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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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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생활] 콩나물

등록 2008-06-27 00:00 수정 2020-05-03 04:25

▣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독신남 C씨. 2분의 1의 연봉을 깎고 잘나가던 직장에서 H사로 옮겨왔다. 여자깨나 호렸을 것 같은 외모인데 전적이 알려진 바 없으며, 주위에서 소개팅깨나 해주는데 여자친구가 없으며, 주말 여성들과 데이트를 꽤 즐기는 것 같은데 실적이 없다. 이것은 모두 ‘공식’적인 프로필이며 진짜로 벌어지는 ‘비공식’적 면모는 전혀 알려진 바 없다. 그의 비공식은 ‘오리무중’이다. 참고로, C씨는 한번 잘못 부른 이름을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고도 고집해 불러 ‘오리’ 선생님으로 불린다. 하나 더 참고로, 담배 피우다가 나온 시가 이야기에다 보관법, 구입 루트, 기구, 잘못 알려진 상식 등을 ‘습니다.’의 마침표까지 보일 듯한 어투로 이야기해 ‘진지 선생님’이라고도 불린다. 오리무중 ‘오리 선생님’은 최근 아주 사소한 가정생활을 수줍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독신남의 동거 이야기다.

시작은 한 달 전 ‘스위스산’ 시리얼을 구입하던 때로 되돌아간다. “○○○에서 유기농 시리얼을 샀는데요, 정말 맛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먹다가 싱크대에 그냥 버렸습니다.” 이때 선생님 말씀의 요지는 ‘나 시리얼 정도는 스위스산을 먹어’로 보였다. ‘비싼 시리얼도 먹다가 버릴 수 있어’로도 들렸다.

일주일이 지났다. “제가 싱크대에 시리얼을 버리고는 뚜껑을 덮었거든요. 얼마 전에 열어보니 콩나물이 자랐더라고요.” 그는 이후 식물 관찰일기를 쓰는 양으로 매일의 근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점 콩나물에 지쳐갔다.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오리 선생의 깔끔한 생활’은 위장이 아닐까 하는 수상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오리 선생님은 요즘 비가 내리는 추운 날에도 긴팔 옷을 안 입는데, 그 이유가 여름이 오기 전 모든 긴팔 옷을 세탁한 뒤 창호지로 봉해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음식을 먹고 치우는 데 사용하는 싱크대를 전혀 청소하지 않는다는 콩나물 사건의 배경은 창호지에 베일 듯한 엄격한 사생활과는 잘 부합하지 않았다.

일주일 뒤, 콩나물은 이제 따먹기 좋을 정도로까지 자랐다. 안타깝지만 그것을 잘 키워서 콩나물 무침을 해먹었다거나, 그것을 싸와서 회사 사람들에게도 먹였다거나 하는 이야기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회사 동료에게 전한 관찰일기의 내용은 “최근 자연의 신비를 깨닫고 있습니다”였다. 또 콩나물이군. “개수대 통 속의 찌꺼기들이 하나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럼 그렇지, 정말 찌꺼기통이 더러웠던 거야. 머릿속에 콩나물이 난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콩나물의 배경그림을 그렸다. 아무도 듣지 않는데 진지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자연 자정 능력이 대단하잖아요. 물도 그대로 흐르게만 두면 깨끗해지잖아요. 약품을 쓰지 않아도 말이죠. 물을 건너온 콩에서 싹을 틔우고 그 싹이 주변의 것들을 이용해 콩나물이 되고, 정말 자연은 신비해요.” 콩나물은 우담바라가 되었다. 오리 선생님은 ‘자연의 신비’를 확인한 뒤 콩나물을 똑 떼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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