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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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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영화, 남자와 조국을 노래하다



적을 악마화하고 ‘우리’를 미화…
전사형 남성이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치는 스토리, 여성은 늘 보조물
등록 2010-08-04 20:18 수정 2020-05-03 04:26
영화 〈실미도〉는 싸우는 남자들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성폭행당한 여성은 관객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영화 〈실미도〉는 싸우는 남자들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성폭행당한 여성은 관객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1973년에 태어난 나와 어릴 적 친구들은 어떤 전쟁도 제 눈으로 본 바 없었지만, 몇 명이 모이기만 하면 늘 놀이의 주제는 ‘전쟁’이었다. ‘파쇼군’과 ‘소련군’ 두 패로 갈라 총 모양의 장난감을 들고 서로 싸우는 척하는 것은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소련 아이들의 가장 일반적인 놀이였다. 독일 파시즘이 패망한 지 거의 40년이 지났음에도 아이들까지도 이렇게 소-독 전쟁의 집단기억으로 계속 회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름이 아니라, 이 집단기억을 부단히 재생산해내는 텔레비전과 영화였다.

가 소련 검열을 통과한 이유

1970~80년대 소련 영화계에서는 ‘전쟁영화’만큼 번창한 장르가 없었다. 물론 이 모든 전쟁물을 일률적으로 ‘전쟁 선전’으로 부르기는 어렵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세계 최고의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라고 찬양한 클리모프 감독의 (와서 보라·Idi I Smotri·1985) 정도면 차라리 ‘전쟁혐오 영화’에 더 가까울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영웅적 군인’이 아니라 백러시아(‘벨라루스’의 전 이름)를 점령한 독일군이 양민 학살을 자행하는 광경을 보면서 정신병자가 되는 한 청년이고, 초점은 ‘무용담’이 아니라 인간의 불가항력의 내재적 폭력성에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마저도 ‘적군’인 독일군은 빨치산들의 재판을 받으면서 곧 총살당할 줄 알면서도 “열등 인종인 슬라브 인종을 무자비하게 섬멸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파시즘의 광신도나 불에 타는 백러시아인들을 보면서 박수 치고 기념촬영을 하는 비인간, 아니면 빨치산에게 잡혀서 “제발 총살하지 말라”고 비는 비겁한 겁쟁이로만 묘사된다. ‘인간성’은 ‘우리 편’의 전유물이며, ‘저들의 편’이 ‘탈인간화’되는 것은 전쟁영화라는 장르의 일반적 특징이다.

‘아군의 담력’도 아닌, 생화장되기 직전의 어린아이의 얼굴 표정에 초점을 맞춘 같은 영화는 엄격함으로 악명 높던 소련의 검열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전쟁영화라는 장르의 목적 중 하나가 ‘적의 악마화’인 만큼 전쟁 혐오를 일으킬 듯한 인본주의적 기조의 영화라 해도 ‘적’에 대한 묘사만 ‘적절’하다면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일제 말기에 많은 조선인이 본 당시 일본의 ‘국책영화’만 해도 꼭 ‘무용담’ 위주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거장 마키노 마사히로(1908~93)의 (1943)이란 명작은, 일본의 적이 된 영미를 한 세기 전 영국의 중국 침략에 빗대 ‘아시아의 영원한 적대자’로 묘사한다. 전투신도 많지 않고 별로 화려하지도 않은 이 영화는, 그 대신에 무수한 중국인을 아편중독자로 만들어 폐인화하고 아편 밀매 갱들이 맹활약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낸 영국 제국주의자들의 악행을 고발한다. 거기에다 눈먼 자매를 위해 치료용 아편을 구하려다 온갖 고초를 겪는 ‘착한 소녀’ 이야기라는 멜로드라마적 요소가 가미됐으니 ‘양질의 오락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생각해보면 아편을 보급하려는 영국 침략자들에 대한 이 영화의 고발은 역사의 사실에 아주 어긋난 것도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한 클리모프 감독이 파시스트의 잔혹성을 고발한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19세기 중반의 영국 침략자나 20세기 중반의 파시스트들이 잔혹했다고 해서, 마키노 마사히로가 봉사하고 있던 일제의 중국 침략이나 클리모프 감독이 속한 소련의 당시 아프간 침략(1979~89)이 과연 본질적으로 무엇이 달랐느냐는 점이다. 감독들이야 현실적 선택의 폭이 좁았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적’을 악마화하는 그들의 뛰어난 전쟁물은 ‘우리’ 모습을 미화함으로써 ‘우리’의 전쟁 행위의 무조건적 합리화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전쟁물에서 ‘적’은 죽여도 별로 후회할 것 없는 ‘악마’나 ‘비겁자’ ‘광신도’로 나오지만, ‘우리 편’은 대개 ‘진정한 남성성’의 전범을 보인다. 사실 전쟁영화의 고유 기능 중 하나는 ‘전사형’ 남성의 미덕을 과시함으로써 군대와 군대 특유의 문화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천만 관객 돌파’라는 한국 영화사의 신기록을 세운 강우석 감독의 (2003)를 보자. ‘국민 배우’ 안성기가 연출한 교육대장 최재현 준위는 군인 그 자체다. 필요하면 부하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수류탄까지도 냉정하게 이용할 수 있는, 지옥훈련 과정에서 사망·부상 사고가 일어나도 별다른 감정을 노출시키지 않는 그는, 동시에 ‘군인으로서의 의리’를 지켜 부하인 실미도 부대원에 대한 섬멸 명령이 집행되는 꼴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부대의 반란을 유발하고 자살하는 길을 택한다. 적을 죽이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바로 앞에서 봐도 감정 동요가 없는, 그러나 ‘싸우는 남성들의 공동체’에 대한 의리가 강한 남자야말로 이 영화가 너무나 ‘쿨하게’ 보여주는 전형적 군인이다.

, 싸우는 남성들의 공동체

반대로 여성으로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탈영한 몇 명의 대원에게 성폭행을 당한 여교사나 반란을 일으킨 대원들이 버스 안에서 인질로 잡은 여고생 정도다. 힘센 남성이 소극적 존재인 여성에게 그 힘을 휘두르게 돼 있다는 것은 가부장적 사고의 전형인데, 대부분의 전쟁영화가 이 사고를 기본 설정으로 깔고 있다. 전후 전쟁영화의 고전이라고 할 (Sands of Iwo Jima·1949)에서도 병사들에게 지옥훈련을 시키면서 불만을 사기도 하는, 그러나 부하 사랑이 유별나 부하의 목숨을 건지기도 하는 병장은, 한 여급에게 돈을 주고 성을 사려다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먹이기 위해 매매춘을 하는 전쟁미망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돈을 주고 간다. 남성은 타인의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완력과 재력, 권력을 겸비하고 그럼에도 자상하기도 한 ‘행동의 주체’, 여성은 그에게 성을 바치게 돼 있거나 아이나 키우는 보조역… 대부분의 전쟁영화의 성 정치는 이와 같은 남녀 역할 구분에 기반한다.

물론 미국이라는 ‘선한 국가’를 대표한다는 조지 마셜 사령관이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라이언 일병을 구하라는 인도주의적 명령을 내리는, 성조기가 펄럭이는 미군 묘지에서의 참배 장면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1998)처럼 모든 전쟁영화가 ‘우리 국가’를 절대선으로 그리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처럼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가 수많은 이에게 ‘가해자’ 이미지로 남아 있는 곳에서 이런 묘사는 관객의 기대와도 현실적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자국의 근본적 문제점들을 잘 건드리려 하지 않는 할리우드의 일반적 전쟁영화와 달리, 훈련병에게 희망을 주었다가 결국 그들을 ‘비국민’으로 처리해 ‘폐기 조처’하려는 속 박정희의 국가는 차라리 ‘악’에 더 가깝다.

그러나 현실적 국가는 ‘괴물’이라 해도, 전쟁영화는 늘 이 현실적 모순점을 초월하는 이상적인 ‘우리나라’의 존재를 강조한다. 두 조각으로 갈라진 나라의 비극이 결국 실미도 부대 대원들의 비극을 낳았다는 것은 영화 의 기본 발상이다. ‘우리나라의 비극’이라는 이 거대 담론 속에서는, ‘비극의 산물’인 대원들이 동정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그들에게 성폭행당한 여교사는 관객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대원들은 목숨을 건 평양 출정을 통해 ‘진정한 국민’으로 거듭나려 했던, 태생적으로 ‘일등 국민’이 될 만한 남성이고, 여교사는 태생적으로 ‘이등 국민’일 수밖에 없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조국’과 ‘남성’의 환상을 깨는 진보적 전쟁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조국’과 ‘남성’의 환상을 깨는 진보적 전쟁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진보적 전쟁영화는 가능한가

마찬가지로 러시아산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영화 중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독일군뿐만 아니라 소련 지도부의 문제점까지도 들춰내려 한 도스탈 감독의 (Shtrafbat·2004)는 스탈린 체제의 잔혹성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는 부대에서 ‘조국에 생명을 바치면서 죄악을 씻은’ 과거의 형사범들을 영웅화한다. 그들이 과거에 성폭행을 했든 살인을 했든 ‘조국에 생명을 바친’ 남성이 무조건 영웅이 되는 것은 전쟁영화라는 장르의 법칙이다.

‘진정한 국민’으로 살다 죽기 위해서 마음과 몸을 단련해 인간 같지도 않은 적들에게는 무자비하게, 부하와 전우에게는 늘 엄하면서도 자상하게 대하는 ‘진짜 사나이’, 그에게 자의로든 타의로든 성과 마음을 바쳐야 하는 ‘여성’, 그리고 늘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조국’. 이 기본 틀을 넘어선 전쟁영화는 가능한가? 전쟁의 정신병리학을 해부한 코폴라 감독의 (1979)은 전쟁의 진실을 보여주면서 ‘조국’과 ‘남성’의 환상을 깨는 진보적 전쟁영화의 가능성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런 수준의 영화가 너무나 드물다는 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1. ‘From the Opium War to the Pacific War: Japanese Propaganda Films of World War II’ David Desser, Film History 7, p.32∼48, 1995
2. ‘A War Remembered: Soviet Films of the Great Patriotic War’ Denise J. Youngblood, The American Historical Review 106/3, p.839∼856, 2001
3. ‘영화 의 대중성 연구’ 민혜숙, , 37, 289∼309쪽, 2009
4. ‘영화 의 이데올로기와 리얼리티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인숙, , 8/7, 161∼173쪽,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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