를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역사적 불교란 비록 ‘평화’로 시작됐지만 결국 국가의 폭력 체제에 편입돼버린 ‘평화주의적 종교로서의 실패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성공하자면 애당초에 국가와 계급사회에 전면적으로 도전해야 했지만, 이는 현실주의적 종교개혁가인 석가모니 붓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역시 각종 군주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그 후계자들은 이를 아예 정교 유착 패턴으로 만들었다.

‘봉은사 외압설’ 파문의 토대

정교 유착이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오늘날에 와서 ‘봉은사 외압설’ 파문에서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그 진위야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극우 정권이 불교 종단에 얼마든지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사태를 지켜보는 다수 관찰자들의 공동된 의견이다. ‘세속의 굴레를 벗어난 자유로운 수행자들의 공동체’라는 붓다의 원래 꿈은 이제 사라져버리고, 국가의 입김에 좌우되는 ‘종교 관료’들의 집합이 현실로 남아 있다. 최악의 폭력 집단인 국가에 대해 붓다가 애당초부터 조금 더 과감하게 나섰다면 이후 승가의 독립성과 자율성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참고 문헌:
1. 고암 엮음, 보성문화사, 1986
2. 〈Kinship and Community in Early India〉 Charles Drekmeier, Stanford University Press, 1962, pp.110~111
3. 〈Buddhist Ideas and Rituals in early India and Korea〉 Lee Kwangsu, Delhi: Manohar, 1998, pp.52~77
4. 〈Buddhist Warfare〉 Michael Jerryson & Mark Juergensmeyer,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pp.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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