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겨울은 길었다. 그해 불어닥친 신용카드 사태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축소판이었다. 1999년부터 카드회사들은 무차별 ‘길거리 발급’으로 카드를 풀었다. 사람들은 갚을 능력을 초과해 무제한 ‘현금 서비스’를 받았다. 카드회사는 늘어나는 회원 수를 즐겼고, 소비자는 빌린 돈을 펑펑 써댔다. 하지만 축제는 오래가지 않았다. 연체율이 올라가자, 카드사들이 한도를 대폭 줄였다. 곧바로 ‘돌려막기’로 버티던 사람들은 카드대금을 갚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카드사들의 대규모 손실로 이어졌다. 시장에선 카드사에 더 이상 자금을 빌려주지 않았다. 카드회사의 위기설이 계속 흘러나왔다.
현대카드도 신용대란의 광풍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2001년 다이너스카드코리아를 사들이며 카드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시장점유율은 1.8%에 그쳤다. 2003년 6300억원의 적자를 냈다. 선택할 수 있는 손 쉬운 방법은 카드사업을 매각하거나 그룹사에 손을 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국민카드는 2003년 1월 1240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1월 말 연체율은 13.62%였다. 손익지표와 함께 잠재 손실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투자자들의 불안감은 증폭됐다. 카드사의 자금조달 수단인 채권 발행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살로먼스미스바니·크레디리오네 등 외국계 증권사들은 국민카드가 부실 자산 확대와 영업 마진폭 감소로 실적이 악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선포인트제’ 아이디어 빅히트끝내 국민카드는 그해 5월 모회사인 국민은행과 합병한다. 브랜드 이름도 ‘KB카드’로 바뀌었다. 부실 덩어리 카드를 안은 국민은행은 ‘적은 내부에 있다’는 시장의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2005년에는 2천여 명이 명예퇴직하는 등 감원의 칼바람도 뒤따랐다. 문중옥 국민은행 연희동 지점장(당시 카드기획부 사업전략팀장)은 “부실 자산을 어느 정도로 어떻게 떨어내야 할지 검토하고 실행하고 다시 점검하느라 밤을 꼬박 새운 적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이를 악물었다”라며 그때를 떠올렸다.
현대카드는 위기를 역발상으로 돌파한다. 당시 현대카드는 새로운 ‘카드’를 준비 중이었다. 2002년 ‘엑스칼리버’라는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었다. ‘날카로운 칼끝으로 위기를 돌파해 카드업계의 아서왕이 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우수 회원을 모으기는커녕 잘못하면 돌려막기에 쓰이는 마지막 카드가 될 수도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카드’가 필요했다.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전략을 짜는 데 7개월이 걸렸다. 다양한 혜택을 준다는 의미에서 멀티플(Multiple)의 머리글자 M을 내세웠다. 그들은 ‘현대카드M’을 뽑아냈다. 2003년 5월이었다.
카드업계 모두가 축소경영을 외칠 때 현대카드는 매년 300억원 이상을 광고비로 투자하며 대대적인 마케팅에 돌입한다. 경쟁 카드사들이 이자율이나 서비스 한도에 집착할 때 현대카드는 고객의 변화하는 라이프스타일을 탐색했다. 변창우 현대카드 마케팅본부장은 “소비자 분석을 해보니 다양하고 복잡한 메시지보다 알파벳이나 숫자와 같은 간단명료한 기호를 더 잘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을 알파벳에 대입시키는 전략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현대카드M, 쇼핑을 즐기는 사람을 위한 현대카드S, 이동통신 이용자를 위한 현대카드T 등 10개의 알파벳 시리즈가 쏟아져나왔다.
다른 카드 회사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포인트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현금처럼 포인트를 쓸 수 있다면?’처럼 창의적인 접근이었다. 결국 현대카드는 포인트를 화끈하게 주는 전략을 세웠다. 포인트를 쌓은 뒤 이용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미리 포인트를 이용하고 뒤에 포인트를 쌓아 갚는 ‘선포인트제’도 처음으로 내놓았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라는 경쾌한 광고송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로 대표되는 광고 카피는 감각적이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세계 각국의 정상 등 톡톡 튀는 광고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 현대카드M은 단일 카드로는 국내 최초로 600만 회원을 돌파하며 신용카드 업계의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은 “시장점유율이 중요하지만 그 논리에 이끌려다닐 생각은 없다. 그보단 성장률, 리스크 관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지극히 ‘현대카드스러운’ 전략으로 국내외 많은 회사에서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게 목표다”라고 말했다.
스타카드 3년여 만에 180만 회원“KB카드는 혜택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KB카드 직원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소리를 심심찮게 들어야 했다. 거기에 도약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조정희 국민은행 마케팅부장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참 많이 고민했다. 실제 따져보면 오히려 KB카드의 혜택이 더 뛰어나면 뛰어났지 뒤질 것이 없는데도 시장조사를 하면 이런 문구가 하나씩 끼어 있었다. 소통 부족 때문이었다. 사람들에게 KB카드를 제대로 알려야 했다”고 말했다. 원효성 국민은행 신용카드사업그룹 부행장은 “KB카드 브랜드 이미지를 조사해보니 너무 평범했다. 나이가 좀 있는 층의 이미지가 강했다. 조금은 젊고, 조금은 액티브한 면을 전달해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꺼내라, 가둬두기엔 혜택이 너무 많다’였다. 2006년이었다. KB카드는 ‘젊은 카드’로 다가섰다. 보수적인 은행계 카드로선 파격적인 광고였다. 톱스타 비와 보아를 통해 잠재된 욕구가 카드의 힘을 빌려 튀어나온다는 감각적인 광고를 만들었다. 차별화된 볼거리도 함께 넣었다. 일러스트 아티스트가 수작업으로 별과 꽃 그림을 그렸고 이를 디지털화해 모델들의 춤 동작에 자연스럽게 비치도록 했다. 모델이 갖고 있는 특유의 역동적 이미지들이 KB카드에 투영돼 젊음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더할 수 있었다. ‘KB 스타카드’는 시장에 나온 지 3년여 만에 약 180만 명의 회원을 모았다.
설렘과 감동의 ‘티파니’ 코드현대카드 기업문화는 한마디로 ‘진보의 얼굴을 한 보수주의’로 말할 수 있다. 현대카드에선 형식과 권위를 거부한다. 넥타이를 맬 필요가 없다. 임원실 벽과 문은 모두 투명한 유리다. 블라인드도 없다. 투명경영을 상징하는 한편으로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서다. 정태영 사장이 이같은 기업문화를 이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유스러움 속에서도 용서받지 못하는 원칙 3가지가 있다. ‘무관용 정책’(Zero Tolerance Policy)이 바로 그것이다. 고객 정보를 유출하거나 협력 업체에서 뇌물을 받거나 성희롱을 한 경우다. 여기에 걸리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회사를 떠나야 한다. 더 나아가 형사 고발까지도 당할 수 있다. 정 사장은 “위대한 기업은 단지 광고 한 편 잘 만든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혁신적 조직문화와 선진적 인사제도에서 온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은행은 안정적이지만 상당히 보수적인 조직이다. 전략을 짜거나 투자를 할 때 돌다리도 두들겨본 뒤 조심스럽게 결정한다. 하지만 KB카드의 조직문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06년 원효성 부행장이 부임해오면서부터다. 원 부행장은 변화를 강조했다. 직원들에게 ‘스스로 고객이 돼라’와 ‘죽도록 공부하라’를 주문했다. 변화를 감지하고 거기에 대응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변화의 조짐을 미리 간파하라는 얘기다. 또 미래 가치를 현재 상황에서 구현해내기 위해 끊임없는 학습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손으로 즐기는 ‘디지털’ 코드현대카드는 자신들의 전략을 ‘티파니 박스에 싸인 과학’으로 정의했다. 티파니 보석상자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의 설렘과 감동을 상징하는 문화 코드다. 현대카드가 추구하는 마케팅 전략도 이같은 감성적 접근 방식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무엇일까? 이윤석 현대카드 이사는 “고객이 현대카드를 쓰는지 아니면 서랍 속에 넣어두는지, 현대카드를 주 카드로 쓰는지 아니면 지갑 안에 들어가 있는 여러 카드 중 하나인지를 끊임없이 분석한다. 이를 통해 고객에게 가장 최적의 서비스를 제공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KB카드는 또 다른 과학을 내세운다. 디지털 코드다. KB카드는 올해 6월 ‘&d카드’를 선보였다. 세계 최초로 신용카드에 대용량 메모리칩과 디스플레이 기능을 접목했다. MP4, 지상파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USB 저장 장치를 갖추고 있다. 신용카드로 쓰면서 DMB도 볼 수 있다. 카드사들끼리의 서비스 출혈 경쟁을 뛰어넘어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며 카드 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한 첨단 제품이다.
두 회사는 1등 신한카드(지난해 점유율 25%)에 맞서기 위한 2등 경쟁을 벌이고 있다. 1등 카드든, 2등 카드든 수많은 카드들 가운데 고객에게 선택되는 카드는 단 한 장이다. 그 한 장에 들기 위해 두 회사는 지금도 비장의 ‘카드’를 궁리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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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원효성 국민은행 신용카드사업그룹 부행장은 디자인 담당인 김아무개 팀장을 찾았다. “김 팀장, 앙드레김 의상 디자인 어때? 우리 디자인 콘셉트와 어울리는 면이 있을 것 같은데….” 김 팀장은 깜짝 놀랐다. 자신이 준비하던 보고서의 내용과 원 부행장이 꺼낸 말의 의미가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그날로 앙드레김을 만난 뒤, 보름 만에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 뒤 앙드레김은 ‘KB포인트리’ ‘앙드레김 이퀸즈’ 등 KB카드 브랜드에 이름을 올렸다.
KB카드는 자신들의 디자인 철학을 ‘포스트클래식’이라고 말한다.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에 세계적인 클래식을 가미한 가장 ‘KB카드다운’ 차별화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천연 가죽의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가죽 카드, 자개를 카드에 더한 자개 카드, 자수장·매듭장으로 만든 문화재 카드 등 KB카드 디자인의 진화는 그칠 줄을 모른다.
현대카드는 디자인의 고정관념을 철저히 파괴했다.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하기 위해서다. 투명 카드, 미니 카드 등 카드를 포장하는 방법부터 달랐다. 투명 카드의 생산원가는 일반 카드에 견줘 30배 더 들어갔지만, 회사 경영진이 반대하지 않았다. 새로운 도전에 경영진들은 힘을 실어줬다. 등 명화가 그려진 카드, 직사각형에서 벗어난 ‘프리폼 카드’ 등을 잇달아 선보였다.
현대카드는 ‘더 퍼플 카드’를 선보이면서 ‘퍼플을 감당할 수 있는가’(Dare to be the Purple)라는 선명하고 자극적인 카피도 내놓았다. 우아함과 고귀함의 상징인 보라색을 브랜드화한 것이다. ‘빛의 순수함’이라는 어원을 지닌 보라색을 통해 독보적인 존재와 성공을 만들어가는 이미지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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