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임시국회에서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추진대책을 구체화하기 위한 하도급법 개정안 처리를 둘러싸고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흥미로운 것은 치열한 신경전의 주 전선이 여당-야당이 아니라 정부-여당이라는 점이다.
여당 의원들의 잇따른 반기
정부는 지난해 9월29일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추진대책을 발표한 뒤 핵심 내용을 담은 하도급법 개정안을 한나라당의 허태열 의원 이름으로 발의했다. 현재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소위에 계류돼 있는 ‘허태열 안’의 핵심 내용은 중소기업의 피해 예방과 신속하고 용이한 권리구제 방안들이다. 그 핵심은 중소기업협동조합에 납품단가 조정협의 신청권 부여, 하도급법 적용범위 확대로 중소 수급사업자 보호 강화, 하도급 대금 부당 감액의 입증 책임을 대기업으로 전환하고 감액사유 서면교부 의무화, 협력사 기술자료 탈취·유용 행위에 대해 대기업에 고의·과실 입증 책임 부여 등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중반 ‘공정사회’ ‘친서민’을 핵심 국정과제로 내걸고 동반성장 정책을 진두지휘해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 데 일정 성과를 거두었다. 공정위는 그 연장선에서 하도급법 개정안 처리도 무난할 것으로 낙관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다. 야당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당 의원들까지 사실상 정부 안이라고 할 수 있는 ‘허태열 안’만으로는 동반성장 정책의 실효성이 없다고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여당 의원 중 상당수는 납품단가 조정협의제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조합에 조정신청권은 물론 협상권까지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소기업들은 조합에 납품단가 협상권을 주면 대기업과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는 혁명적 조처가 될 것이라고 반기는 이가 적잖다. 한나라당 서민경제특위 안이라고 할 수 있는 김기현 의원 안과 민주당 이성남 의원 안이 협상권 부여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민주당의 박선숙 의원 안과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안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협력사의 납품단가를 원자재 가격 변동에 맞춰 조정하는 ‘납품단가 연동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자료 탈취·유용 행위에 대해서도 손해액의 3배를 물리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다. 한나라당 김기현 안은 이를 담고 있고, 민주당 박선숙 안은 대기업의 불공정 하도급행위 전반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적용하자는 좀더 포괄적 내용을 포함한다.
공정위는 수차례 국회 정무위 소속 여당 의원들과 협의를 갖고 설득 노력을 폈다. 그러나 결과는 무위에 그쳤다. 특히 지난 2월17일에는 당정협의가 열렸으나,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한나라당 서민경제특위 위원장인 홍준표 최고위원은 기자에게 “납품단가 협상권과 3배 손해배상제 도입은 서민을 위해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이라고 완강하게 말했다. 정부 쪽에서는 “내년 총선을 앞둔 의원들이 표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 같다”는 불만이 나온다. 최근 상황을 청와대의 힘이 예전만 못한 것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정권 초였다면 대통령이 직접 주도한 동반성장 정책을 담은 법 개정안을 놓고 여당 의원들이 지금처럼 강하게 저지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한 여당 의원은 “이번 사안은 대통령의 레임덕 때문이 아니라 원칙에 관한 문제”라고 말했다.
설득력 떨어지는 정부 논리정부로서는 큰 당혹감에 빠졌다. 2월 임시국회에서 하도급법 개정안 처리에 실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총력전을 폈던 동반성장 정책이 발표된 지 6개월이 지나도록 법제도를 마련 못해 공중에 붕 뜨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당장 임시국회 일정도 빠듯하다. 지난 3월3일 열린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에서도 합의점 도출에 실패했다. 오는 10일 속개하기로 한 법안심사소위에서도 결론이 안 나면, 2월 임시국회 처리는 사실상 물 건너갈 판이다.
한나라당의 조문환 의원은 “공정위가 보수적 입장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야 의원들 사이에서는 공정위의 경직된 태도가 청와대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청와대가 대기업의 반발을 의식해 여야 합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고집을 부린다면 공정위로서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실제 공정위는 3대 쟁점에 대한 기존 반대론을 되풀이하고 있다. 조합에 대한 납품단가 협상권 부여는 법으로 금지된 카르텔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또 납품단가 연동제는 원자재 종류나 해당 업체가 많고 원가 구성비나 구입 가격 등이 다양해 원가 상승분 계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시행 방식을 결정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근본적으로 시장경제의 근간인 계약자유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말도 곁들인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실손해 배상 원칙인 국내법 체계와 상충된다는 종전 주장을 역시 되풀이한다.
하지만 정부의 반대론 중에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도 적잖다. 한 예로 조합에 납품단가 협상권을 부여하면 대기업들이 부품 구입처를 해외로 돌리거나 내부에서 생산해 중소기업의 생산 물량이 오히려 줄어드는 역효과가 날 수 있고, 중소기업들의 기술이나 경영혁신을 통한 원가절감 유인이 약화되리라고 걱정하는 것은 대기업들의 협박(?)을 지나치게 의식한 측면이 크다. 실제 당정협의에 업계 대표로 참석했던 삼성전자의 한 고위 임원은 “현재 부품의 해외 아웃소싱 비율이 80%인데, 납품단가 협상권 부여시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대기업이 기술이나 경영혁신을 등한시하는 중소기업을 그냥 두고 볼 리 만무하고, 납품단가가 지금보다 오르면 해외 아웃소싱 비율이 일부 올라갈 수 있지만 부품 구입처 전환비용과 운송비용, 국내외 기술력 격차 등으로 인해 국내 협력사와의 거래 물량이 대폭 줄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을 편다. 오히려 협상권을 줘도 수요독점적 대기업과 대등한 협상력을 갖는 것이 여전히 쉽지 않으리라는 한계론도 적잖이 있다.
협상권·손해배상제 등 도입해야
정부와 국회로서는 하도급법 개정안 처리와 관련해 일종의 선택 기로에 섰다. 일부 양보를 통해 조속한 법안 처리를 모색할 것이냐, 아니면 법안 처리 지연을 각오하면서 기존 안을 고수할 것이냐의 사이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현재 분위기로 보면 국회의 양보는 쉽지 않아 보인다. 여야가 사실상 하도급법 개정안과 관련해 합의안까지 도출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박선숙 의원은 “정작 여야 의원들은 납품단가 협상권 도입과 대기업 기술자료 탈취·유용에 대한 3배 손해배상제 도입으로 의견접근을 보았는데,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홍준표 의원도 “시간에 쫓겨 실효성 없는 법안을 만들기보다는 시간이 좀더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면서 “이번에 안 되면 4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면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경제개혁연대도 한번 하도급법을 개정하면 최소 4~5년은 시행될 공산이 높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공정위 간부는 “법안 처리가 지연되면 대기업만 좋은 일 시켜주는 것 아니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실제 대기업들로서는 대통령의 독려로 마지못해 동반성장 정책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해온 터라 법안 처리가 늦어질수록 쾌재를 부를 가능성이 높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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