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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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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가(家)의 치킨게임



위험부담 안고 현대건설 인수전 벌이는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

기업 인수 넘어 가문 정통성 둘러싼 공방전 양상
등록 2010-10-26 16:26 수정 2020-05-03 04:26
≫ 현대건설 인수전을 벌이는 현대·기아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왼쪽)과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 사적으로는 시형과 제수 사이인 두 사람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창업한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놓고도 대립하고 있다.한겨레 김태형

≫ 현대건설 인수전을 벌이는 현대·기아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왼쪽)과 현대그룹의 현정은 회장. 사적으로는 시형과 제수 사이인 두 사람은 정주영 명예회장이 창업한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놓고도 대립하고 있다.한겨레 김태형

“현대건설을 인수해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라.”(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현대건설 인수는 절대적 과제다.”(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의 2파전이 뜨겁다. 현대그룹은 명분론을, 현대차는 자금력 등 사업능력 우위론을 내세운다.

명분 vs 능력, 치킨게임

“현대건설, 현대그룹이 지키겠습니다.”(9월21일) “세계 1위의 자동차 기업을 기대합니다.”(10월4일) “(현대·기아차는) 현대건설을 인수할 여력이나 계획이 없다.”(10월18일) 현대그룹이 잇달아 선보인 도발적 광고들이다. 현대건설은 원래 임자인 현대그룹이 되찾아갈 테니, 현대차는 기존 사업이나 잘하라는 직격탄이다. 덩치가 10배나 큰 상대를 만났을 때는 직접 힘으로 맞서기보다 홍보전을 펴는 게 유리한 법이다. 현대차그룹은 끓어오르는 당혹감과 분노를 누르고, 향후 10년간 10조원을 현대건설에 투자해 ‘글로벌 고부가가치 종합 엔지니어링 기업’으로 육성한다는 장밋빛 청사진으로 맞섰다. 강점인 자금동원력과 사업능력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차별화 전략이다.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 간의 인수전은 전형적인 치킨게임이다. 제임스 딘이 주연한 1955년 영화 을 보면 젊은이들의 자동차 게임 장면이 나온다. 도로 양쪽에서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하다가 충돌 직전에 먼저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다.

현대그룹 안에서는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좋고, 실패해도 잃을 게 없다”는 극단론이 들린다. 현대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현대상선 지분을 8.3% 보유한 현대건설이 현대차그룹에 넘어가면, 범현대가의 현대상선 지분은 모두 40%에 육박한다. 현정은 회장 쪽의 지분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현대차그룹이 경영권까지 쉽사리 위협하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힘센 시형(남편의 형)이 힘없는 제수(동생의 부인)의 팔을 비트는 모양이 될 것”이라며 “여론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말했다. 일견 수긍이 가는 얘기다. 하지만 현대차가 당장은 움직이지 않더라도 현대상선 지분을 보유한 채 장기전에 들어가면 답답한 것은 현대그룹 쪽이 된다.

현대그룹이 현대차그룹과 소모전을 벌일 여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현대그룹은 2009년에 부채비율이 급증하고 매출은 급감했다. 또 1조670억원의 막대한 적자까지 기록했다. 올 들어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의 실적이 빠르게 회복되며 최악의 상황은 넘기고 있지만 해운 경기가 나빠지면 다시 그룹 전체가 위기에 몰린다. 현 회장으로서는 그룹의 몸집을 늘리기보다 경영실적과 사업구조 개선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상황이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에 대비해 마련한 자금은 예상금액 4조원 중에서 1조5천억원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컨소시엄 파트너인 독일계 ‘M+W그룹’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 현재까지 홍보전으로 신문과 텔레비전 광고비에 퍼부은 돈만 30억원이 넘는다.

현 회장의 명분론도 약하다. 현대건설과의 연고권을 주장하지만, 경영 부실의 책임이 있는 기업은 오히려 인수 후보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모럴해저드’ 논리도 가능하다. 현대그룹이 내세우는 고 정몽헌 회장의 사재 출연액 4400억원에 대해서도 과장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대(現代)가 아니라 현대(玄代)”

현대차그룹도 유리한 고지에 있다고 하지만 위험부담이 전혀 없는 게 아니다. 현대그룹과의 과열경쟁은 결국 인수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향후 경영 부담으로 돌아온다.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이 11조원을 넘을 정도로 당장은 여유가 있어도, 앞으로 자동차 해외공장과 고로 확장에 투자할 자금 부담이 만만치 않다. 금호의 붕괴도 결국은 무리한 대우건설 인수가 결정적 원인이 되어, ‘승자의 저주’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해외에서도 비판론이 제기된다. 은 “현대건설은 자동차 사업과 연관성이 높지 않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현대그룹에서는 현대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가 정의선 부회장으로의 3세 승계를 위한 포석이라고 흘린다. 이명박 대통령이 실소유자라는 의혹이 일었던 다스가 현대차의 협력업체인 점을 들어 현대차와 청와대 간의 사전 밀약설까지 돌고 있다. ‘왕자의 난’ ‘시숙과 조카며느리 분쟁’에 이어 다시 ‘시형과 제수의 갈등’이라는 골육상쟁을 재현하는 것도 큰 부담이다.

양쪽이 이성적이라면 서로 위험부담이 큰 치킨게임을 피하기 위해 타협책을 모색하는 것이 순리다. 현대그룹으로서는 현대상선 등 그룹 경영권 안정이 목적이라면 현대건설은 양보하되 현대상선 주식만 확보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현대차그룹도 현대건설이 목적이고 현대그룹의 경영권에 욕심이 없다면 현대상선 지분 처리에 대해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양쪽 분위기는 모두 아니다. 타협론을 얘기하는 사람은 배신자로 낙인찍힐 정도로 강경 일변도다.

정몽구 회장과 현정은 회장이 현대건설에 집착하는 속내는 무엇일까?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인사들은 공통적으로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둘러싼 갈등이라고 말한다. 현 회장은 시아버지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생전에 그룹을 삼등분해 자동차는 정몽구 회장에게, 중공업은 정몽준 고문에게, 그룹의 모태인 건설과 그룹 회장직은 남편인 정몽헌 회장에게 나눠주었으니, 건설을 다시 찾아오는 것은 창업자와 남편의 유업을 잇는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실상 창업자를 잇는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주장으로도 비친다.

현대차, 현대중공업 등 형제그룹과 KCC 등 사촌그룹들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다. 현대차그룹의 한 관계자는 “현 회장이 왕회장(정주영 명예회장)을 자꾸 거론하는데, 생전에 왕회장은 며느리가 경영에 나서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다”면서 “현 회장은 여왕병에 걸린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런 자살로 현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선 것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을까? 또 다른 현대차그룹 임원은 “고 정몽헌 회장은 유서에서 김윤규 사장에게 그룹 경영을 챙기라고 지시했는데, 현 회장은 그를 포함한 그룹 가신들을 모두 쫓아냈다”면서 “그 빈자리는 현 회장의 친정 쪽이 차지했다”고 일축했다. 결국 현재의 현대그룹은 정씨 것이 아니라 현씨 것이라는 시각이다. 현대(現代)그룹이 아니라 현대(玄代)그룹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치킨게임 끝낼 시간은 있다

범현대가의 주장은 현대그룹의 주력사인 현대상선과 현대엘리베이터의 지분구조에서 뒷받침된다. 현대상선의 경우 현정은 회장과 자녀들의 지분은 1.54%다. 반면 현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과 세 딸, 용문학원 등의 지분은 1.66%로 더 많다. 현대엘리베이터도 현 회장의 지분은 3.92%인 반면 김문희 이사장 쪽 지분은 15.56%로 훨씬 많다. 이미 고령인 김 이사장의 사후에는 사태가 더 복잡해질 수 있다. 김 이사장의 네 딸 중 현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세 딸과 사위들이 현대그룹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주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범현대가에서는 현정은 회장이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말하려면 먼저 김 이사장 쪽 지분을 정몽헌 회장의 자녀(2녀1남)들에게 증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몽구 회장은 10여 년 전 부친인 정주영 명예회장이 동생인 정몽헌 회장에게 현대건설과 그룹 회장직을 넘긴 것이 뼈아픈 한으로 남아 있다. 범현대가에서는 이제는 실력으로나 집안 내 서열로나 사실상 장자인 정몽구 회장이 현대가의 적통을 분명히 확립할 시점이 됐다고 생각한다. 현 회장의 협조가 있다면 그 과정은 순조로울 수 있다. 현 회장도 2008년 3월 고 정주영 명예회장 7주기 때 “현대가의 정통성은 장자인 정몽구 회장에게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신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KCC 등 범현대가는 현 회장과 공존할 수 있는 방안으로 화답해야 한다. 현대건설의 최종 입찰제안서 제출 시한은 11월12일이다. 치킨게임에서 벗어날 방안을 협의할 시간은 충분하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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