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서바이벌 게임과 합숙, 전쟁 같은 자본주의



전쟁에 참여할 위험 없는 서구 중산층, 게임으로 대리만족…

한국과 같은 병영국가에선 기업도 군사문화 당연시
등록 2010-08-25 22:17 수정 2020-05-03 04:26
기업의 합숙훈련과 서바이벌 게임은 자본주의가 전쟁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보여준다. 한 시청 공무원들의 해병대 극기훈련(왼쪽·연합사진)과 예비군 훈련장에서 진행되는 서바이벌 게임. 한겨레 자료

기업의 합숙훈련과 서바이벌 게임은 자본주의가 전쟁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보여준다. 한 시청 공무원들의 해병대 극기훈련(왼쪽·연합사진)과 예비군 훈련장에서 진행되는 서바이벌 게임. 한겨레 자료

소련에서 보낸 유년 시절 필자에게 가장 괴로운 체험 중 하나는 ‘자르니차’(섬광)라는 이름의, 의무적일 정도로 강제됐던 모의 전쟁이었다. 정확하게는 학생의 의무까지는 아니었지만 소년공산동맹의 맹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고, 소련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살려면 소년공산동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자르니차는 남녀 구분 없이 중학생에게 애국심과 ‘군사 관념’을 주입시키는 것이었는데, 대개 모의 계급장이 달린 모의 군복을 입은 소년·소녀들이 두 팀으로 갈라져 서로의 깃발을 빼앗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페인트볼, 기업 생활을 위한 훈련

깃발을 빼앗는 일 이외에 ‘적군 살해’가 또 하나의 목적이었는데, ‘적군’의 계급장을 떼버리는 것을 적군 살해로 쳐주곤 했다.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전쟁놀이와 상당히 유사한 자르니차에 급우들은 대개 열성적이었는데, 필자로서는 숭고해야 할 국가가 철없는 아이들의 전쟁놀이를 돈을 들여 큰 규모로 조직한다는 것이 잘 이해 되지 않았다. 국가도 조용히 책을 보거나 숲 속을 거니는 일보다 서로 죽이는 흉내를 내는 일을 더 선호하는 철부지 아이들의 수준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적군 살해’ 같은, 사실 그 뜻이 끔찍한 단어들을 교사 등 권위 있는 어른들이 사용한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야 국가가 그 철부지 소년들을 아프간 침략 현장에 보낼 총알받이로 만들기 위해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친숙한 전쟁놀이와 비슷한 형태로 모의 군사연습을 시켜 점차 그들을 군사화하려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르니차는 맑고 밝은 우리 동네 10대 초반의 소년이 점차 ‘모범적’ 총알받이로 거듭나는 길에서 하나의 작은 계단쯤이었다.

냉전이 종식되고 동구권이 몰락하자 과거와 같은 자르니차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모의 전쟁이 사라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넓은 층에서 더욱더 인기를 높였다고 할 수 있다. 자르니차는 어디까지나 국가가 아동에게 ‘위로부터’ 지시하는 관제 모의 전쟁이었지만, 1990년대 이후 옛 소련에서의 모의 전쟁들은 대개 ‘밑으로부터’의 소비 경향이었다.

무엇보다 1990년대 초반 구미 지역에서 도입된 서바이벌 게임 ‘페인트볼’이 1996년부터 국가적으로 공인돼 1990년대 후반 이후 신흥 중산층 사이에 대유행했다. 이 게임은, 약간의 위험 요소(단거리에서 탄환을 쏘면 꽤 아플 때도 있다)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의미의 전쟁 게임이다.

사격술부터 팀 멤버 간의 ‘전우애’까지 키울 수 있는 이 모의 전쟁을, 병역 기피를 특기로 삼는 등 ‘군사’와 사이가 먼 러시아의 신흥 중산층이 그렇게까지 자발적으로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직폭력부터 뇌물을 갈취하는 부패관료까지 수많은 위험 요소가 놓인 기업 생활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누군가를 죽이는 척하면서 푸는 방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기업 생활을 위한 일종의 ‘훈련’이라는 측면도 강하다. ‘적’, 즉 경쟁자를 가장 효율적으로 ‘제거’하는 일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처신술까지, 모의 탄환을 쏴가면서 다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을 내고 즐기는 모의 전쟁은 시장에서의 ‘생존술’의 상징이자 사전 준비가 되는 셈이다. 전세계의 진화 과정을 끝없는 생존 게임인 우승열패·적자생존 위주로 보는 사회진화론적 사고의 현대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너무나 심각했던 100년 전의 사회진화론적 이야기에 비하면 페인트볼은 가볍고 유쾌하다. 모든 것이 ‘즐길 수’ 있는 소비품이 되는 후기 자본주의 시절에는 폐인트볼이라는 형태의 생존 게임도 하나의 ‘즐거운 소비재’가 된다.

전쟁도 ‘즐길 수 있다’는 발상은 구미권에서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부터 힘을 얻었다. 베트남전쟁이 종식된 뒤로는 구미권 중산층 청년들이 더 이상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징병돼 진짜 전쟁터로 보내질 일은 없어졌다. 그만큼 전쟁에 대한 중산층의 반감도 누그러졌다. 거기에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개인의 직장 생활은 갈수록 ‘전쟁’을 방불케 했다. 특히 미국·영국 등 신자유주의 발상지에서는 노조가 무력화되면서 동료와의 연대는 점차 옛말이 되고, 동료든 경쟁사 직원이든 모두와의 무한 경쟁에서 혼자 살아남아 부자가 되려는 각개약진·승자독식은 차차 중산층의 새로운 직장 생활 패턴이 돼버렸다.

스포츠 등 일상문화에서도 경쟁 내면화

유럽에서는 평균적으로 근로자가 한 직장에서 일하는 연수가 9년 이상이지만 미국에서는 4년 정도밖에 안 돼, 잦은 이직 속에서 나와 가족의 생존 관념만 자꾸 굳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서바이벌 게임’의 규칙들이 세계적 공황 속에서 엄격해지는 가운데 미국에서 1981년 페인트볼이 발명됐다. 이 전쟁 게임은 1970년대부터 서방에서 ‘스트레스 풀이’로 유행한 가라테 등 동아시아 무술과 같은 ‘전사’들 사이의 물리적 접촉도 요구하지 않았다. 때리고 맞는 ‘진짜 싸움’에 공포를 느꼈던 일부 중산층에게 아주 편리한 ‘싸움의 대체물’이 된 것이다. 사무실에서의 ‘서바이벌 게임’도 한 방 먹이지 않고, 친절한 미소를 띠고 ‘얌전하게’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직장에서의 ‘생존전’에 가장 가까운, 신자유주의 시대 직장인의 훈련술로서 최적의 모의 전쟁은 바로 페인트볼류의 신종 스포츠들이었다.

실제로는 굳이 페인트볼이나 동아시아계 무술을 하지 않더라도 어릴 때부터 경쟁, ‘승리의 달가움’, 그리고 팀 안에서의 사회적 서열을 배울 만한 기회는 수두룩하다. 미국 같으면 ‘모범생’의 이미지는 ‘공부의 신’이라기보다는 운동장에서 경쟁이라는 사회 원리를 몸으로 익히는 ‘운동 잘하는 아이’며, 실제로 약 40~50%의 고교생이 정기적으로 각종 스포츠를 한다. 그걸 하면서 특히 남학생들은 체력 경쟁을 하지 못하는 ‘책벌레’나, 힘센 친구의 도발에 ‘남자답게’ 대응하지 못하는 ‘약체’에 대한 경멸을 익히는 등 약육강식 사회의 불문율을 훌륭하게 내면화한다.

그런데 학교에서의 스포츠는 꼭 ‘즐기는’ 의미에서 한다기보다는, 스포츠에 능한 ‘인기 높은’ 급우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반타율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달리 어른들의 전쟁 게임은 말 그대로 모의 폭력을 즐기면서 경쟁 사회에 필요한 각종 ‘지혜’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장이다. 또한 스포츠를 통해 미래의 ‘승자’를 배양하는 관념은 특히 영미권 중산층 문화에서 오랫동안 있어왔지만, 전쟁이라는 인류의 가장 끔찍한 경험을 ‘모의화’해 상품화한다는 것은 중산계급과 전쟁이 완전히 분리되고 나서야 가능해졌다. 중산계층이 징병제의 족쇄를 벗어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한 나라, 중산층까지 언제나 유사시에 진짜 전쟁터에 끌려갈 수 있는 나라에서는 전쟁이란 그렇게 쉽게 ‘즐기는’ 상품이 되지 못한다. 여기에서는 대한민국이야말로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남성의 평균적 현역 복무율이 80%에 이르는 대한민국은 북한, 이스라엘, 시리아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군사화된 사회로 꼽힌다. 이제 징병제를 폐지하려는 스웨덴의 현역 복무율은 6~7%, 징병제 폐지 논란이 일고 있는 독일에서는 15%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하면, 한국의 징병제가 유럽권에 비해 얼마나 엄격한지 체감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은 2년의 기나긴 복무 기간은, 구미권이 아닌 싱가포르나 아르메니아, 모잠비크, 수단에 가야 그 유례를 찾을 수 있다. 징병제가 이처럼 포괄적이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는 구미인처럼 유유자적하게 ‘전쟁놀이’를 즐기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삼성 수련회 ‘매스게임’의 논리  

그런데 세계에서 사회적 훈육 과정이 가장 철저한 편에 속하는 한국에서는 모의 전쟁도 아닌 모의 군 생활이 사회교육의 일종으로 안정적으로 착근된 지 오래다. 대기업마다 신입사원에게 실시하는 합숙훈련을, ‘모의 병영 생활’이 아니라면 과연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대기업 중에서 약 42%가 ‘신참’을 상대로 합숙훈련을 벌이는데, 그중 약 25%가 4주 이상의 긴 기간을 갖고 군대에서 따온 방법으로 ‘정신훈련’을 하고 ‘애사심’을 키운다. 독일에서는 군 현역 복무 기간이 6개월인데, 이를 봐도 한국 대기업들의 훈육주의가 세계적 맥락에서 얼마나 특별한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오랜 기간을 갖고 회사는 과연 애사심과 사원 정신을 어떤 방식으로 키우는가? 신입사원 교육의 치밀함으로 유명(?)한 H재벌은 6년 전 입사 교육 프로그램 일환으로 ‘3박4일 148km 행군’을 실시했다. 군에서 하는 ‘100km 행군’을 더 늘려 회사의 ‘이념’인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과 연결시킨 것이다. 사원을 이처럼 회사 일에 죽고 사는 ‘전사’로 키우는 데 대해 회사 안팎에서 반발도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게 놀라운 일은 전혀 아니다. 고교에서 죽도록 공부하고 군에서 명령과 폭언을 들으면서 시키는 대로 무조건 잘하는 데 순치된 신입자들은, 회사를 ‘인생에서의 성공을 위해’ 갔다 와야 할 또 하나의 군대로 인식해도 별 이질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전 사회에 퍼진 군사 문화에 대해 나름의 반성도 일어나고 있는 우리 시대에 기업들의 집요한 군사주의적 ‘조직 원리’에 대한 의구심이 전혀 없는 편은 아니다. 3년 전 하기 수련회에서 북한의 집단체조와 너무나 비슷한 매스게임(카드섹션)을 하면서 회장의 얼굴이나 회사의 각종 로고를 ‘일사불란하게’ 만드는 삼성 신입사원의 동영상이 인터넷으로 유출돼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당시 인터넷에 등장한 누리꾼들의 댓글을 보면, “기업 종사자들에게 일체감 훈련이 필요하다”는 회사의 논리에 본격적 반론을 제기한 이는 거의 없었다. 기업조직에서- 군대처럼- “개인이 없다”는 테제는 한국 사회에서 거의 ‘통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단, 북한의 집단체조와의 가시적 유사성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헌법의 말을 그대로 믿어온 많은 사람들에게 다소 불길한 느낌을 준 모양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북한의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껍질에 불과하고, ‘회장님’들이 마음대로 요리하는 이 사회의 기본적 작동 논리가 사실상 수령주의 체제와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 이는 많지 않았지만, “북한과 비슷하다”는 것은 그래도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한 셈이다. 내부용인 ‘일체감 훈련’ 동영상의 유출이 ‘글로벌 기업’임을 내세우는 삼성 관계자들을 다소 곤혹스럽게 한 모양인데, 그들의 해명도 걸작이었다. “21년째 해마다 해오는 것이다. 교육을 받은 사원들 대부분이 공동체 의식을 느끼고 자랑스러워한다. 외부 시각으로 이상하게 재단할 일이 아니다.” 이 말을 ‘삼성어’에서 일반적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우리는 군사 문화로 오래전부터 뭉쳐온 것인데, 외부에서 무슨 말을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내부 구성원들이 군사 문화를 이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다. 대단히 아쉽지만, 이 해명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진실에 가까웠다. 병영국가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이라면 아주 특별한 ‘불온분자’가 아닌 이상 ‘병영기업’을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 있겠는가.

‘전쟁’이라면 텔레비전에서 미군 무인폭격기가 파키스탄 마을 주민들을 ‘탈레반’이라고 하여 집단 몰살시키는 장면을 보면서 흡족하게 웃는 일쯤으로 생각하는 구미권 중산층이나 그들의 문화를 따르는 동구권 중산층은 이제 모의 전쟁을 하나의 심심풀이자 유쾌한 게임, 그리고 무한 경쟁의 ‘물리적’ 예비 체험으로 삼아 즐기곤 한다. 한데 한국과 같은 극도로 군사화된 준주변부 사회에서 모의 군 생활은 많은 경우 ‘선택’이 아닌 사회적 훈육 프로그램의 일부분으로서 ‘필수’다. 일반 군 복무에다 각종 수련회, 합숙 연수, 해병대 캠프 등등을 훌륭하게 통과해야 중산층의 위치를 획득 내지 재확인해 군대처럼 움직이는 그 조직 속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밑엣것’들 위에 군림하며 ‘윗분’들의 군림을 당연지사로 감수하면서 말이다.

자본 논리와 전쟁 논리는 ‘쌍둥이’

구미 중산층이 페인트볼이나 가라테를 즐기듯, 김 대리나 이 과장은 회사에서 수련회 때 시키는 극기훈련을 즐기는가?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수련회가 상징하는 ‘대기업의 안정된 구성원’으로서의 특권적 신분을 자랑스러워하고, 대기업이 군대처럼 움직이는 걸 당연지사로 받아들인다. 결국 즐기느냐 않느냐의 차이는 있어도, 자본주의하에서 일상생활에 군사적 요소들이 늘 개입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자본의 논리는 아무리 발전해도 전장에서의 무자비한 도살과 태생적 흡사성을 영원히 잃지 않는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

1. 〈Warrior Dreams: Paramilitary Culture in Post-Vietnam America〉 James Gibson, NY: Hill and Wang, 1994

2. ‘Unnecessary Roughness? School Sports, Peer Networks, and Male Adolescent Violence’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Derek Kreager, 72/5, 2007, pp.705~724.

3. ‘기업들 신입사원 채용 후 강도 높은 합숙연수’ , 2006년 2월15일

4. ‘삼성 신입사원 매스게임 동영상 인기 폭발’ , 2007년 6월20일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