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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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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지 않고 이긴다는 병법의 거짓말



‘의로운 전쟁’ 명분으로 대량학살마저 인정하는 유교적 병서들…

평화주의 이면엔 모략으로 상대국을 망가뜨리는 냉혹함이 도사려
등록 2010-10-21 18:11 수정 2020-05-03 04:26
청나라와 준갈 왕국의 전쟁은 신강이 청나라에 편입되고 준갈 종족이 멸절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무수한 저항이 일어났음에도, 신강은 지금도 중국의 내부 식민지로 남아 있다. 한겨레 자료

청나라와 준갈 왕국의 전쟁은 신강이 청나라에 편입되고 준갈 종족이 멸절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무수한 저항이 일어났음에도, 신강은 지금도 중국의 내부 식민지로 남아 있다. 한겨레 자료

동아시아 전통사상에 대한 한 가지 흔한 미화는, 특히 유가 사상을 가리켜 ‘평화 지향적’ 또는 ‘평화주의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전쟁으로 멍드는 세상을 바로잡아 백성을 안업(安業)하게 하려던 공자나 맹자는 불필요하거나 명분이 뚜렷하지 않은 전쟁을 반대했다. 그러나 공자는 ‘의로운 전쟁’(義戰)이다 싶을 때엔 의외로 전투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예를 들어 평소 “어진 이는 늘 용감하지만, 용감한 이라고 해서 꼭 어질지만은 않다”고 하며 만용을 경계하던 그는 제나라에서 진성자(陳城子)라는 관리가 군주 간공(簡公)을 시해하자 노나라 애공(哀公)에게 토벌을 청했다.( 14∼22) 조심스러운 애공이 이 일을 귀족들에게 의논케 하여 결국 토벌에 나서지 않았지만 ‘싸울 때엔 싸워야 한다’는 공자의 견해는 명백했다. 그가 늘 “전쟁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신전론(愼戰論)을 폈음에도 말이다.

공자·맹자가 전쟁에 대해 말을 아낀 이유

손으로 일하는 노력자(勞力者)와 ‘고귀한’ 정신노동에만 집중해야 할 노심자(勞心者)를 철저하게 구별했던 유가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일을 하급 병사들에게 맡기고 장수에게는 신중한 계획과 지휘·감독만을 주문하곤 했다. 일차적으로 머리를 쓰는 유장(儒將·유교적 장수)은 백병전에 뛰어들어 자기 칼에 적병의 피를 묻히는 동시대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기원전 356∼323)과 대조적이었다. 공자와 맹자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런 이상적 유장의 모습을 대체로 그릴 수 있지만, 춘추전국시대 당시 전쟁의 실질적 중요성에 비해 원시 유가 경전들은 전쟁에 대해 비교적으로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공자와 맹자 등이 평화를 헌신적으로 사랑해서 그랬다기보다는 그들이 전쟁을 자신의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에 대한 조언을 군주에게 올리는 것은 병가(兵家)의 영역이었으며,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孫子兵法)을 위시한 병서(兵書)들이 춘추전국시대에 그 얼개가 대략 잡힌 뒤 당나라 말기까지 계속 가필·윤문돼왔다. 병서를 보면 춘추전국시대의 병사(兵事) 전문가들에게 전쟁이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들이 전쟁을 어떻게 합리화했는지, 그리고 죽고 싶지 않은 병졸을 어떻게 해서 사지로 가게 만들었는지 알 수 있다.

병서라고 해서 수백 년에 걸친 가필·윤문 과정에서 유교적 도덕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은 도덕과 별다른 관계 없이 오로지 이기는 방법만을 중심으로 해서 쓰인 덕분에 오늘날 기업인들의 처세서로 크게 각광받고 있지만, 다수의 다른 병서들은 유교적 도덕주의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전쟁은 부정적이고 위험한 수단이다. 따라서 국정 목표를 이룰 때는 웬만큼 인정(仁政)을 베풀어 정치적 수단을 통해야 하는 것이고, 완전히 불가피한 때만 전쟁을 감행해야 한다는 게 병서들의 공통된 견해다.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며, 전쟁에서는 선이 악을 징벌하는 상황이 이뤄져야 전쟁이 정당화된다는 이야기도 자주 나온다.

예를 들어 기원전 4세기 제나라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후대에 성립된 (司馬法)은 처음부터 전쟁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나쁜) 사람을 죽임으로써 (좋은) 사람을 편안케 할 때야말로 그 살인은 정당화된다. 어떤 나라에 쳐들어갈 때 그 나라 백성들을 사랑하면서 (그렇게 한다면) 그 침공은 정당화된다. 전쟁을 함으로써 전쟁을 그치게 할 수 있다면 그 전쟁은 정당화된다.”( 인본(仁本)-1)

클라우제비츠(1780∼1831)와 같은 대표적 근대 군전략가에게 전쟁이란 ‘정치의 연장’이었다면, 동아시아 병서 속의 의로운 전쟁은 ‘형벌의 연장’이다. 천자나 제후는 폭정을 일삼는 폭군이나 국경을 어지럽히는 ‘오랑캐’, 그렇지 않으면 ‘폭민’(민중반란자)을 사법처리하듯이 처벌한다는 말이다. 사법처리의 일종이니 명분뿐만 아니라 방법상의 정당성도 중요하다. “전쟁의 도라는 것은 농사철에 전쟁하지 않는 것이고, 유행병이 돌 때 전쟁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적국이 국상을 입었거나 흉년을 겪을 때 적국을 공격하면 안 된다. 이는 그 나라의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겨울과 여름에 군사를 일으켜 싸우지 않는다. 이는 양쪽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본-2)

진시황제의 무덤에서 발견된 흙으로 구운 병사와 말의 모형. 춘추전국시대의 전통을 이은 진·한 시대의 군대는 철저한 연좌제를 바탕으로 운영됐다. 한겨레 자료

진시황제의 무덤에서 발견된 흙으로 구운 병사와 말의 모형. 춘추전국시대의 전통을 이은 진·한 시대의 군대는 철저한 연좌제를 바탕으로 운영됐다. 한겨레 자료

사실은 지극히 이기적인 ‘의로운 전쟁’

의로운 전쟁 이야기는 대단히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현실에서 전쟁은 병서의 주문대로 ‘이’(利)가 아닌 ‘의’(義)를 위해 일으켜지지 않았다. 도덕주의자가 무엇을 주문하든 간에 전쟁은 여전히 영토와 자원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일어나곤 했으며, 도덕주의적 의전론은 유교적 군주가 모든 전쟁에서 적국을 무조건 ‘악마’로 묘사하도록 유도했을 뿐이다. 적국이 악마가 돼야 전쟁의 명분이 충분히 얻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국이 악마가 되는 이상 병서가 제시하는 비전투원 보호 법칙도 쉽게 무시됐다.

지금 중화 민족주의자들이 중국의 ‘화평적 굴기(?起)’의 가능성을 자주 들먹이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중원의 유교적 왕권의 ‘국운 융숭’은 대개 평화를 수반하지 않았다. 반대로 유교적 왕조 정권들은 주변 정치체를 평화적으로 복속시키지 못할 때마다 잔혹한 전쟁을 벌이곤 했다. 그 전쟁에서 상대방을 늘 악마로 흑선전했다. 중화의 천자(天子)로부터 악마로 호명되는 주변 국가는 결국 참혹하게 진멸당해도 동정받을 자격이 없었다. 예를 들어 최신 대포로 무장한 청나라의 군대가 1755∼59년 몽골 계통의 준갈(准?)국을 패배시켜 그 영토를 신강(新疆)으로 재편했을 때, 청나라 자체의 사료로 봐도 준갈 종족 전체의 절반 정도는 중국 군인들의 손에 도살됐으며, 나머지는 병으로 죽거나 러시아로 도망쳤다. 보수적 추측에 따라도, 적어도 남녀노소 10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러나 청나라 때나 그 후나 이 제노사이드에 대한 이렇다 할 만한 반성은 중국 지성계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중화의 경계를 괴롭혔던’ 준갈 종족은 ‘인간이 아닌 해충’으로 이질시되고 악마로 일컬었으며, 그들에 대한 정복전쟁은 ‘의로운 토벌’로 인식돼왔기 때문이다. 의로운 전쟁에는 명분이 있다는 것은 ‘오랑캐’를 멸시하는 중국 지식인들의 합의 사항이었으니 비전투원 보호 원칙을 어긴 전시의 살육도 당연히 무죄로 여겨졌다. 유교적 명분주의는 결국 너무나 강력한 ‘제노사이드의 명분’으로 이어진 셈이다.

명분이 당당한 의로운 전쟁이라면,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에 거역하는 행위도 ‘당연히’ 허용돼야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개인적인 일로도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경우가 드물며, 더군다나 ‘남의 일’인 국가의 일로 자신의 목숨을 쉽게 내던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안간 힘을 쓰는 일반인을 어떻게 해서 ‘겁 없는 살인자’로 만들 수 있을지가 병서 저자들의 주된 고민이었다. (吳子兵法)에 나온 것을 예로 들면, 도망친 사형수를 수배해서 다시 붙잡으라고 군인 1천 명을 풀면 이들 중 겁먹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다. 잃을 게 없는 사형수가 갑자기 나타나 자기에게 해를 미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인들은 아마 사형수를 찾아도 못 본 척할 것이다. 한 명이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면 1천 명을 두려움에 떨 수 있게 한다는 것이 병가(兵家)식 사고 중 하나의 출발점이었다( 여사(勵士)-4).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일반 군인을 결사대로 만들 수 있을까? 병서는 철저한 상벌 전략을 제시한다. 싸움터에서 직접 벤 적의 머리수에 따른 진급부터 공을 세운 전사자의 부모에게 해마다 사자(使者)를 파견해 위로하고 챙겨주는 일까지, 상은 매우 치밀하고 다양하지만 그만큼 벌도 소름이 끼칠 만큼 무서웠다.

연좌제로 병사의 생명을 속박해

(尉?者)라는 유명한 병서는 전투에서 실패하고 전장에서 도망친 장교를 참수할 뿐만 아니라 그 조상까지 부관참시하고 그 가문 전체를 관노로 삼을 것을 권고한다( 중형령(重刑令)-1). 장교까지도 연좌제 대상이 된다면 과연 일반 병사는 어떻겠는가. 도망쳐서 자기 집에 숨은 탈영병을 관에 고발하지 않은 부모처자를 불고지죄로 같이 참수하고, 동료의 잘못을 관에 고하지 않은 전우까지 모조리 목을 베라는 게 의 ‘친절한’ 권고 사항이었다. 결국 병서의 이상은 적보다 오히려 아군의 장군을 더 두려워하면서 그가 나눠줄 상에 대한 기대로 자신의 생명을 잊고 사지로 뛰어드는 병사였다. 병사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 부모처자까지 볼모로 잡아 잘 싸우지 못하면 다 몰살시키겠다고 윽박지르지 않는다면 아무리 의로운 전쟁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바보가 없다는 걸, 병서의 저자들이 알긴 잘 알았던 모양이다.

물론 병서의 저자들이 사지에 몰려 고통스럽게 죽어야 할 병사의 아픔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의로운 전쟁이더라도 전쟁이란 험악하다는 걸, 전쟁을 많이 겪어본 그들이야말로 익히 알았던 것이다. 희대의 군전략가인 제갈량(諸葛亮·181∼234)에 가탁된 병서 (將苑)의 ‘부진’(不陳)편을 보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군주는 전쟁을 일으킬 필요성도 느끼지 않으며, 전쟁을 잘하는 장수라면 굳이 전투하지 않아도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의로운 전쟁이든 아니든 싸움을 가급적 회피하려고 할 만큼 병서의 저자들은 호전광이 아닌 유교적 성향의 상식인이었다.

그런데 ‘싸우지 않고서 이긴다’는 미사여구 뒤에 숨은 실상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유교적인 도덕주의적 상상의 세계 같으면 인군(仁君)에게 천하가 스스로 귀순하는 것을 기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병서의 저자들은 이런 기적을 믿을 일 없는 ‘직업적 실용주의자’였다. 결국 그들이 내세우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은 유교적 인(仁)과 예(禮)의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쳐야 할 나라의 중신들에게 뇌물을 줌으로써 그 마음을 돌리고, 군주에게 귀한 선물을 주며 이런저런 일을 같이 하게 해서 그를 점차 조절해나가고, 그에게 미인과 좋은 말, 개를 바침으로써 국정보다 오락을 더 많이 누리게끔 해서 국정을 어지럽히고, 결과적으로 나라가 스스로 기울어져 망하게끔 한다는 것이다((六韜) 무도(武韜)-문벌(文伐)). 이 과정에서는 타락해가는 군주의 실정(失政) 밑에서 인민이 크게 고생할 터인데, 자국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병서의 입장에서는 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이렇게 해서 약해진 나라를 쉽게 이겨 병합시키면 되는 것이다.

무자비한 지배 기술도 자랑스런 문화유산?

상호 보완이라고나 할까? 유교 경전은 ‘인의염치’에 대한 온갖 좋은 말을 담고 있지만, 공자와 맹자가 굳이 이야기하려 하지 않던 현실 정치, 군정(軍政)의 잔혹하고 더러운 부분을 병서가 담고 있는 것이다. 병서의 세계는 결국 유교 국가의 실질적 정치의 세계인데, 이 세계는 일면으로 합리적이면서도 다른 일면으로는 끔찍하게 잔혹하다. 과중된 군비로 인한 경제·사회적 위기를 두려워한 유교 관료가 불필요한 전쟁을 회피하면서 차라리 국제적 모략 전술을 이용하려 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의로운 전쟁이라는 명분을 내걸어 강제로 징집된 병사를 사지로 내몰았을 때 무자비한 연좌제로 그들을 속박한 것도 사실이었다. 또 자동적으로 의로운 전쟁으로 인정되는 ‘오랑캐 토벌’이 유목민에 대한 제노사이드로 귀결돼도 전통시대의 유교적 관료들은 하등의 참회가 없었다. 과연 이런 모습의 동아시아의 전통을 미화만 해서 되는가? 연좌제 같은 무서운 지배도구를 구사하고 있던 과거의 유교적 국가를 우리가 자랑스럽게만 봐야 하는가? 전통사회에서 ‘미풍양속’과 ‘자랑스러운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소름 끼칠 정도로 무자비한 지배 기술도 존재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지배자의 폭력을 지속시킬 뿐이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

1. 김기동 지음, 서광사, 1993

2. 이기석 옮김, 홍신문화사, 2002

3. 오기 지음, 김경현 옮김, 홍익출판사, 1998

4. 손무 지음, 범우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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