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을 포기하고 미·일과의 공격적 ‘반북 연대’를 선택한 이명박 정권의 ‘반통일 정책’은 예상대로 필연적 결과를 보이고 말았다. 냉각될 대로 냉각돼버린 남북관계는 거의 준전시 상태로 진입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세업자의 줄도산과 비정규직 양산 등 민생이 파탄에 이르는 나라에 전쟁의 그림자까지 드리웠다.
타국의 민중에게 쏘는 포탄을 인정할 것인가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유발한 안보 위기 사태는 민생 파탄이라는 비극에서 대중의 눈을 돌리게끔 했으니, 정권이 은근히 바랐던 것일지 모른다. 제정러시아에서 20세기 벽두에 혁명적 기운이 꿈틀거렸을 때, 극우파인 뱌체슬라프 플레베(1846~1904) 내무부 장관이 러일전쟁의 필요성을 논했을 때 “혁명의 밀물을 막아내기 위해 우리에게 작은 승전이 꼭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러시아의 극우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조선을 식민화하려는 일본 군부가 호전적으로 나섰지만, ‘전쟁이 민중의 불만을 다른 쪽으로 돌린다’는 제정러시아 집권자 일각의 의식은 주목할 만하다.
진정한 의미의 전쟁, 즉 확전이 이루어진다면 외국 자본의 유입과 상품 수출로 돌아가는 한국 경제가 바로 파탄이 나고 말기에 이명박 정권은 ‘전쟁’까지 바라는 것 같지는 않지만(남북 양쪽의 무리한 행동으로 국지전이 점차 확대되면 결국 양쪽이 바라지 않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 또한 없지만), 지금 같은 준전시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친정권적 결집 효과는 분명히 노리고 있는 것 같다. 현 정권은 대중이 일시적으로 ‘반북·전쟁 프로파간다’에 넘어간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세습적 빈민으로 전락하는 다수 국민의 불만을 무마시킬 수 없음을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인기’를 먹고 사는, 하루하루의 민심에 민감한 대중적 정치인으로서는 호전적 분위기에 정면으로 맞서기 어렵다. 민주당 등 자유주의적 보수 세력이 정권의 반북주의 정책보다 안보 무능을 더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보수주의자의 근본 속성’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진보 세력이라 할 진보신당 일각에서까지 ‘안보주의’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경향이 보이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예컨대 진보신당의 심상정 전 대표는 정권의 대북정책뿐만 아니라 안보 무능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국방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참담한 인식 수준에 대한 우려는 이번 연평도 사건을 통해 현실로 증명되었다. 이명박 대통령 집권 3년 만에 상승의 최정예 우리 군이 연전연패의 당나라 군대가 돼가고 있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우려스런 현실이 되고 있다.” 물론 논평의 요지는 중국의 6자회담 제안을 받아들여 이 사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자는 것이었으며, 이는 필자가 수용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그런데도 문제는 남는다. 한·미·일 블록과 북·중·러 블록이 군사적으로 충돌할 경우를 가정해보자. 만국 노동자의 연대를 염원하고, 세계지도를 국경이 아닌 계급 사이의 경계선으로 그려보려는 사회주의자 내지 노동계 진보 정치인이 ‘최정예’의 방법으로 북한의 군복 입은 노동자와 민간인을 도살해야 할 남한의 군대를 ‘우리 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급진적 변혁이 당장 불가능한 상황에서 ‘총자본의 총체적 조절기관’으로서의 국가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의회정치에 참여해도, 그 국가가 타국의 민중에게 포탄을 날리는 일까지 승인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인가? 다르게 말하면 사회주의자는 언제든 타자를 대량 살인할 준비가 된 국가에 포섭돼야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살인 기계’로서의 국가와 비판적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인가? 유럽의 사회주의자를 150년 이상 괴롭혀온 이 문제는, 이제 한국의 진보 진영에게도 중대한 화두가 돼야 할 것이다.
전쟁 반대하자 반국가적 정당으로 찍혀
‘군사주의’라는, 부정적 뉘앙스가 강한 용어가 유럽의 주요 언어에 쓰이기 시작한 1860년대부터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재빠르게 군사주의 비판에 앞장섰다. ‘국적이 달라도 결국 같은 노동자’인 상대국 병졸들을 살해한다는 데 대한 도덕적 반발이 군대·전쟁 비판의 저변에 깔려 있었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1848년 유럽 전역의 혁명에 직접 참여한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필요악’으로서 혁명적 폭력까지 부정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군사주의가 진보에 큰 위협을 가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자로서 자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독일사민당이 꾸려진 1869년 이전, 독일사민당 창당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윌헬렘 리브크네크트(1826∼1900)는 “노동자의 납세 부담을 늘리고, 가장 좋은 노동자와 농민을 생산에서 빼돌려버리는” 독일의 비대화된 상비군을 통렬히 비판했다. 당이 창당된 직후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1870~71)이 벌어졌는데, 이 전쟁에서 리브크네크트는 전쟁을 비판하고, 자국 독일을 전혀 지지하지 않았으며, 양국의 노동자에게 반전 행동을 촉구했다. 그는 결국 감옥에 갔고, 독일사민당은 ‘반국가적 정당’으로 지목돼 1878~90년 활동금지령에 따라 지하에서만 활동했다. 독일사민당은 다시 합법화돼서도 상비군과 전쟁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들의 유명한 강령인 ‘에르푸르트 강령’(1891) 제3조는 상비군을 대신할 ‘전 국민적 군사 교육의 실시’와 ‘평화적 조정을 통한 국제분쟁 해결’ 등 군에 대한 반감과 평화 희망을 나타냈다.
전쟁과 군사주의에 대한 반대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세계적 사회주의 운동 연합체인 ‘제2인터내셔널’의 주요 구호였다. 1907년의 슈투트가르트 국제 사회주의 대회에서도 ‘세계전쟁이 발발할 경우 세계 무산계급은 지배자의 징병에 절대 응하지 않고 위기를 자본주의 전복의 계기로 이용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이 채택됐다. 그러나 18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유럽 각국의 사민당들은 해당 국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그들의 기반을 이루는 노조는 경제 투쟁에 몰두했기에 전쟁의 문제는 그다지 우선하지 못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상황이 바뀌었다.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사민당이 현실 정치에서 발언권이 강해지고 식민지 문제 등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이 심화돼 세계전쟁의 그림자가 짙어졌다. 세계적 규모의 도살이 언젠가 오고야 말겠다는 예감이 강해지자, 사민당 내부에서는 자국 군대를 ‘우리 군’으로 불러야 하느냐를 두고 첨예한 입장 대립이 나타났다.
‘사회주의적 군사주의’라는 어폐
예컨대 진보신당 내의 일부 (자칭) ‘사민주의자’들이 ‘사상의 원조’로 받드는 수정주의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1850~1932)은 혁명 자체를 부정한 나머지 혁명적 방법에 의한 세계전쟁 예방도 부정했다. 그 대안으로 자유주의 계통 평화주의자와의 연합, 평화사상 유포, 그리고 ‘모든 민족을 친근하게 만들’ 자유무역과 해외투자의 장려 등을 제시했다.
그와 비슷한 방향으로 가고 있던 독일사민당의 공식적 이론가 카를 카우츠키(1854~1938)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카우츠키는 산업이 고도화함에 따라 선진국이 자유무역의 ‘게임룰’을 지킬 커다란 민주국가 연합을 만들고,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세계 정부와 흡사한 전 지구적 권력이 나타나리라고 예상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각국 자유주의자들과 손잡고 ‘초제국주의화’ 추세에 역행하는 보수 군벌을 상대로 투쟁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결국 현실적 차원에서 부르주아 국가에 편입해 그 안에 안주해버린 사민당의 고급 관료들이 ‘우리 군’의 존재를 승인하면서, 자본주의 국가들이 인류를 도살장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환상을 열심히 이론화한 셈이다.
이와 반대로 급진주의자 카를 리브크네크트(1871~1919)는 군사주의야말로 자산계급이 무산계급을 복종시키는 핵심적 장치라고 자각하고 1904년부터 독일사민당의 당대회 때마다 징병반대 운동, 젊은이들 사이의 반군사주의적 선전을 위한 당 차원의 특별기구 설립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권의 중심에 있던 아우구스트 베벨(1840~1913)은 이 제안에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오늘날 한국 진보 일각의 북한에 대한 인식과 다르지 않게, ‘후진적이고 반동적인 전제정권’인 러시아와의 일전을 그다지 나쁘지 않은 일로 생각했다. 전쟁과 군대에 대한 극단적 반대는 당과 근로 대중 사이의 괴리를 지나치게 넓힐 수 있으며, 전쟁이 정말 발발할 경우 어차피 군이 절대권력을 갖게 되므로 그 어떤 실질적 반전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결국 독일사민당은 급진파의 목소리를 묵살하면서 점차 독일 군사주의와 타협을 모색했으며, 그 절정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여름 베른슈타인 등을 포함한 당 주류의 전쟁 지지였다.
1914년 여름 카를 리브크네크트는 독일 국회에서 유일하다 싶게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사민주의 지도자들은 세계적 도살을 감행하려는 국가의 적극적인 공범이 되거나, 저항을 포기하고 수수방관했다. 이런 비참한 항복은 지배자의 살인기구인 군을 ‘우리 군’이라고 부르고, 1907년 국회에서 ‘우리 군 전력 저하’까지 걱정해주고 ‘전력 증진 방안’을 친절하게(?) 제시해주던 베벨 식의 ‘사회주의적 군사주의 지지’의 필연적 결과였다. 반동적 국가와의 제휴 속에서 노동자 복지 증진을 도모하려던 베벨, 자본 세계화가 전쟁의 위험을 줄일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었던 베른슈타인 등은 결국 독일 군부 호전광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셈이었다. 그들은 ‘자본의 이득을 위해 같은 노동자를 죽일 수 없다’는, 상비군의 존재를 반대했던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초심을 배반했고 그들을 믿은 독일 노동자를 도살장으로 내보내고 말았다. 반대로 징병제를 행동으로 반대한 카를 리브크네크트는 사후 ‘평화의 실천가’로 평가받았다.
두 개의 길, 평화 실천 혹은 군사주의와의 타협
심상정 전 대표를 위시한 국내의 ‘온건 사민주의자’들은 과연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지금 대한민국이 100년 전의 독일보다 덜 반동적인 국가라고 믿는가? 대한민국이 국내 노동자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북한 민중을 사살하도록 명령한다면, 한반도 전체를 폐허로 만들 그 도살장으로 노동자를 순순히 보낼 생각인가? 사회주의자로서 깨끗하게 살다 죽는 것은 정말 초인적으로 어려운 일인가 보다.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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