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체험해본 사람이면 알겠지만 전시라 해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동물 세계에서도 암컷을 놓고 싸우는 수컷을 꽤 볼 수 있지만, 같은 종류의 동물들끼리 서로 죽이는 일을 보는 것은 극히 힘들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동류를 죽이는 데 천부적 거부감을 지녔다. 집단히스테리가 일어나 호전적인 분위기가 전 사회를 휘어잡아도 그렇다.
가시권 적군을 사살한 미군은 25% 불과
예컨대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해 처음엔 모든 참전국에서 교회와 정당, 언론이 부추기는 열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하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용감하게 돌진해서 적을 사살하는 데 열정을 보이는 모범 전사’는 전체 군인의 10%에 불과했다고 한다. 연구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은 있지만, 미국의 유명한 군사 연구자 새뮤얼 마셜(1900∼77)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실제로 방아쇠를 당겨 의식적으로 가시권에 있는 적군 병사를 사살하거나 사살을 시도한 미국 군인은 약 25%에 불과했다.
전쟁 프로파간다에 홀려 전쟁 자체를 긍정하는 것과, 같은 인간을 실제로 죽일 각오가 돼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죽임에 대한 ‘수용 불가’는 꼭 전장에서의 사살 회피로 끝나지 않는다. 전투의 광란 속에서 적병을 사살해야 했던 사람 가운데 많은 경우는 죽음의 장면을 나중에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나는 사람을 죽여봤다’는 기억을 안고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너무나 힘든 일이기에 우리 뇌는 그 기억을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격렬한 정동(情動) 상태가 아닌, 감정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조준 사격해서 타인을 사살하게 된다면 그 희생자의 얼굴이 죽을 때까지 악몽 속에서 떠오르는 것이 보통이다. 인간으로서, 타인을 죽이는 것보다는 타인을 위해 죽는 것이 오히려 더 쉬울지 모르겠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인데도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는 필연적으로 군인을 ‘냉혈의 살인기계’로 만들어야 한다. 말하자면 본성을 거슬러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보통의 경우에는 아군이 죽여야 할 상대자들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거나, 인간이더라도 우리를 본질적으로 위협할 수밖에 없거나, 우리보다 크게 열등하거나, 우리로서 ‘합법적으로’ 죽여도 되는 범죄적 인간임을 병사와 주민들에게 반복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삼는다. 이런 ‘증오 교육’ 없이는 전쟁다운 전쟁이 펼쳐지지 않는다.
단, 가상의 적과 ‘우리’의 관계 유형에 따라 증오 교육 형태는 달라진다. 예컨대 오늘과 같은 ‘선진적 통상대국 남한’과 ‘후진적 군국 북한’의 대치 상황에서 남한의 증오 교육은 ‘후진적 상대국’의 지도층에 대한 공격으로 일관된다. 민족주의적 이념상 동족으로 인식되는 북한 일반인에 대한 증오심을 유발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북한의 후진성과 군사적 폭력성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되는 북한 지도자들에 대한 증오심 선동은 ‘도덕적 비난’처럼 보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설은 가상의 적이 동족일 때 행해지는 증오 교육의 전형적 사례에 해당된다.
상대 집단의 민족·국민성 공격하기도“김일성 세습 왕조의 핏속에는 폭력과 테러, 군사 도발의 DNA가 대를 이어 흐르고 있다. 김일성은 6·25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포의 목숨을 앗아가고 전 국토를 불태운 민족사 최대 전범이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기 무섭게 남의 나라에 공작원을 파견해 그 나라를 공식 방문한 대한민국 대통령 일행을 폭탄 테러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중동에서 피땀 흘려 일하다 귀국하는 대한민국 근로자들이 탄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시켰다. 김정은은 3대 세습 후계자로 지명돼 군 지휘 권한을 물려받자마자 연평도의 군인과 민간인을 향해 해안포를 쏴댔다. 대한민국의 최대 과제는 김씨 왕조를 제어해 다시는 국가적·민족적 참극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국민을 피란 가게 하는 나라가 되어선 안 된다’, 2010년 11월24일)
이 주장을 논리적으로 하나씩 따져보면 당장에 온갖 허점이 보인다. 김일성이 6·25를 일으켰다 해도, 6·25에 이르는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 남한에서의 좌파 학살 등 모든 과정에 대해서도 김일성 혼자서만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가? 북한 소행으로 추정되는 공격의 피해자가 될 뻔한 전두환은, 과연 본인도 광주에서 자국민을 상대로 끔찍한 테러를 벌인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KAL858기 폭파 사건과 관련한 모든 의혹은 과연 완벽하게 밝혀진 것인가?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말이 되지 않는, 남북한의 ‘적대적 공생’의 현실을 무시하고 북한만을 일방적으로 문제 삼는 텍스트지만, ‘김일성 왕조 범죄’ 나열은 그 ‘왕조’를 섬기는 군인이나 민간인 역시 죽여도 된다는 인식을 독자가 가질 수 있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을 준비하는 이들의 고전적 증오 교육이다. 물론 남한 통치자들을 향해서 내뱉는 북한 매체들의 수사(‘역적 도당’ ‘역도’ 등)도 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인종과 문화, 종교가 같거나 비슷해도 ‘민족’ 내지 ‘국민’으로 엮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전쟁을 준비할 때에는 상대 집단의 민족성 내지 국민성을 공격해 악마화에 열을 올린다. 전형적 사례는 제1차 세계대전 시절의 영국·미국 미디어에 의한 독일 국민의 악마화였다.
독일 프로파간다가 ‘이기적이며 타산적이며 비문화적인 영국인’ 등 상대방의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한편, 징병제 국가인 독일과 달리 1916년까지 징병제도가 없어 입대 지원자들을 계속 모아야 했던 영국으로선 증오 교육이 훨씬 더 절실했다. 그들은 독일인을 ‘무조건적 복종에 익숙한 기계적 인간’ 또는 ‘천부적 전쟁광’으로 규정했다.
후방 중산층이 증오 교육에 더 취약1915년 5월에 나온 ‘벨기에에서의 독일군 만행 관련 보고서’에서 독일 군인은 임산부를 성폭행하고 갓난아이를 ‘재미로’ 참수하며 민간인 주택을 폭파하고 양민을 인간 방패로 이용하는 ‘괴물’로 그려졌다. 전시에는 독일군도, 영국군도 만행을 저질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확인이 불가능한 증언을 무비판적으로 이용하고 적군의 만행만을 골라서 강조한 이 보고서는 결국 영국 정부 돈으로 30개 언어로 번역·출간돼 국제적인 심리전에까지 이용되는 중요한 무기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로 독일 군인들과 접전했던 일선 군인들은 독일군을 ‘용감한 사내’이자 ‘우리와 같은 징집의 피해자’로 인식한 반면, 후방의 중산계급 구성원들은 ‘독일 군국주의자’를 추상적 존재로만 인식하며 증오 교육에 더 잘 넘어가곤 했다는 것이다.
영미권이나 프랑스에서의 증오 교육은 문화부터 외모까지 별반 차이가 없는 독일인에 대한 것이었으므로 덜 성공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문화·외모가 완전히 다른 상대집단에 대한 증오 유발은 대개 ‘대성공’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정복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에게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려 했다. 전시 증오 교육이 인종주의적 편견들과 뒤섞인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 있던 미군 병사 중에서 ‘독일인을 멸종시켜야 한다’는 의견에 찬성하는 이들은 25%였지만,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인종의 멸종’을 꿈꾼 미군 병사는 42%에 달했다. 유럽 전선에 배치된 미군 병사나 미국 본토를 아직 떠나지 않았던 병사들은 일본인을 직접 대면하지 않았음에도 일본인에 대해 훨씬 더 짙은 증오심을 드러내곤 했다. 그들 중 60% 이상이 일본인이 멸종되기를 바랐다. 전후 연합국 쪽에서는 일본군의 ‘백인 포로 학대’를 문제 삼아 수많은 전범 재판을 진행했다. 게다가 이들은 일본군에 생포된 연합군 포로가 14만 명 이상이었던 반면, 연합군 손에 들어간 일본인 포로가 3만 명도 되지 못한 이유를 꼭 물으려 하지 않았다. 생포된 일본인 포로 수가 훨씬 적은 데에는 포로가 되는 것보다 차라리 ‘옥쇄’(玉碎), 즉 ‘명예로운 자살’을 강요하는 일본군의 정신교육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군인이 미군이나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에게 항복하려 했을 때 ‘열등한 황인종’ 취급을 받으며 즉각 사살됐던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일본인을 원숭이처럼 생각한 미국 군인들은 사령부의 엄금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주검에서 머리를 잘라 물에 끓여 모든 살점을 떼어버린 뒤 그 해골을 ‘기념품’으로 가져가거나 애인이나 부모에게 선물로 보내곤 했다. 이런 만행은 일본의 반미 선전에 이용됐고, 그 선전을 접한 일본 병사들은 포로가 되는 것보다 자결을 택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곤 했다. 인종주의로 뒷받침되는 증오 교육은 전쟁의 살기를 보통 이상으로 북돋웠다.
한반도 주민을 ‘구크’라고 부른 미군한국 현대사 또한 인종주의적 증오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미군에게 남한은 명목상 ‘우방’이었지만, 북한 사람들을 대하는 미군의 태도는 태평양전쟁 때 일본인에 대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군은 모든 한반도 주민을- 소속 국가나 이념적 성향과 무관하게- ‘구크’(gook·‘아시아 놈’)라고 비칭했으며 ‘구크를 죽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엄연히 구분했다. 그들에게 구크는 완전한 의미의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착하고 신앙심이 깊은 미국인이었다 해도, 그들은 ‘모든 한반도인은 죽여도 무방한 대상물이다’라고 말하는 이데올로기의 자장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예컨대 독실한 가톨릭 신도인데다 일본 여성과 사랑에 빠졌던, 어떻게 말하면 ‘악질적 인종주의자’까지는 아니었던 키리스 새르노 미 해병대 6·25 참전 병사는 “전투에서 나의 사명은 가급적이면 많은 구크를 살해하는 것이었으며, 권총으로 단거리에서 그들을 사살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곤 했다”고 회상한다. 이런 분위기는 이북 지역에 대한 융단폭격부터 노근리 학살까지, 온갖 전쟁범죄가 쉽게 감행될 수 있게 했다. 전쟁의 정신적 ‘윤활유’로서 인종적 증오는 인간적 양심과 근대적 이성을 모조리 마비시켰던 것이다.
류의 극우 신문들은 북한 지도층 악마화에 대해 ‘억압적 정권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북한 정권이, 가 유착해온 남한의 역대 독재 정권만큼이나 억압적이라는 점이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남북한이 군사적 대치를 하는 상황에서 한쪽의 주류 언론기관이 다른 쪽의 지도자를 일관되게 악마화하는 것은 증오 교육, 즉 ‘준전시 분위기 만들기’임이 틀림없다. 남한과 함께 막강한 군사 블록을 이루는 미국·일본도 이 준전시 분위기 만들기에 동참하고 있는데, 이들의 머릿속에는 아시아인 내지 조선인에 대한 인종주의·식민주의적 편견까지 섞여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증오의 도가니는 과연 우리가 살고 싶은 동아시아인가?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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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877015">참고 문헌</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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