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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이여, 불교가 그렇게 평화적인가



서구에선 비폭력을, 자국에선 살인을 부추긴 근대 불교
일제 침략전쟁 선동 등 국가주의와 결탁
등록 2010-04-22 17:49 수정 2020-05-03 04:26
구미 포교를 선구적으로 개척한 샤쿠 소엔이 주지를 맡았던 원각사. 샤쿠 소엔은 일본군 종군승려로 임명돼 만주의 전장에 나갔다. 한겨레 자료사진

구미 포교를 선구적으로 개척한 샤쿠 소엔이 주지를 맡았던 원각사. 샤쿠 소엔은 일본군 종군승려로 임명돼 만주의 전장에 나갔다. 한겨레 자료사진

비서구 종교 중에서 구미인에게 20세기 후반 이후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종교는 분명 불교일 것이다. 현재 미국에는 (주로 백인인) 비아시아계 불자가 100만 명에 이르는데, 그중 상당수는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고학력자다. 특히 문단에선, 일본에서 몇 년간 선수행에 몰두한 바 있는 20세기 미국의 최고 시인 게리 스나이더(1930년생)나 올해 서거하기 전까지 매일같이 선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20세기 미국의 최고 소설가 제롬 샐린저(1919~2010) 등의 창작 활동에서 불교적 코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내에 잘 알려진 베트남계 틱낫한(釋一行·1926년생)도 구미 불자를 기반으로 삼아 전세계적 활동을 전개했으며, 달라이라마가 거인 중국에 맞설 수 있는 배경도 티베트 불교에 대한 많은 구미인의 흠모다. 동양에 대한 구미인의 관습적 멸시 등을 염두에 두면 불가사의해 보이기도 하는 이 ‘서구의 불교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개인주의적 서구 지식인에게 ‘맞춰준’ 불교

어떻게 보면 서구 불교는 철저한 근대인인 서구 불자의 정신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울’이다. 즉 그들은 애당초 지녀온 가치라든가, 모색하려는 가치를 불교에 투영하면서 불교를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 과정에서 비서구 계통의 불교 지도자가 그들에게 성심껏 협조해왔다. 불교적 방편론에 근거해 서구인의 ‘근기’(根機)에 그 가르침을 맞춰보려는 불교 지도자는 서구 지식인에게 불교를 ‘듣기 좋은 이야기’로 설명하려 애썼다. 예를 들어 일본 승려 중에서 도미 포교를 선구적으로 개척한 샤쿠 소엔(釋宗演·1858~1919)은 1913년 미국인을 상대로 설법할 때 “열반은 바로 하나님에 해당되는 불교적 개념”이라면서 인과법을 믿는 불교야말로 “가장 과학적인 종교”라고 강조하는 한편, 윤회설의 의미를 부정하며 “단순히 일체중생의 상호연관성을 의미할 뿐”이라고 못박았다. 대다수가 ‘하나님’을 믿으며 과학을 맹신했던 자본주의 황금기 미국인에게 불교를 “진지하고 합리적·과학적인 종교”로 인식시키면서 전통적인 비합리적 요소를 제거한 셈이다. 마찬가지로, 서구 불자의 애독서인 (What the Buddha Taught·1959)를 내놓은 스리랑카 출신의 왈폴라 라후라(1907~97) 교수도 불교에 대해 “사상의 자유, 개인의 독립성, 관용의 종교”라고 하면서 불교의 집단적 의례나 윤회 신앙의 의미를 부정했으며 타 종교와의 갈등 역사가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샤쿠 소엔이나 왈폴라 라후라의 불교는, 자본주의사회의 소외와 탐욕, 소비문화에서 도피해 개인적 구도에 몰두한 개인주의적 서구 지식인에게 정확하게 ‘맞춰준’ 불교였다. 사막과 같은 산업사회 속에서 참선이나 독경을 하면서 개인적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정토왕생 기도나 전몰군인 위령제 등 불교의 개인주의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측면에 대한 이야기가 무슨 흥미를 북돋우겠는가.

불교를 서구인의 구미에 맞춰주는 과정에서 포교자들이 가장 공들여온 것은 그 비폭력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데다 베트남 침략 등 ‘외부’에서 자행한 무수한 학살에 대한 죄책감까지 안은 중심부 지식인에게 비폭력 이상으로 매력적인 주제가 있었겠는가. 전쟁의 참상을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생명체에 대해서 폭력을 쓰지 말고, 모든 생물을 그 어느 것이나 괴롭히지 말라”는 불교 초기 경전 의 고귀한 가르침이 얼마나 감동적이겠는가. 아니면 또 하나의 초기 경전인 의 이 불후의 말씀은 어떤가. “모든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폭력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자기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폭행하지 말라.”(一切皆懼死 莫不畏杖痛 恕己可爲譬 勿殺勿行杖) 서구인의 불교 취향은 상당 부분 바로 이와 같은 진리의 말씀을 보며 느낀 감회에서 왔다.

비폭력에 대한 구미인의 관심은 20세기 참혹한 역사 속에서 비싼 대가를 내고 얻은 교훈이라 할 수 있지만,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초기 불교의 원리·원칙이야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수행 차원에서 폭력을 멀리하고 자비를 널리 베풀라는 것이었지만, 과연 이 원리는 근현대 불교에서도 제대로 지켜졌는가? 기독교가 예수와 그 제자들의 평화주의를 배반하고 전쟁 옹호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지만, 과연 불교는 질적으로 달랐는가?

구미 포교 선구자 샤쿠 소엔, 종군승려로 활약

위에서 언급한 두 명의 구미 포교 선구자의 면면을 약간 연구해보기만 해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치 않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샤쿠 소엔이 1893년 처음 도미할 때부터 미국인 제자들에게 “전쟁 대신 평화적인 갈등 중재가 필요하다”고 가르친 건 사실이다. 그런데 마침 1904년 일본제국이 한반도와 만주를 놓고 러시아와 한바탕 붙었을 때, 그가 과연 평화적 갈등 중재를 설법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임제종(臨濟宗)이라는 일본 주요 종단의 주된 사찰인 원각사(圓覺寺) 주지를 맡았던 그는 정부에 의해 ‘종군승려’로 임명돼 만주 전장에 나아가 ‘군인정신 수양’에 도움이 된다 싶은 설법을 열심히 했다. 그 설법의 주된 내용은, 선수행이 가져다주는 무외(無畏·겁 없음)의 효능이 결국 천황을 위해 자기 인생을 홍모(鴻毛)처럼 버릴 수 있는 제국 군인 만들기에 크게 기여한다는 유의 이야기였다. 톨스토이가 그에게 같이 손잡고 반전투쟁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이 전쟁은 정의롭다”며 거부했다. 신생 제국에 속해 있던 샤쿠 소엔과 달리 가난한 탈식민지 국가의 지식인이던 왈폴라 라후라는 직접 전쟁 행위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도 불교 문화를 “스리랑카 민족문화의 진수”로 규정하고 ‘불교민족’인 싱할라족이 승려에 의해 정신적으로 지도돼야 한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비불교도인 타밀족 등의 배제를 사실상 정당화했다. 이와 같은 불교민족주의적 배제의 참혹한 결과는, 몇 개월 전 스리랑카 관군이 타밀족 무장 운동의 근거지를 초토화했을 때 여실히 볼 수 있었다.

샤쿠 소엔과 왈폴라 라후라의 언행은 우연이라기보다는 19세기 후반~20세기 불교사의 전체적 과정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서구 제국주의의 자극으로 동남아시아·중앙아시아·동아시아 등지에서 근대적 민족주의가 태동하자 전통종교인 불교가 민족주의 이념과 각양각색으로 결합되는 경우가 빈번히 나타났는데, 민족주의가 대개 정치적 폭력을 수반하는 만큼 불교도 폭력을 멀리하지 못했다.

물론 이 폭력이 어떤 경우에는 해방적 색채를 띠었다고도 볼 수 있다. 예컨대 영국 식민지이던 버마의 밀림지대에서 1930~31년 환속 승려인 사야 산의 지도 아래 민중 무장 반란이 일어났을 때, 승려야말로 봉기의 대오에 민중을 동원한 반란의 주도 세력이었다. 도시 중심의 평화적 독립운동도 승려가 많이 주도했지만, 영국인이라는 ‘불법(佛法)의 적’에게 폭력으로라도 저항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신념은 당시 버마 승가 공동체에서 넓게 공유됐다. 마찬가지로 1950년 중국의 침략 및 점거 이후 티베트 독립운동도 승려에 의해 주도됐으며 꼭 평화적이지만은 않았다. 1959년 라싸에서 무장 저항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곳에 있던 약 2만 명의 남녀 승려 가운데 대다수가 가담했다. 1950년대 동부 티베트에서 반중국 무장 유격대 활동을 벌인 승려 출신의 잠파 덴진에 따르면, “불법이 무너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이고 죽는 게 낫다”는 게 당시 승속의 통념이었다. 중국 군인을 죽인 뒤 그가 좋은 곳으로 윤회하게끔 위령제를 지내기까지 했던 티베트 유격대원들은 “불법을 지속하려면 불가피한 폭력도 정당하다”는 달라이라마의 가르침에 입각했다.

많은 서구인이 달라이라마를 ‘절대적 평화주의자’로 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환상에 불과하다. 4세기 이후의 주류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계급사회에서 주류화된 불교도 평화나 비폭력보다 호교, 호법 그리고 호국을 훨씬 더 우위에 둔다.

버마나 티베트의 경우에는 적어도 반식민주의적 저항이라는 대의가 있어 불교도의 ‘호교적 폭력’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식민지화를 피하거나 식민지배를 벗어난 신생 국가에서 불교가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기능해왔다는 것은 불교에 대한 우리 기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대동아 성전의 위대한 이상…”
일본 군인들에게 ‘천황을 위한 전사’를 가르쳤던 샤쿠 소엔, 스리랑카에서 불교 민족주의 전통을 강화시킨 왈폴라 라훌라, 중공 친정부 불교의 승려 거찬,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 학승 권상로(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일본 군인들에게 ‘천황을 위한 전사’를 가르쳤던 샤쿠 소엔, 스리랑카에서 불교 민족주의 전통을 강화시킨 왈폴라 라훌라, 중공 친정부 불교의 승려 거찬,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 학승 권상로(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대표적 사례는 물론 주류 불교와 천황제 국가가 혼연일체를 이룬 1870년대 초반 이후의 일본이다. 1873년 징병제가 도입되고 나서 승려도 원칙상 징병 대상이 됐지만, 징병되지 않는 승려까지도 침략전쟁이 터질 때마다 자진해 종군승려가 돼 일종의 ‘불교적 군목’ 노릇을 맡았다. 1904년 ‘기독교적 악마 국가’인 러시아와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일본 불교 각 종단에서 종군승려 파송 제안이 하도 쇄도해 군 당국이 아예 종군승려 수를 제한해야 할 지경이었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삼는 정토(淨土) 신종(新宗)이 사지로 끌려가게 된 일본 젊은이에게 “명예의 전사를 당하게 되면 틀림없이 정토왕생한다”는 내용의 위문장을 보냈을 때, 젊은이들이 이를 그대로 믿었을까? 군인, 특히 졸병들의 일기 자료를 보면 순국해서 정토왕생하고 싶은 마음보다 가족의 기도의 힘으로 어떻게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간절했다.

그러나 종군승려의 권위가 비교적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결국 풀뿌리 민중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정토신앙이 ‘하급 국민’을 ‘육탄’으로 만들려는 강도적 국가의 ‘정신 무기’가 된 셈이다. 제국 일본의 호국 불교를 그대로 베껴버린 식민지 조선의 친일 승려들도, 태평양전쟁 때 보살을 팔아 육탄을 만드는 작업에 열성적으로 나섰다.

“선과 악이란 염두(念頭·의식 세계)에서 의논할 것이지 행위에서 의논할 것이 아니다. 성현과 영웅들이 인류의 행복을 위해 부득불 살인을 하는데, 이것은 사람을 구할 마음으로 살인을 하는 것이니 그 마음은 사람을 이롭게 하는 데 있기에… (살인한다 해도) 나중에 나쁜 곳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대동아 성전(聖戰)의 위대한 이상에 조금도 틀림없는 견해다. 말하자면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소수를 죽인다는 일살다생(一殺多生)이다.”(권상로, ‘살생의 범위’, , 1943)

태평양전쟁 때 “기독교도인 미국인을 죽이는 것도 보살행”이라는 등 갖은 망언을 퍼부었던 자들이 나중에 한국전쟁 때 “공산 악마를 박멸”하는 것은 전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놀랍지 않다. 제국 일본이든 제국 미국의 후국인 대한민국이든 승려 집단의 기득권을 옹호할 국가가 ‘불살생’과 같은 도덕적 당위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는 게 그들에게는 통념이었다. 한국전쟁 시절 거찬(巨贊·1908~84) 등 중공의 친정부 승려도 잡지 이나 수많은 법회에서 “애국이 애교보다 우위”라면서 “일살다생의 정신으로 미제 침략자를 쳐부수기 위해” 스님에게까지 “진정한 사나이가 돼 자원입대하라”고 강권했다. 냉전의 양대 진영에서 불교가 사실상 똑같은 ‘총동원 무기’ 역할을 도맡은 셈이 된다. 구미 불자는 대개 초기 불교의 평화주의적 메시지에 초점을 맞춰왔지만, 오늘날 각국 불교 종단의 실정은 이 초기 평화주의적 메시지보다 차라리 중세 기독교의 ‘정의로운 전쟁’ 논리에 더 가까웠다.

의식 있는 보살·거사여, 일어나라

‘일살다생’과 같은 교묘한 논리로 지배자의 살육을 정당화하는 것은 불교가 현실적으로 자율성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번 ‘봉은사 사태’에서 보듯, ‘주류 불교’는 국가나 개별 정치인 등과 유착관계를 맺고 그 관계 속에서 현실적 번영의 길을 찾고 있다. 살인 기구인 군대에 군승을 보내면서 “포교의 황금어장인 군대를 활용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정교유착 논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국가와 손잡은 이상 ‘애국’을 부득불 인정해야 하고 애국을 인정한 이상 애국에 따르는 ‘살육’도 부득불 인정함으로써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과 완전히 배치되는 일살다생과 같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야 한다. 어떤 살육도 틀림없이 악업을 낳는다는 붓다의 가르침을 계급사회에서 그대로 설법·실천하자면 계급사회에 내재된 살육 논리와 정면 충돌할 각오를 해야 하는데, 이는 주류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호국’ 따위의 반불교적 구호의 주술에서 벗어나자면 의식 있는 보살·거사의 맹성과 겁 없는 맹활약이 필요할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참고 문헌
1. 〈The Making of Buddhist Modernism〉 David McMahan,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2. 〈Buddhism Betrayed: Religion, Politics and Violence in Sri Lanka〉 Stanley Jeyaraja Tambiah,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3. 〈Japanese Society at War: Death, Memory and the Russo-Japanese War〉 Naoko Shimazu,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9, pp.94∼97
4. 〈Buddhist Warfare〉 Michael Jerryson et. al, (e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pp.13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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