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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없을 그 평범한 순간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캐럴>
등록 2012-12-21 16:59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박미향 기자

한겨레 박미향 기자

어릴 적에 집 마당 한켠에 향나무가 있었다. 꽃이 피는 것도 아니고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닌, 그저 사시사철 잎이 푸르기만 했던 나무는 주로 집에서 키우던 개를 묶어놓는 용도로 쓰였다. 그러다 언젠가 겨 울부터 쓸모가 생겼다. 나무는 동화책에서 보던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기에 제격이었다. 입김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이면 동생과 나는 창고에서 트리 장식을 담은 박스를 꺼냈다. 오너먼트를 매달고, 솜뭉 치를 가지 사이에 쑤셔넣고, 반짝이는 긴 줄과 작은 알전구를 나무에 휘감았다. 그렇게 나무를 괴롭히며 전기를 연결해 전구에 불을 켰을 때는 박수도 쳤던 것 같다. 이제 우리는 그 나무가 있던 집을 떠나왔 고, 해마다 소중하게 다뤘던 트리 장식품들은 낡아 결국 우리도 모 르는 사이에 쓰레기통에 버려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때의 기억이 다른 어떤 크리스마스보다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가장 평범했 지만 더 이상 손에 쥘 수 없는 순간이기 때문일 거다.

찰스 디킨스의 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스크루 지가 두 번째 정령을 만났을 때다. 현재의 크리스마스를 보여주는 정 령은 번잡한 시내에서 사람들이 부딪혀 싸움이 일어나려고 할 때 자 기 손에 든 등불에서 나온 물을 사람들에게 몇 방울 떨어트린다. 그러 면 사람들은 금세 기분이 좋아지고, “크리스마스에 다투는 건 수치스 러운 일이지”라고 말한다. 가장 추운 계절에 가장 따뜻한 날을 맞은 도시는, 소설의 표현대로라면 “가장 맑은 여름 날씨와 가장 밝은 여름 태양이 만들어낼 수조차 없는 즐거움의 기운이 사방에 감돌았다”.

넉넉하지 않은 사람들일지라도 이날만큼은 온 집안에 김이 솟도록 불을 때고 풍성하게 음식을 만들었다. “칠면조고기, 오리고기, 닭고 기, 돼지편육, 큼직한 갈비, 소시지, 민스파이, 자두푸딩, 통에 담긴 생굴, 뜨끈뜨끈한 군밤, 과즙이 찰찰 넘치는 오렌지, 엄청나게 큰 케 이크, 김이 펄펄 뿜어져나오는 펀치 칵테일….” 가게에는 배와 사과가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고, 차와 커피 향, 고기 굽는 냄새가 거리를 채 우고, 식품가게에서 나오는 단내가 어지러울 만큼 진동한다.

그런 가운데 스크루지가 현재의 정령과 함께 찾아간 곳은 스크루지 의 사무원 봅 크래칫의 집이다. 박봉의 크래칫 가족들이지만 이들의 저녁 식탁도 오늘은 만찬이다. 감자를 삶고, 달콤한 사과소스를 만들 고, 자주 쓰지 않아 먼지가 쌓인 큰 그릇을 닦아 그 위에 거위 요리 를 담았다. 아이들은 음식을 달라고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숟가락 을 입에 꼭 물고 참았다. 거위 요리에 칼을 넣고 가르는 순간 식탁에 는 환희의 울림이 얕게 퍼졌다. 그리고 브랜디를 뿌려 불을 붙인 크 리스마스 푸딩을 내왔을 때 식사의 환희는 절정을 찍었다.

스크루지는 이들을 보고 일상이 주는 소소한 기쁨이 무엇인지 태어나 서 처음으로 알았다. 우리도 스크루지처럼 가끔 그런 일상의 소중함 을 잊고 사는 것 같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크래칫의 가족처럼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애써서 식당을 예약하고 특별한 장소에 찾아가느라 시 간을 소비하기보다 가장 평범한 시간의 소중함을 나눠보기로 했다. 집 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고개를 돌리면 주 방에 설거지 폭탄은 터져 있겠지만.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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