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충영양지원프로그램(SNAP·스냅) 전용직불카드(EBT 카드)로 식품을 살 수 있음을 알리는 광고물. 출처 : 미국 BBC 방송 화면 갈무리
쌀이 남으니 재배면적을 줄이라 한다. 대신 논에 콩도 심어보고 가루쌀도 파종해보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들 입맛 따라 낙점된 작물이 달라질 뿐 쌀 ‘생산’ 조절 중심 정책 기조는 바뀐 적이 없다. 서민경제를 이유로 쌀을 비롯한 농산물의 낮은 가격을 유지하려고 온갖 정책수단을 동원한다. 애초에 성공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수요(시장)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쌀 대체 작물’(2022~2024년 기준 18만t)이 창고에서 쌓여 있는 이유다.
‘수요’ 쪽에서 바라보면 다른 질문이 가능하다. 모든 국민이 건강한 식생활 권리와 그에 걸맞은 구매 능력을 보장받고 있을까. 저소득층은 여전히 식량 불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4년 서울시가 낸 ‘서울시민 식생활 실태 분석과 식생활 정책 방향’ 자료를 보면, 소득 하위 20%(1분위) 가구의 14.6%가 안정적으로 식품을 확보하지 못했다. 1분위 가구 구성원 중 특히 노인은 43.7%, 청소년은 19.5%가 심각한 영양섭취 부족 상태인 것으로 조사됐다.
한겨레21은 미국의 보충영양지원프로그램(SNAP·스냅) 사례를 통해 한국에서 어떻게 쌀 소비 수요를 창출하면서 동시에 저소득층을 지원할 수 있는지 살펴봤다.

크레이그 군더슨 미국 베일러대학 교수(경제학)가 2025년 11월4일 한겨레21과 한 화상 인터뷰에서 스냅이 정착됨에 따라 미국 사회에 생긴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미국에선 2025년 10월1일부터 이어진 정부 셧다운 사태(연방 예산안 합의 실패에 따른 연방정부 일시 정지)로 공화당과 민주당이 스냅 중단 여부를 놓고 격돌하고 있다. 스냅은 미국의 대표적인 농산물 수요 창출 정책인 ‘푸드스탬프’에서 시작한 제도다. 지금은 한 해 998억달러(2024년·약 144조원)가 투입되는,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저소득층 지원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소득 빈곤선 130%(2024년 4명 가족 기준 월 소득 2500달러 이하)인 미국 시민·영주권자가 대상인데, 매달 4170만 명이 1명당 평균 187.2달러(약 27만원)를 지원받는다.
푸드스탬프 프로그램은 1939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 과잉 생산된 농산물 문제와 도시 저소득층 식량 부족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탄생했다. 저소득층 지원 대상자들이 정부에서 주황색 종이쿠폰을 1달러에 구매하면, 1.5달러짜리 농산물로 바꿀 수 있는 파란색 스탬프를 찍어줬다. 농산물 생산 과잉 문제를 재배면적 감축 등 ‘뺄셈 정책’으로 풀어낸 것이 아니라 수요를 찾아 늘린 ‘덧셈 정책’으로 극복했다. 뉴욕 등 일부 지역에서 시행됐던 푸드스탬프는 1974년 전국으로 확대됐다. 1990년대 종이 쿠폰 방식은 전용직불카드(EBT 카드) 방식으로 개편됐고, 낙인감을 준다는 지적에 2008년 이름도 스냅으로 바뀌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스냅을 ‘낭비·부정·남용’ 프로그램이라 공격하며 예산 삭감 법안을 통과(2025년 5월·10년간 2300만달러 규모 삭감)시킨 것처럼, 86년간 스냅을 둘러싼 논란도 이어졌지만 효과에 대한 검증과 경험도 축적됐다.

“사람들이 ‘음식 먹을 권리’를 ‘투표할 권리’처럼 기본적으로 보장해야 할 권리로 생각하게 됐다는 점입니다.”
크레이그 군더슨 미국 베일러대학 교수(경제학)는 2025년 11월4일 한겨레21과 한 화상 인터뷰에서 스냅이 정착됨에 따라 미국 사회에 생긴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군더슨 교수는 30년간 미국 농무부 경제연구소와 미국 식량지원 협회 등에서 식량 불안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고 스냅 등 식량지원 프로그램의 효과를 평가해온 경제학자다. 그는 “스냅의 주된 목적은 식량 불안정성을 완화하는 것”이라며 “그간 연구해보니 식량 불안을 줄이고 싶으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급을 늘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직접 음식을 살 수 있는 자원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농무부도 ‘2024년 스냅 연례 보고서’ 결론에서 “‘식량안보’란 모든 사람이 언제나 건강하고 활발한 삶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식량에 접근할 수 있는 상태이며 취약계층 가구의 복지 수준을 보여주는 주요 지표”라며 “스냅은 여러 방식으로 식량 안보를 개선한다. 스냅 지원 후 대상 가구의 식량안보가 개선됐다. 지원금이 인상되면 식량 불안이 줄어들었지만 삭감됐을 땐 식료품 지출이 줄고 식량 불안이 심각해졌다”고 밝혔다.
이에 10월26일 트럼프 행정부가 셧다운을 이유로 11월1일부터 스냅 지급을 중단한다고 예고하자, 민주당 소속 주지사가 있는 25개 주는 소송을 제기하며 맞섰고, 비상 예비기금을 사용해서라도 스냅을 지속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원의 이런 판결은 ‘스냅은 곧 권리’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스냅의 사회·경제적 파급효과는 다양하게 제시된다. 정책연구기관 브루킹스연구소는 2016년 6월 스냅 구매력(지원금)이 10% 늘어나면 저소득층 아동들이 건강검진을 받을 가능성이 8.1% 증가하고, 아동 식량 불안은 21.8% 줄어든다고 분석했다. 또 농무부는 2019년 7월 ‘스냅과 경제' 보고서에서 스냅에 10억달러를 추가 투입할 때마다 국민총생산은 15억4천달러가 늘어나고 1만3560개의 일자리가 생겨났다고 밝혔다. 농업 분야 고용·생산·소득이 약 50% 증가하는 효과도 생겨난다고 밝혔다. 특정 계층에 대한 ‘퍼주기’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제도라는 얘기다. 그 밖에도 의료비 지출이 25~35% 줄고(2017년 미국의사협회), 아이들의 성인기 비만·심장병·당뇨 발생 위험이 5~12% 감소하며(2018년 전미경제연구소), 노인층 입원율이 14% 감소(2022년 예산정책우선순위센터)했다.
스테퍼니 존슨 전국식료품협회 부사장은 2025년 7월19일치 폴리티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객(소비자)에게 직접 전달되는 자금(스냅 지원금)이 줄면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 수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예산을 극도로 조절해야 한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 식료품점이 사라질 테고, 그 경제적 영향은 단순히 해당 매장의 수익 손실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보충영양지원프로그램(SNAP·스냅) 중단에 대응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출처 : 미국 CBS 방송 화면 갈무리
한국도 스냅을 본떠 농산물바우처 제도를 2018년 시범 도입했다. 저소득층(중위소득 32% 이하 가구 중 임산부·영유아 등이 있는 가구)이 직불카드로 식품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제도 취지는 스냅과 닮았다. 다만 구매 대상 식품을 국산 농산물로 한정한 것은 차이점이다. 스냅은 술·약품 등 일부를 제외한 식품 대부분을 살 수 있도록 허용한다. 농촌경제연구소는 ‘2024년 농산물바우처 시범사업 효과분석’을 통해 “13개 영양소(비타민B1·B2, 단백질, 칼슘 등)의 섭취 수준이 5.6% 개선됐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2025년 본사업 시행을 앞두고 예산 부족 등 이유로 사업은 대폭 수정됐다. 애초 예비타당성조사에서 본사업 시행시 필요한 예산은 1조2765억원, 지원 대상은 214만 명으로 산정됐지만 실제 잡힌 본사업 예산은 381억원, 3%에 불과했다. 시범사업 때보다 지원금은 늘었지만(4명 가구 기준 최대 8만→10만원, 지원 기간 최대 6→10개월), 지원 대상은 축소(9만7천→8만7천 명)됐다.
상황을 설명하자 군더슨 교수는 “10만원이라면 이틀치 식비밖에 안 된다. (효과를 내기엔) 너무 적은 금액”이라고 반응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식량 접근성 문제가 중요하다면, 넓은 대상에 대해 지원금을 최대한 늘려서 지급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정책적 접근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최슬기 서울시립대 교수(도시보건학)는 “사실 미국에는 우리나라와 같은 기초생활수급 보장제도가 없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어렵다. 하지만 기존 제도에도 불구하고 현재 식비 수준으로는 저소득층이 건강한 식생활을 하기에 부족하다는 건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농식품바우처 사업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50%씩 재정을 부담하도록 하는 등 설계상 한계도 지적된다. 미국의 스냅은 연방정부가 100% 재정을 부담한다. 스냅이 필요한 대상을 선정하고, 건강하게 장 보는 법 등을 교육하는 등의 행정서비스 비용에 대해선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50%씩 부담한다.
임정빈 서울대 교수(농경제사회학)는 “취약계층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 지역 재정이 취약하다는 의미인데 중앙과 지방에 동등하게 부담하라고 하는 건 잘못된 접근”이라며 “국민 영양·보건의 책임이 중앙정부 몫이라는 개념도 제대로 성립돼 있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군더슨 교수는 “스냅 재정은 연방정부가 100% 부담한다. 식량 불안을 줄이는 일은 국가의 역할이라는 인식 때문”이라며 “주정부 입장에선 사실상 ‘무상 재정 지원’(free federal money·추가적인 재정 지원)이 되고,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임 교수는 “‘농식품부에서 복지정책을 왜 해?’ ‘농민 퍼주기 아니냐’ 등과 같이 농업을 ‘생산’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정치권·공직사회와 국민의 뿌리 깊은 인식”을 농산물바우처 축소 원인으로 꼽았다. 그는 사과값이 크게 올랐던 2024년 4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기자간담회에서 “사과·배 수입을 금지하는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발언했던 논란도 거론했다. 임 교수는 “어떤 나라가 검역 주권까지 포기하면서 농산물을 싸게 먹어야 한다고 하나. 수요 쪽 접근 없이 농산물 가격이나 소비자물가를 공급만으로 빨리 해결하려고 하는 잘못된 사회 인식이 굳어졌기 때문”이라며 “공급(생산)만 보면 풀리지 않았던 농업 관련 각종 문제도, 수요 정책을 함께 펴나가면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국방부, 곽종근 ‘해임’…여인형·이진우·고현석 ‘파면’

김병기 “여자 2명이거든”…배우자 ‘법카 유용’ 식당 CCTV 은폐 녹취

주한미군사령관 “한국, 한반도 위협 대응 존재 아냐…동북아 중심축”
![윤석열,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면 [아침햇발] 윤석열,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면 [아침햇발]](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28/53_17668955612172_20251228500976.jpg)
윤석열,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면 [아침햇발]

김병기 “식당에 CCTV 제공 말라고 입단속”…배우자 ‘법카 유용’ 은폐 정황
![이 대통령 지지율 53.2%…대구·경북서 8.9%p 급락 [리얼미터] 이 대통령 지지율 53.2%…대구·경북서 8.9%p 급락 [리얼미터]](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29/53_17669655530114_20251229500278.jpg)
이 대통령 지지율 53.2%…대구·경북서 8.9%p 급락 [리얼미터]

이혜훈 파격 발탁 왜?…“국힘 극단세력 고립, 정치지형 흔들 것”
![[영상] 서울대 “직접 보시라”…3D 종묘 앞 고층빌딩 시뮬레이션 공개 [영상] 서울대 “직접 보시라”…3D 종묘 앞 고층빌딩 시뮬레이션 공개](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29/53_17669859940528_20251229501391.jpg)
[영상] 서울대 “직접 보시라”…3D 종묘 앞 고층빌딩 시뮬레이션 공개

추경호, 내란재판 중 출마 선언 …“대구가 신분 세탁소인가”

정규재 “속좁은 국힘, 이혜훈 축하해야…그러다 전한길만 남는다”
















![[단독] 고용노동부 용역보고서 입수 “심야배송 택배기사 혈압 위험 확인” [단독] 고용노동부 용역보고서 입수 “심야배송 택배기사 혈압 위험 확인”](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29/53_17669898709371_17669898590944_20251229502156.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