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아내, 두 아들 갈수록 그리움이 깊어져…아빠답게 끝까지 싸울게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의 기록③— 김영헌씨 인터뷰
등록 2026-02-02 07:38 수정 2026-02-02 09:26
2024년 12월29일 전남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발생하기 직전 타이를 여행할 때의 김영헌씨 가족. 김영헌 제공

2024년 12월29일 전남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발생하기 직전 타이를 여행할 때의 김영헌씨 가족. 김영헌 제공


1.

제가 참사 전까지 일하던 회사는 모터 부품을 만들었어요.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청소기 모터 부품. 회사가 인도에 진출하게 된 것은 관세 때문이었어요. 제조원가가 자꾸 올라서 ‘차라리 인도에다 공장을 만들자’ 했죠. 그렇게 2024년 1월2일 인도 법인장 발령을 받고 근무를 시작했어요. 그 전부터 출장으로 인도와 한국을 왔다 갔다 했고요. 인도 거래처는 12월 마지막 주는 동계 휴무에 들어가요. 그래서 그 기간에 한국에 있는 식구들과의 여행 계획을 세웠어요. 여행사에 ‘타이에서 합류해도 되냐’고 물으니 가능하다고 해서, 식구들은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출발하고 저는 인도에서 타이로 출발했어요. 처음엔 인천에서 오가는 패키지여행을 선택하려다가, 이동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 같았어요. (가족이 살던) 광주광역시에서 인천까지 4시간 걸리잖아요. 그래서 제가 무안공항을 권유했죠.

 

2.

패키지여행은 버스가 편성되잖아요. 한국에서 온 18명이 한 팀, 한 버스였어요. 그 버스에 영광에 사는 일가족 아홉 분이 탔어요. 할아버지 생신을 맞아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르신의 첫째 딸 내외와 손녀, 둘째 딸과 손녀 둘, 손자 한 명까지, 그렇게 아홉 분이 희생됐어요. 또 목포에서 오신, 한 직장에서 만나 같이 온 여성 다섯 분. 저는 그분들을 다 봤잖아요. 영광의 어르신 두 분이 제게 격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외국 생활 잘하라고.

그렇게 타이에서 헤어져 저는 인도로 가고, 식구들은 한국으로 갔죠. 인도 시각으로 새벽 6시쯤이었나 형님한테 전화를 받았어요. 그때가 한국 시각으로 오전 9시30분쯤 됐어요. 유튜브를 켰어요. 실시간으로 사고 영상이 나오더라고요. ‘무조건 나는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지금 내가 여기 있을 때가 아니다, 무조건 가야 한다. 지금 울고 질질 짤 상황이 아니야. 나는 무조건 한국에 가야 한다. 우리 가족이 세 명인데 설마 그래도 한 명은 생존하지 않았을까?

인도 숙소에서 출발해 비행기 두 번 타고 대기 시간, 또 공항까지 이동하면 24시간 걸리거든요. 그 시간 동안 아예 뉴스 검색을 안 했어요. 형님 전화를 받고 30분 뒤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이 자식이 자꾸 펑펑 울더라고. 그래서 아, 뭔가 잘못됐구나. 아예 검색을 안 했어요. 나는 24시간을 가야 하는데 무너지면 안 되니까. 중간에 무너지면 안 되니까.

2024년 10월 김영헌씨가 아내와 인도 여행 중에 웃고 있다. 김영헌 제공

2024년 10월 김영헌씨가 아내와 인도 여행 중에 웃고 있다. 김영헌 제공


3.

아내는 직장에서 만났어요. 우리 회사 1호 커플이었죠. 아내는 관리부 소속이었고 나는 영업직 소속이었고. 똑똑하고 야무졌어요. 일에 대해서 야무져. 그런데 사람들은 야무지다 생각 안 하고 성격이 세다고 생각했어. 저는 좋았어요. 자기 일에만 야물지 나머지는 몰라요. 순진하고 착해요, 알아요 저는. 똑똑하고 생활력 강하고. 같은 사무실에 있다보니 이야기도 나누면서 점점 친해졌는데, 어느 순간 자기 친구를 소개해준다는 거예요. 그때 거부를 못했어요. 일단 친구를 만났죠. 만나서 그 친구한테 있는 그대로 ‘당신보다 이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어서 미안하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날 저녁에 우리 집사람한테 전화해 ‘만나자’ 이야기했죠. 그렇게 1년 사귀고 결혼했어요. 빨리해야죠, 도망가기 전에.

우리 둘 다 (자식이) 셋은 많다, 하나는 외롭다, 둘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들 둘. 큰애는 대학 졸업반이었고, 작은애는 평발 때문에 공익요원으로 3주 훈련소 다녀와서 11월1일부터 장애인센터에서 근무했어요. 어릴 때는 아이들이 예쁘고 귀엽기만 했는데, 커서 술 먹을 나이가 돼서 같이 술을 먹는데 굉장히 잘 먹어요. 설날 밤에 식구들끼리 술을 먹는데 집사람은 소주 1병에 떨어지고, 둘째는 소주 2병에 떨어지고. 큰애랑 둘이 3병씩 먹었는데 술이 부족한 거예요. “아빠 술 좀 더 사올까? 안주가 없잖아요, 두부에다 먹자” 그래요. 하루는 아들이랑 삼겹살 3인분, 소주만 6병 먹은 기억도 있고. 그때 되게 좋았어요. 우리 아들이 벌써 이렇게 커서 같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논의할 나이가 됐구나. 잘 키웠구나.

큰애한테 “아빠가 아무래도 인도를 가야 할 것 같아. 그렇게 권유가 왔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했더니, “아빠 멋있는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더라고요. 큰애가 그렇게 말하고 진짜로 잘했어요. 저 없어도 엄마한테 잘하고. 24살이었어요. 사회 이야기, 자기 나름의 고민 이야기도 나누고. 둘째는 대학교 2학년 1학기 마치고 공익을 시작했으니까 사회생활에 대한 경험이 없잖아요. 그래서 큰애랑 나눈 대화 같은 것은 안 했죠. 워낙에 어릴 때부터 예뻐해서 뭐든지 다 용서됐죠, 뭐든지. 그냥 둘째는 오케이지, 이쁘니까. 훈련소 딱 갔다 오더니 장애인센터에 가려고 엄마가 안 깨워도 일어나서 혼자 밥 차려 먹고 나가고. 뭔가 경험해보고 느끼지도 못하고 너무 짧았지. 그게 많이 안타깝지.

집사람한테는 마냥 고맙고 미안해요. 그 나이에 학교와 대학원, 6년을 다녔어요. 용봉동에서 어린이집 일 끝내고 교대 가서 수업 받고. 4학기 땐 논문을 못 써서 한 학기 더 다니고. 학위증이 나왔는데 못 보고 갔어요. 학교 쪽에 장례식장에서 쓰고 싶다고 이야기해서 학위증을 받았어요. 학교에서도 흔쾌히 해줬고.

지금까지 서로 여유가 없었어요. 본인도 어린이집 운영하면서 학교까지 다니니까 여유가 없었고, 저도 회사 일이 그렇고. 기회를 안 줘서 참 많이 아쉽죠. 하늘이 기회를 안 줘서 저한테. 행복할 기회를 안 줘서. 물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남들에 비하면 행복이라고 봐야 하는데. 어떻게 보면 이제 아이들 다 키워놓고 다시 시작하는 상황이었는데.

2024년 10월 김영헌씨의 둘째 아들이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퇴소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김영헌 제공

2024년 10월 김영헌씨의 둘째 아들이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퇴소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김영헌 제공


4.

2025년 3월에 이사했어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집사람네 처제가 다섯이에요. 장례 치르고 보니 모든 짐을 싹 버렸더라고요. 심지어 밥그릇까지 버렸더라고. 식구들 옷가지, 우리 집사람 화장품 이런 거. 작은애 책, 큰애 책, 싹 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엔 좀 서운했어요. 우리 식구들 냄새라도 좀 기억하게 놔두지. 장례 끝나고 집에 왔는데 그 동네, 그 집에서 한 15년을 살다보니까 어디를 가든 우리 아이들 생각이 나는 거지. 그래서 두 달 못 되게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냥 계기가 없어요. 약을 요즘에 잘 안 먹다보니까 눈물이 나는 것도 계기가 없어요. 그냥 운전하다가도 나요. 특별하게 뭐 슬픈 일이 있다거나 뭐 노래를 들었다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불쑥 올라와요, 불쑥.

집사람 생각이 많이 나는 게, 밤에 가끔 동네를 좀 돌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부부가 이렇게 손잡고 도는 모습을 보면, 집사람 생각이 많이 나죠. 마지막으로 같이 인도 여행했던 때가 생각이 많이 나요. 자꾸 꿈에도 나오고.

식구들 장례를 치르고 저는 바로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어요. 약을 먹으면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입도 쓰고. 요즘에도 안 먹고 버텨보려 하는데 아, 도저히 안 되더라고. 그래서 다시 먹고 있는데 좀 많이 힘드네. 많이 힘들어요. 갈수록 힘들어요. 갈수록 그리움이 깊어지니까 갈수록 힘들어.

 

5.

생각을 했죠. 그래, 교통사고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날뛰어봐야 대한민국은 안되는 나라다. 될 것 같은 나라였으면 왜 세월호 유가족이 그렇게 소리를 치고 아직도 이태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사회적 참사들이 해결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해보려 노력해도 또 떠올랐어요. 왜 새떼를 보지 못했을까? 새떼 관리는 공항이 해야 하는데, 무안공항에 비행기가 하루에 몇 대나 뜬다고 그걸 관리 못했을까? 또 그렇게 단단한 둔덕이란 것을 무안공항에 내려온 뒤에 알았어요. 규정 위반이라는 거예요. 이것도 국가의 잘못이네. 그럼 딱 세 가지. 새떼 관리를 못한 공항의 잘못, 둔덕을 만들어놓은 국가의 잘못, 그다음은 어찌 됐든 항공사가 사고를 냈으니까 항공사의 책임이지. 명확하잖아요. 이거 되겠다. 모든 국회의원, 정치인들이 다 와서 끝까지 하겠다고 했잖아.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끝까지 노력하겠다 그랬고요. 희생자 95%가 광주·전남 지역민인데, 광주·전남 100%가 민주당인데 진상규명이 안 될 리가 있겠어? 또 전남 경찰이 수사한단다. 전남 경찰은 이 지역 사람이고 이 지역에서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야. 그래서 희망을 가졌죠. 우리는 다른 참사와 다를 것이다. 순진한 생각이었죠, 순진한 생각.

윤석열이 탄핵되면서 우리 이야기가 묻히기 시작한 거지. 그때 1월만 반짝했지 2월, 3월부터는 거의 묻혀버렸어요. 관심이 있었으면 이 엄청난 참사를 4명이서 수사하게끔 놔뒀을까요. 이게 일반 살인사건도 아니고. 2025년 10월에 유가족들과 전남경찰청에 한 번 갔죠. 갔더니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사고의 영향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고 있고 어렵다고 해요. 어려우면 협조 요청을 받으면 될 거 아니에요? 그게 역할 아니냐고. 그래서 1인시위를 갔다 온 거지, 부끄러우라고. 이럴 거면 차라리 청장 사퇴하라고.

2026년 1월2일 김영헌씨가 전남경찰청 앞에서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 수사를 촉구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김영헌 제공

2026년 1월2일 김영헌씨가 전남경찰청 앞에서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 수사를 촉구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김영헌 제공


6.

사고 난 활주로 끝에서 좀만 가면 도로잖아요. 둔덕이 없었으면 살았겠다, 저 정도 큰 폭발이 안 일어났겠다, 생각했죠. 이미 다 조사했잖아요. 자기들도 다 알고 있었으면서. 부러지기 쉬운 재질로 해야 한다는 걸 다 알았으면서. 그래서 나는 국가 책임이 첫 번째라고 봐요. 그런데 국가는 인정하기 싫으니까 제주항공에 대충 떠넘기고 빨리 합의해서 덮으려고 했던 거지. 최초 개량공사 했을 때의 국토교통부 직원들이 지금도 있잖아요. 책임지기 싫으니까.

그래도 저는 최근 참 힘이 많이 나요. 이제 사회적 연대가 많이 됐잖아요. 연대가 된다는 것은 우리 유가족대표단이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거고, 우리 유가족 이야기가 많이 알려질 수 있다는 거고. 결코 우리 유가족 힘만으로 할 수 없는 부분이었는데, 절반은 성공한 것 같아요.

추모관에 가면 가끔 편지를 써요. 아빠가 살아야 하는 목표는 세웠는데, 그래도 가끔 힘 빠질 때가 있다. 아빠도 싸우는 게 힘든데, 그래도 어찌 됐든 너희의 억울함이 없게끔 해보겠다. 아빠답게, 때로는 좀 무식하고 단순하게, 그러면서 또 이성적으로 행동하겠다. 아빠가 잘 살아야 너희를 기억할 수 있으니까. 저까지 없으면 누가 아이들을 기억하겠어요?

 

정나라·허정·이소아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활동가

 

*2025년 12월8일 ‘공익변호사와 함께하는 동행’ 활동가들이 유가족 김영헌씨를 인터뷰하고 기록했습니다. 이 글은 ‘무안공항 참사 이후를 사는 사람들’ 3회로, 한겨레21 누리집을 통해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한겨레 저널리즘
응원으로 지켜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