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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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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 같은 재벌 총수는 꿈인가


동반성장과 국세청ㆍ검찰 조사로 갈등하는 MB와 재계…
기업이익보다 국가경제 우선하는 재계 리더 절실
등록 2011-04-22 14:54 수정 2020-05-03 04:26

이명박 대통령(MB)과 재벌 관계가 심상치 않다. 국세청의 삼성 3개 계열사에 대한 세무조사에 이어 검찰이 금호석유화학에 대해 비자금 조성 혐의로 전격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검찰의 오리온그룹 비자금 수사와 국세청의 SK그룹 세무조사도 계속 진행 중이다.

재벌 길들이기 나선 MB?

정부는 ‘대기업 길들이기’ 아니냐는 지적에 펄쩍 뛰지만, 재계에는 이들 사안을 단순하게 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 삼성 세무조사는 겉으론 5년 만에 한 번씩 실시하는 정기 조사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이 낙제에 가깝다는 뉘앙스의 발언으로 인해 세무조사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된 이건희 삼성 회장은 ‘삼성 압박용’ 아니냐는 항간의 의혹을 직접 부인했다. 하지만 이미 지난 2월부터 삼성 주변에서는 국세청의 움직임과 관련해 심상치 않은 조짐이 포착됐다. 내용은 국세청이 삼성 핵심 계열사들을 겨냥하고 있어 삼성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SK 세무조사도 형식은 정기 조사다. 하지만 다른 정기 세무조사가 통상 3~4개월이면 끝나는 것과 달리 SK 조사는 지난해 11월 이후 6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그룹 안에서는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협력사와의 거래를 통한 그룹 최고경영자의 비자금 조성 혐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최근 상황을 대통령의 임기 후반 레임덕을 차단하려는 ‘재벌 길들이기’ 차원으로 대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역대 대통령들이 임기 후반 사정당국을 동원해 재벌을 손봤던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더구나 이 대통령은 기업의 생리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재벌들은 국세청, 검찰, 공정거래위원회를 동원해 기업들의 급소를 짚는 현 정부의 현란한 솜씨에 혀를 내두른다. 적자를 감수해서라도 정부의 물가안정 노력에 성의표시를 하라는 지식경제부 장관의 반시장적 발언에 분노하던 정유사들은 불과 며칠 뒤 휘발유값을 내리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 국세청이 삼성 3개 계열사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4월9일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위해 런던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서울 김포국제공항에서 삼성 계열사 세무조사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정기적인 것이라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

» 국세청이 삼성 3개 계열사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지난 4월9일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위해 런던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서울 김포국제공항에서 삼성 계열사 세무조사와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정기적인 것이라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연합

정권 출범 초기에는 정치권력의 서슬 퍼런 기세에 재벌이 납작 엎드리기에 바쁜 게 일반적이다. 노무현 정부는 재벌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2002년 말 대선에서 당선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임원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 인수위 정책이 사회주의 같다고 말한 뒤 당사자는 물론 전경련 상근부회장까지 책임을 지고 쫓겨났다. 하지만 2007년 말 MB가 대선에서 승리했을 때의 풍경은 전혀 딴판이었다. MB와 재벌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집권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협공하며 대선 승리를 쟁취한 뒤 좌파 정권 종식을 축하하는 샴페인을 함께 터트렸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MB와 재벌 간 갈등이라는 기존의 낡은 틀로만 바라보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

백년을 해로할 것 같던 부부가 헤어질 때는 나름의 이유가 있듯이, MB와 재벌 간 갈등도 마찬가지다. MB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려는 정부의 노력과 기대에 비해 재벌의 정부 정책에 대한 호응이 낮은 것에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동안 고환율과 저금리, 감세 혜택을 누리고도 정부가 요청한 고용·투자 확대에 미온적이고,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이나 물가안정 노력 등 사회적 책임 이행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벌은 친기업,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걸었던 정부가 친서민, 공정사회, 동반성장, 물가안정을 내걸고 기업들의 팔목을 비트는 것은 약속 위반이라고 흥분한다. 재계 인사들은 MB에 대해 “오른쪽 깜박이를 켜놓고 좌회전한다”는 노골적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예고된 MB노믹스의 실패

MB는 재벌이 협조를 안 한다고 탓하지만, MB노믹스의 실패는 처음부터 예고됐던 것이라 할 수 있다. MB노믹스의 핵심은 규제완화, 감세, 고환율, 저금리 등을 통해 재벌이 경영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를 창출하면 그 혜택이 서민이나 중소기업에도 돌아간다는 대기업 위주의 성장 전략이다. MB노믹스의 실패가 예정됐던 것은 이런 성장 전략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치명적 오류 때문이다.

첫째는 경제원칙상의 오류다. 시장에는 기업, 소비자, 정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공존한다. 이들 간에는 종종 이해관계가 상충한다. 한 예로 기업들이 담합이나 불공정행위를 통해 제품 가격을 부당하게 올리면 소비자는 피해를 본다. 만약 정부가 친기업을 내걸고, 이런 불법행위를 눈감아주면 소비자 피해가 지속된다. 친기업이 결국 반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기업도 모두 같은 편이 아니다. 대기업이 중소 협력사들을 상대로 무리한 납품단가 인하, 원자재가격 인상분의 납품단가 미반영, 기술 탈취 등 불공정행위를 지속한다는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만약 정부가 이런 대기업들을 봐주면, 중소기업의 피해는 지속된다. 친대기업이 반중소기업이 되는 것이다. MB는 친기업을 내걸었지만 사실상 친대기업·친재벌이었고, 이는 곧 반중소기업·반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정부는 시장경제에서 공정한 규칙을 제정하고, 이를 공정하게 집행하는 심판 노릇을 한다. 정부가 대기업에 편향된 정책을 쓰면 시장은 망가지고 공정경쟁이 이뤄지지 않는다. MB는 친대기업과 친시장을 혼동했다.

둘째로 MB노믹스는 대기업 위주 성장 전략의 근거가 되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가 더 이상 효율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한국 경제의 구조적 변화를 간과했다.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대기업의 적하효과가 어느 정도는 작동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대기업의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그 혜택이 나머지 중소기업과 영세상인, 일반 국민에게 제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재벌의 고용유발계수(매출액 10억원당 종업원 수)가 줄고, 매출액 대비 투자 비중이 떨어지고, 유효법인세율(세전 순이익 대비 법인세 부담액)이 낮아지는 것은 재벌의 국가경제 기여도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MB가 친서민, 공정사회, 동반성장으로 정책 방향을 선회한 것은 친기업을 고수하다가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유권자의 표를 더이상 얻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지만, 한국 경제와 국민을 위해서는 뒤늦게나마 다행한 일이다. 문제는 MB의 정책 선회가 확고하지 못하고, 기존 MB노믹스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최근 법인세 추가 인하 방침을 재확인한 사실이 대표적 예다. 또 경제위기 때 지나치게 풀린 유동성을 회수하는 출구전략의 필요성이 제기된 지 오래인데 정부는 여전히 금리 인상에 소극적이다.

재벌은 MB가 친대기업 약속을 저버렸다고 탓하기에 앞서, 무엇이 MB를 변하게 만들었는가를 진지하게 헤아릴 필요가 있다. 재벌들은 설령 양극화 심화가 자기네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양극화 심화를 방치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양극화 심화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사회에 넘쳐나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유로운 시장을 부정하는 목소리만 더욱 커질 것이다. 재벌들이 설령 친서민과 동반성장 정책에 협조를 요청하는 MB 정부를 이겨도 별 소용이 없다.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는 한 다음에 누가 정권을 잡아도 또다시 재벌 개혁의 기치를 들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벌 스스로 성장 과실이 중소기업과 국민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기업들의 필수가 된 고객만족경영은 고객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업을 위한 것이다. 양극화 해소는 국민을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재벌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증여세 폐지 반대한 워런 버핏

그런 점에서 한국에는 진정한 재계 리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존경받는 기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일본 정치의 미래를 위해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신념으로 1980년 ‘마쓰시타 정경숙’을 설립했다. 부시 정부가 상속 증여세 폐지를 추진하자 워런 버핏 등 미국의 부자들은 반대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한국에도 마쓰시타나 워런 버핏처럼 개인이나 기업의 작은 이익이 아니라 국가경제와 나라의 큰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재계 리더가 절실하다. 감세를 추진하는 대통령한테 세금을 그대로 내겠다고 당당히 말하고, 대기업의 막대한 이익 중 일부를 협력사에 나누자는 초과이익공유제의 취지에 공감한다고 먼저 말하는 재계 리더가 필요하다. 우리가 이런 재계 리더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도 꿈일까?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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