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통념적 군대관과 전쟁관에는 한 가지 자기모순이 내재돼 있다. 비록 상류층은 병역기피를 상습적으로 저지르고 중산층의 많은 구성원들도 아들의 군 복무를 빼주는 것을 꿈꾸지만, 병역기피는 대중적으로 부정적으로 인식된다. 박정희의 ‘전 사회 병영화’ 노선에 따라 군대가 1970년대 이후 고등학교 다음의 남성 사회화 기관으로 자리잡은 상태다 보니, 이런 사회화를 회피한다는 것은 결국 당사자의 남성성이나 국민으로서의 소속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불평등하고 불평등이 세습화된 한국 사회는 ‘군대만큼은 다들 똑같이 간다’는 생각에 매달리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좌우간 전 사회 군사화의 산물이든 사회적 불평등 희생자들의 기만적 자기위안이든 의무로서의 병역에 대한 인식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전쟁, ‘합법적 살인’이라는 즐거움?
그런데 사회적 인식을 본질적으로 반영하는 한국 문학에서 전쟁을 낭만화하거나 미화하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는다. 병역은 신성하더라도 전쟁은 고통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개인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련으로 인식된다. 교전과 살인을 즐긴다는 것은 한국 문학의 맥락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한국 현대문학에서 전형적 전쟁 묘사는 이 정도다.
“공산군의 모든 화기는, 마지막 총공격의 불문을, 한꺼번에 열었다. 그러나, 움직임이 새어나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때를 같이하여,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까맣게 하늘을 덮고 나타난 유엔 공군의 폭격기는, 고맙게도 모여준 공산군 화기와 병력을 갈겨댔다. 낙동강에 물이 아니라 피가 흘렀다는 싸움은 이날의 그것이었다. (주인공 이명준의 애인인) 은혜는 부지런히 만나자던 다짐을 아주 어기고 말았다. 전사한 것이다.”(최인훈 , 1960)
전쟁이란 폭격과 주검, 상이병들의 망가진 신체, 그리고 가족·애인과의 사별이나 생이별을 뜻하곤 했다. 전쟁에 대한 유교적인 원칙론적 부정의 잔영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전쟁을 대표하는 것이 외세가 강요한 분단에 따른, 외세가 지휘하는 비자주적 동족상잔이어서 그런 것인가? 전쟁통에 가족의 연대가 끊어지는 것을 가족 중심의 한국적 사고에서 좋게 받아들일 수 없어서일까? 복합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겠지만, 한국인은 군대에 대한 의무감을 인식하고 크게 반발하지 않는다 해도, 한국적 전쟁문학은 결국 반전문학에 더 가깝다. 미시마 유키오(1925∼70)의 (1966)에서처럼 할복자살을 하는 우국적 소장 장교에 대한 흠모에 찬 묘사를 한국 문학에서는 찾기 어렵다. 일제 말기의 친일적 전쟁 찬양 문학이나, 역시 정치적 강요에서 자유롭지 못한 북한 문학을 예외로 둔다면 말이다. 태평양전쟁이든 6·25 전쟁이든 외부가 강제한 전쟁 참여인 이상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전쟁에 대한 근본적 부정은 필자가 익히 알고 있는 소련의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아군’의 애국심이나 용기를 찬양할 수야 있었겠지만, 소련 작가라면 전쟁을 ‘인민의 재앙’ 이상으로 볼 수는 없었다. 소련의 문학은 ‘제국주의적 전쟁’을 부정한 볼셰비키의 세계관, 그리고 남자가 징병당해 죽거나 다치는 재앙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러시아 농민의 전통적 전쟁관의 조합이다.
그래서 필자는 1989년 페레스트로이카의 파도를 타고 널리 유포된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구밀료프(1886∼1921)의 저작을 처음 접했을 때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가 본 작가 중 최초로 구밀료프는 ‘즐기는’ 투로 전쟁을 묘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이모저모에 거의 ‘쾌락’을 느끼는 식으로 썼다. 구밀료프는 1914~16년 자원입대해 기마병 장교로서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예컨대 그는 보병을 패닉 상태에 빠뜨려 정신없이 도망치게 만드는 기마병의 기습 공격에 대해 “즐겁고 시원하다”고 표현했다. 즐겁고 시원하다? 소련 문학에서 아군의 공격이라면 그런 말이 애국의 연장선상에서 나올 수 있겠지만, 구밀료프가 아군·적군과 무관하게 기마병의 공격 장면을 즐겁게 느낀 것은 참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지진과 같은 포격, 혜성과 같은 수류탄 투척, 멸망당할 운명에 처한 마을로 향하는 보병 부대의 돌진”은 시인이던 구밀료프에게 “신들에게 초대를 받은 우주적 차원의 향연”이었다. 아군과 적군 사이의 무인 지대에 정탐을 나갔다 독일 군인 몇 명을 본 구밀료프는 도망치려는 그들을 조준사격해 “정확하게” 사살한 것을 “아프리카에서의 코끼리 사냥만큼이나 너무나 흥분되고 신나는 일”로 서술했다(, 1915).
적병의 사살은 짐승 사냥처럼 즐거운 일일까? 소련 문학의 교과서적 전쟁소설인 파데예프의 (1951)에서 독일인 초소병을 칼로 찔러 죽인 소련 청년 빨치산은 “말라버리고 수염이 더수룩한 늙은 독일인” 주검 앞에서 그만 구토를 하고 만다. 아무리 적병이라 해도 살인, 특히 “군복을 강제로 입게 된 무산계급 구성원”인 졸병을 죽이는 일이 적어도 ‘즐겁지’는 못하다는 것이 소련 문학의 통념이었다. 그러나 반동 활동 혐의로 1921년 신생 소련 보안기관의 손에 총살된 구밀료프라는 철저한 군국주의자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에게는 전쟁과 전시의 ‘합법적 살인’은 “신들이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낙” 자체였다.
구밀료프의 별칭은 ‘러시아의 키플링’이었다. 20세기 초반 유럽 문학에서 전쟁 찬양의 원조 격은 최강 군국 대영제국의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이었다. 필리핀을 식민지화해 원주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무찔러 수십만 명을 학살한 미국의 ‘영웅적 과업’을 찬양하면서 1899년 ‘백인의 짐’이라는 명시를 발표한, 바로 그 키플링 말이다.
아군·적군 가리지 않는 살인 찬양“백인의 짐을 져라,/ 당신들이 키워낸 자녀 중에서 최고의 인재를 보내라/ 당신들의 자녀로 하여금 귀양의 곳에서 살게끔 강요하라/ 우리들의 포로의 필요에 응해주기 위해.”
“우리들의 포로”, 즉 유럽인이 노예화한 원주민을 키플링은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악마와 어린애 사이에 부단히 방황하는 ‘저들’을 단순히 다스리는 것보다, 그 저항을 꺾어 정복을 단행하는 과정이 키플링에게는 훨씬 더 재미있었다. 구밀료프가 시인으로서 성장하면서 모방한 것은 바로 키플링의 초기 ‘식민지 개척문학’과 ‘식민지 전쟁문학’이었다. 주로 원주민을 쉽게 정복하는 ‘우월한 백인종 군인’ 입장에서 쓴 키플링의 시에서 첨단 기술로 뒷받침되는 정복 전쟁은 기쁨 그 자체다.
“우리의 사랑은 산악대포, 산악대포는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가 몇 문을 끌고 온다면 너네들이 어떻게 해야 할는지 알지 못하고 있냐, 하하하!/ 너네 추장을 보내서 무조건 항복하라, 이는 전투나 도피보다 낫다, 하하!/ 너네 마음대로 어디를 도망쳐도,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도,/ 산악대포를 피할 수 없다!”(‘산악대포’, 1892)
아군에 대한 애국적 정서를 표명하기보다는 보편적 의미에서 ‘싸워서 죽이는 사나이’에 미학적 애착을 선언한 구밀료프처럼 키플링도 영국 군인만을 찬양했던 것은 아니다. 겁없이 살인에 나서는 원주민도 그에게는 아름답게 보였다. 예를 들어 1884~85년 아프리카의 수단을 정복한 영국군에 필사적 저항을 펼친 하덴도아(Hadendoa)족 전사를 키플링은 “원시림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영국군은 그 전사를 ‘퍼지워지’(Fuzzy-Wuzzy·수단의 토민병이라는 뜻으로, 속어로는 원주민·흑인을 뜻함)라고 비공식적으로 불렀는데 이는 바로 1892년 키플링이 발표한 한 명시의 주제가 됐다.
“그 녀석들을 우리가 전혀 길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관목 속에서 숨어 은근히 우리 말들의 힘줄을 칼로 찔러 끊곤 했다/ 그들은 수아킨(Suakin) 항구 근처에서 우리 초소병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곤 했다/ 우리 군과 숨바꼭질 놀이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이 시를 너네 녀석과 너네 나라 수단에 바친다/ 너네들은 불쌍한 무식한 이교도긴 하지만 전사로서는 일급이다!”
“무식한 이교도”라 해도, 초소병을 한 칼에 죽일 줄 알고 그 무서운 산악대포 앞으로 겁없이 돌진할 줄 알았다면 루소가 이야기한 “고귀한 야만인”이 되는 셈이었다.
윤리적 개인을 버리고 지배적 초인으로
키플링에 대한 구밀료프의 의식적 모방 이외에 두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다. 러시아와 영국이 같이 연합국으로 나선 그 전쟁에 구밀료프는 직접 참여했다. 반면, 키플링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존에게 자원입대하도록 했다. 키플링은 1915년 아들이 전사했다는 부고를 듣고 처음으로 전쟁에 대한 찬양 일변도의 태도에 의심을 품었다. 그런데 대전의 반대 쪽에도 수류탄의 폭발로 얇은 살점으로 조각나는 인체, 총검에 찔린 군인의 목에서 쏟아져나오는 피, 조준사격해 타인을 사살할 때의 “오르가슴과 같은 성취감”에 대해 글을 쓰려고 야욕을 불태우는 문인 지망생들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에른스트 윙거(1895∼1998)라는 서부전선 독일군의 한 지식인 출신 장교(소위)였다. 그는 전쟁 4년 동안 14차례나 부상을 입었지만, 끝내 전쟁의 ‘매력’에 흠모된 마음을 잃지 않았다. 종전되자 1920년에 윙거는 그 일기를 바탕으로 해서 소설화된 전쟁 기록인 를 펴냈다. 곧 큰 인기를 끈 그 책에서 전쟁은 다름 아닌 “마음을 단련시키는 학교”로 나타난다. 평범한 남성을 니체의 ‘초인’(超人)으로 만드는 전쟁 폭풍 속 죽음과 죽임은 윙거에게 이렇다 할 만한 윤리적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아군이나 적군의 죽음은 그저 일상일 뿐이다. “영국군의 박격포들이 아군 참호를 집중적으로 포화해 결국 일종의 ‘고기 저장시설’로 만들어놓았다.” 순식간에 ‘피투성이 고기’가 된 인간은 윙거에게 “초인이 될 이”의 “마음 수행의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초인’ 윙거 본인이 직접 살인을 하는 경우에 그 묘사는 흥으로 가득 찬다. “나는 계속 방아쇠를 당겨 적병을 사살하려는 충동을 지속적으로 느꼈다. …내가 정확하게 사살한 영군 군인은 주머니칼이 접히듯이 쓰러져버렸다.” 전쟁에서 당연지사로 여겨진 대량살인은 윙거에게 ‘초인의 놀이’였던 셈이다.
19세기 말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전시 살인을 극단적으로 낭만화하는 시와 소설, 수기 등이 러시아와 영국,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나 미국 등 거의 모든 구미권 국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산된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도 ‘저질’ 모험소설과 같은 영역이 아닌 ‘고급’ 문학의 영역에서 말이다. ‘흥겨운 살인’이 문학의 단골 주제로 등장한 현실적 이유는 무엇보다 식민지 획득 전쟁에 대한 ‘고급’ 사회의 열정적 반응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배타적·군사적 민족주의를 북돋우는 분위기가 이유일 것이다.
한편, 사상사적 흐름 차원에서 본다면, 살인과 즐거움이 연결되는 배경은 계몽기의 이성에 대한 배반이다. 도덕적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면서 윤리적 범위 안에서 자율성을 누리려는 칸트식 ‘윤리적 개인’ 대신, 19세기 말 위기의 유럽 부르주아 사회는 지배욕에 불타고 자비 따위를 약함으로 치부하는 ‘초인’을 내세웠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관념은 그것보다 훨씬 복합적이지만, ‘속물적 니체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즐거운 살인’이야말로 ‘나는 초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이었다. 구밀료프·키플링·윙거를 통해 문학적으로 표현된 ‘속물적 니체주의’는 점차 파시즘의 야만을 향해 가고 있던 유럽 자본주의에서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된 셈이었다. 기독교는 ‘정의로운 전쟁’을 들먹였는데, ‘흥겨운 살인’ 이념 차원에서 모든 전쟁은 당연히 정의로웠다. ‘초인’이 될 남성에게 재미있게 살인해볼 기회를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패권국 미국의 ‘위풍당당한’ 전쟁문학적 전쟁긍정론은 파시즘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을 경험한 오늘날 구미 사회에서는 적어도 주류를 점하지 못한다. 하지만 구미인의 귀한 생명을 전혀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은 채 한꺼번에 수십 명의 ‘까무잡잡한 탈레반 활동 혐의자’, 즉 파키스탄이나 아프간 양민을 대량살인할 수 있는 무인비행기 공격에 대한 구미 언론의 위풍당당(?)한 어조를 들여다보면, 첨단 기술로 무장한 구미인 집단 전체를 윤리적 규범에 구속받을 일 없는 ‘초인’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강력하게 남아 있는 듯하다. 이런 사고가 엄연히 존재하기에 미 제국은 반전운동에 거의 방해받지 않고 아프간에서 도살을 계속 ‘흥겹게’ 진행할 수 있는 것이다.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1. <the storm of steel: from the diary a german storm-troop officer on western front> Ernst Junker, London, Chatto & Windus, 1929
2. ‘구밀료프 초기 시집을 통해 바라본 시인의 예술관’ 김태욱, 충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5
3. 키플링 지음, 서강목 옮김, 하늘땅 펴냄, 1990
4. <rudyard kipling: hell and heroism> W. Dillingham, Palgrave Macmillan, 2005</rudyard></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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