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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거짓말, 정의로운 전쟁



신의 이름과 온갖 명분으로 포장하지만 실상은 점령 야욕과 비전투원 살인, 폭력의 횡행
등록 2010-06-04 12:15 수정 2020-05-02 19:26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그러나 인류사에서는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자기옹호적 전쟁관도 탄생했다. 그림은 전장에서 활을 쏘고 있는 아시리아의 군주. 한겨레 자료

정의로운 전쟁은 없다. 그러나 인류사에서는 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자기옹호적 전쟁관도 탄생했다. 그림은 전장에서 활을 쏘고 있는 아시리아의 군주. 한겨레 자료

여섯 달 전쯤 필자가 살고 있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의외의 수상치고도 아주 의외였다. 인종차별 철폐에 기여한 공로를 표창하는 상이었다면 모르지만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진행하면서 대이란 전쟁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가장 호전적인 국가의 수반에게 평화상을 주다니. 노르웨이에서도 의아해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노르웨이 집권 노동당이 이를 통해 오바마로 하여금 전쟁과 평화 문제에서 노르웨이를 위시한 유럽 우방과의 토론을 중시하고 신중함을 보이게하려는 게 아니냐는 세간의 관측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상의 권위가 실추된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컸다. “이 상을 무슨 공로로 받게 됐는지 나 자신도 모른다”고 토로한 바 있는 오바마는 주최 쪽의 난처한 입장을 고려해서인지 수상 연설 주제를 ‘평화’로 잡지는 않았다.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줄 수 없는 군사대국의 수장은 ‘전쟁의 기원’과 ‘정의로운 전쟁의 조건’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밝혔다.

자기옹호적 전쟁관 ‘잘’ 정리한 오바마

연설의 요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쟁은 인류와 함께 태어났으며 인류사 초기에는 아무도 문제삼지 않는 단순한 현실이었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정의로운 전쟁과 정의롭지 못한 전쟁의 구별이 생겼다. 이 구별의 기준은 전쟁의 목적이 방어인가, 전쟁이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는가, 그리고 양민에 대한 폭력이 예방되었는가 등이다. 인류사에서 이 기준들은 대개 무시되긴 했지만 전쟁의 명분과 수단, 방법의 정당성은 그래도 중요하다. 전쟁이 없어질 날은 아직도 보이지 않지만, 인도주의 등의 명분이 충분한, 정의로운 전쟁만을 진행한다는 게 미국의 목표다.” 이 요점들 하나하나를 보면 상당 부분이 역사적 사실과 다소 무관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예컨대 전쟁의 시작은 ‘인류사 초기’라기보다는 경제적 잉여가 발생하기 시작한 시점, 즉 신석기 후기다. 미국이 ‘정의로운 전쟁’만을 골라서 하겠다는 이야기도 미국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에게는 어불성설로만 들린다. 이처럼, 연설 내용의 상당 부분은 허구에 가깝지만 오바마 연설의 함의는 깊다. 여태까지 수많은 지배자가 내놓았던 자기옹호적 전쟁관을 오바마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셈이다. 그 연설은 ‘평화’와는 관계없었지만 ‘전형적 지배자’의 ‘전형적 전쟁관’을 만천하에 잘 드러냈다.

전쟁이 인류사와 함께 태어났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전쟁옹호론’이 전쟁과 함께 태어났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단, 오바마가 언급한 ‘정의로운 전쟁’의 구체적 기준들-‘최후 수단’으로서의 성격, 방어의 목적, 비전투원 보호- 등은 로마공화국의 키케로(기원전 106~43)부터 네덜란드의 그로티우스(1583~1645)를 거쳐 근대로 이어지는 서구의 ‘정의로운 전쟁’ 이 주장하는 논리의 결론일 뿐이지 ‘정의로운 전쟁’ 논리의 원래 형태는 아니다. 가장 오래된 고대의 전쟁옹호론들은 ‘좋은 전쟁’의 조건을 까다롭게 규정하지 않았다. 정복전쟁도 좋았고 비전투원을 죽이거나 노예화해도 좋았다. 관건은 전쟁을 ‘우리 부족·국가의 신’이 허가했는지였다. 신들의 대표자로 여겨진 군주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그 전쟁을 정의롭게 만들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굴지의 정복군주인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재위 기원전 1114~1076)는 설형문자 문서에서 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자기소개를 했다.

“위대한 아슈르 신과 짐의 왕국을 보위하는 다른 신들께서 짐의 영지에 법전들을 하사하시고 짐에게 그 영토를 넓히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 목적을 위해 짐에게 충실하고 용감한 부하들을 보내시었다. 그들을 거느리게 된 짐은, 본국에 적대적이던 수많은 왕과 국가와 종족을 복종케 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가져왔다. 많은 무리의 군주와 싸워서 그들에게 복종의 멍에를 씌워놓았다. 짐의 전쟁·전투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짐은 아시리아의 영토를 넓히고 그 백성의 수를 늘렸다.” 티글라트필레세르는 그 뒷부분에 자신이 복종시키거나 폐위·처형한 군주의 이름, 섬멸한 군대의 규모, 정복한 나라의 이름, 아시리아를 보위하는 최고의 신인 싸움과 사냥의 신 아슈르에게 바친 제물 등을 적은 상세한 목록을 첨부했다. ‘비길 데 없는 정복자’ 입장에서는 전쟁의 과실을 아시리아를 지켜주는 아슈르 신에게 제때 제대로 바쳐주기만 하면 그 전쟁은 이미 ‘정의로운 전쟁’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신을 위해 싸우는 한 이 싸움은 정당하다.” 대체로 이 정도가 ‘정의로운 전쟁’을 두둔하는 논리의 원래 형태일 것이다.

“모든 것을 너를 위해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아시리아 제국의 군인들. 신을 위해 싸우는 한 그들의 전쟁은 정당했다. 한겨레 자료

아시리아 제국의 군인들. 신을 위해 싸우는 한 그들의 전쟁은 정당했다. 한겨레 자료

독자는 이를 너무 원시적이라고 볼 것이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 ‘단순무식한’ 전쟁옹호론과 흡사한 형태의 논리가 전세계 기독교인이 아직도 숭상하는 구약성서에도 담겨 있다. 유대인의 가나안(오늘날 팔레스타인) 땅 정복을 다루는 구약성서의 대목에는 그 정복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정복전쟁의 규칙까지 정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신명기’(申命記)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불복하는 토착민의 성읍을 공략할 때 다음과 같이 행동하도록 명령한다.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는 그 성읍에 먼저 화평을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화평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모든 주민들에게 네게 조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만일 너와 화평하기를 거부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基業)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20:10~17)

아시리아 주변의 왕국을 복종시키고 거기서 빼앗은 전리품을 자신에게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만을 한 아시리아의 아슈르 신보다 가나안의 토착민 등 여러 현지 종족의 진멸을 명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잔인한 모습을 보인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역사적 사실을 따져보면 유대인의 가나안 영토 진출(기원전 1200~1000)은 구약성서에 묘사된 것보다 훨씬 평화적이었고 유대인과 가나안인 사이에 영향을 주고받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기원전 7~6세기에 골격이 잡힌 ‘민수기’ ‘신명기’ 등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신성하고 정의로운 전쟁’을 이야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그 시대 유대인 제사장들은 방어전이나 비전투원 보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만 있다면 정복전쟁을 벌여 타 민족 남자들의 씨를 말리고 여자와 아이를 노예화하는 건 문제가 안 되는 일이었다. 물론 구약성서에서 이 만행의 근거로 “가나안인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가증한 일”(에로틱한 요소가 많은 풍요의 신들에 대한 숭배)이 거론되지만 이는 결국 “타자의 종교는 우리와 다르니 타자를 진멸해도 된다”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신에게 선택을 받은 종족이니 우리의 전쟁은 정당하다”는 논리 이상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은 언제 처음 만들어졌을까? 고대인의 초기 서사시에‘전쟁의 도덕적 명분’ 같은 주제가 나타나기는 한다. 대체로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저지른 상대방에 대한 보복전쟁은 정의롭다는 게 이들 서사시의 공통된 이데올로기적 중핵이다. 단, 여기서 정의롭지 못한 행위란 대개 관습법 위반을 두고 하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 서사시 의 주제인 트로이전쟁은 트로이라는 성읍국가의 왕자 파리스가 사신 행차를 가는 척하면서, 그를 빈객으로 접대한 스파르타 임금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와 정사를 벌인 뒤 헬레네와 왕궁의 보물을 훔쳐 도둑처럼 스파르타를 빠져나온 데서 비롯한다. 고대인의 입장에서는 파리스가 ‘주객 의리’라는 관습법을 어겨 빈객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이를 전쟁으로 처벌하는 것은 정의, 그리스어로 ‘디케’(dike)에 해당했다. 이 단어는 ‘정의’와 동시에 ‘정당한 복수’를 의미했는데, 당시 그리스인이 생각한 ‘정의로운 전쟁’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물론 ‘정당한 복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트로이의 수많은 비전투원이 비참하게 죽어도, 그리고 ‘정당한 복수’를 집행하는 메넬라오스 등이 트로이인을 상대로 각종 만행을 저지른다 해도 별로 문제될 게 없었다. 전쟁의 비참함은 당연하게 여겨졌고 중요한 것은 상대국을 ‘관습법 위반자’로 몰아 전쟁의 근사한 명분을 만들 수 있는가 여부였다.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평화?

그러면 오바마가 이야기한 ‘정의로운 전쟁’의 기준은 대체로 언제쯤 완비됐을까? 대체로 기원전 5~4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부터 전쟁 발발과 진행의 정당성에 대해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플라톤(기원전 428~348)은 에서 필요 없는 약탈전을 “사치를 염원하는 사심(邪心)에서 비롯한다”고 비판하고 이상적 국가에서는 군인들이 오랑캐를 상대로 정벌할 때도 약탈, 비전투원 살해와 노예화, 성폭행 등을 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록 ‘우리’가 ‘남’을 상대로 하는 전쟁이라 해도 전쟁이란 필요악일 뿐이고 각종 규칙에 따라 그 진행 방법이라도 규제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그때쯤 그리스 철학의 일각에서 생겼다고 봐야 한다. 동시대의 원시 유가(儒家) 철학도 ‘명분 있는 전쟁’의 규칙을 강화하는 쪽으로 발전돼갔다. 반란 진압이라든가 ‘중화를 괴롭히는 야만인’의 정벌 등은 ‘정의로운 전쟁’으로 받아들였지만 ‘민력(民力)을 고갈시키는 침략전’에는 원칙상 반대했다. 맹자(기원전 372~289)는 침략적 군주에 대해 “저들이 자기 백성의 농사철을 빼앗아 밭 갈고 김매어 그들의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게 하면 부모가 추위에 얼고 굶주리며 형제와 처자가 헤어져 흩어질 것이다”( ‘양혜왕’ 상:5)라고 하여 인정(仁政)을 베푸는 군주가 침략적 폭군을 쉽게 이길 수 있다는 데 자신감을 내비쳤다. 전쟁을 최후 수단으로 보고 반란자나 침략자에 대한 정벌 내지 방어전만 인정하려는 데서 맹자의 전쟁관은 오바마가 설파한 ‘정의로운 전쟁’의 논리와 꽤 상통한다. 그런데 이보다 오바마 전쟁론의 계보가 직접 거슬러 올라가는 원점은 키케로다. 위대한 웅변가인 그는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평화”라는 원칙부터 “전시에도 일반적 도덕률이 적용된다”는 원칙까지 세워 서양 사상사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출발시켰다고 봐야 한다.

그때까지 상대적으로 고립되었던 부족·종족·국가들이 지중해 문화권이나 중화 문화권 등 지역적 ‘세계’를 이루기 시작한 기원전 6~1세기에 적대국에도 보편적 윤리를 적용하는 전쟁론이 나타났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특수’에서 ‘보편’으로 가는 것은 당시 사상의 주된 흐름이었으며 이는 전쟁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자의 경구와 대북 응징론

플라톤과 키케로, 맹자 등이 전쟁에 ‘윤리’를 접목시켰다고 해서 과연 전쟁이 ‘인간의 얼굴’을 띠게 됐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주들의 ‘명분 찾기’ 노력이 간절해졌을 뿐이지 전쟁의 야만성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유가 철학과 플라톤, 키케로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역대 중국 왕조들도 로마제국도 ‘침략’전쟁을 밥 먹듯이 했다. 다만-특히 ‘명분’에 민감한 유교 문화권에서는- 침략이라는 듣기 나쁜 말 대신 정벌, 토벌 등으로 부르면서 “우리의 정벌로 변방 야만인들이 교화된다”고 전쟁을 포장했을 뿐이다. 사실, “아프간에 안정된 민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미군을 보냈다”는 오늘날 오바마의 주장도 이같은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전쟁을 벌이는 자의 수사(修辭)는 진화했지만, 아프간에서 지금 볼 수 있듯 전쟁의 실상은 여전히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통제 야욕, 비전투원의 무차별 살인, 폭력의 횡행일 뿐이다.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건 사실상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다. 지금 천안함 사태를 이용해 ‘대북 응징’을 외치는 극우들은 ”좋은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도구다.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기쁜 일이 아니다. 많은 이들의 죽음으로 얻은 전승은 슬픈 일일 뿐, 장례식으로 기념되어야 한다”는 고대 평화주의자 노자의 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
1. 〈Assyrian and Babylonian literature: selected translations〉 R.F.Harper, Harvard University Press, 1900
2. 〈The Historicity of the Patriarchal Narratives〉 Th. Thompson, Walter de Gruyter, 1974
3.“Divine Justice and Cosmic Order in Early Greek Epic”, 〈The Journal of Hellenic Studies〉, W. Allan, Vol. 126, 2006, pp.1~35
4. 〈The Ethics of War〉, Vol. 1, G.Reichberg and H.Syse (eds.), Blackwell Publishing,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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