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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 사랑한 작가 최진영② ‘지옥도’와 루틴

등록 2020-08-20 19:58 수정 2024-03-20 18:49
박승화 기자

박승화 기자


 

*21이 사랑한 작가 최진영① 얼마나 더 다정해질 작정일까에서 이어집니다.

‘첫사랑’이라는 단편 세 편

최진영은 겨울에 태어났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에는 겨울이 자주 등장한다. 2019년 10월 나온 단편집의 제목도 <겨울방학>이고, <끝나지 않는 노래>에서 두자가 처음으로 남편과 감정을 주고받는 순간도 겨울의 한가운데다. <해가 지는 곳으로>에서 인물들은 언젠가 올 따뜻한 계절을 꿈꾸며, 겨울의 추위와 싸운다. 오스스한 계절의 감각이 그의 문장에 스며 있다.

겨울이란 계절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나요.

“겨울 좋죠. 밤도 길고 좀더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서로 가까이 있을 수 있고 보듬어줄 수 있으니까요. 연말 연초가 맞물리면서 주는 이상한 감정도 있고요. 저는 사실 사계절을 다 좋아해요. ‘날씨’와 ‘계절’이라는 거 자체가 좋아요. 푹푹 찔 때 걷는 것도, 추울 때 걷는 것도 좋아해요. 소설에 겨울이 많이 나오는 건… 실망하실 수도 있지만, 좀 현실적이고 재미있는 이유 때문이에요. 한때 매일 야구를 봤어요. 지금은 거리두기를 하지만. 한화 이글스의 야구요. 야구는 좋은 친구예요. 매일 하고, 오래 하고, 그날 끝나죠. 날마다 스토리가 다르고요. 근데 겨울에는 야구를 안 하잖아요. 그때 장편을 쓰다보니 배경을 겨울로 그리는 일이 많아졌어요.”

최진영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사랑이다. 그의 이야기 속 사랑은 진하다. 폭발적이다. 죄다 첫사랑 같다. 실제 첫사랑도 자주 등장한다. ‘첫사랑’이라는 제목의 단편도 세 편이나 된다. 연한 마음을 가진 인물과, 그들이 주고받는 지극한 마음이 그의 소설에는 꾹꾹 눌러 담겨 있다. 처음 마주친 감정의 생생함이 폭죽 터지듯 문장을 따라 춤춘다.

첫사랑에 대해 자주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렇게 막연하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그때밖에 가능하지 않아요. 그래서 중요한 정서라고 생각해요. 나이 들고 사회인이 되면 어느 순간 사람을 못 믿게 되고 좋아하는 마음에도 기준이 생겨요. 사람 대신 조건을 보고, 의심하고, 상대에 따라 내 가치를 높이거나 낮추게 되잖아요. 근데 그 시절의 사랑은 미칠 것 같은 사랑이잖아요. 좋아서 미치고, 힘들어서 미치는. 모순적이지만 순수하고 절대적이어서 위험한, 성장호르몬 때문에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막 하게 되는 거요. 그 정서가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고, 이후에도 그때의 경험이 중요한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연령대마다 할 수 있는 사랑이 다르지만, 무엇도 그때와 비할 순 없고 그때 한 사랑이 가장 사랑의 원형 같다는 생각을 해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연습한다

“처음 본 순간부터 멀고 아득했는데, 아름다움이 먼저 내게 다가왔고 말을 걸었다. 먼저 내 손을 잡았다. 그 느낌은 평생토록 남아 나를 괴롭게 할 것이다.”(<해가 지는 곳으로> 중에서)

사랑만큼이나 그의 이야기에 딱 달라붙어 있는 건 다름 아닌 죽음이다. 죽은 동생을 그리워하고(<비상문>),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다 먹어버린다(<구의 증명>), 나쁜 것들을 죽여 없애기도 하고(<몬스터: 한낮의 그림자>), 우연히 죽음을 맞기도 한다(<끝나지 않는 노래>).

작가님의 작품에서 죽음을 마주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애도하는데요. 작가님은 죽음을 떠올리면 어떤 마음이 되나요. 누군가를 잘 보내준다는 건 뭘까요.

“그걸 몰라서 계속 써요. 내 죽음은 두렵지 않은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걸 생각하면 공포스러워요. 그게 뭔지 알고 싶고, 조금이라도 연습해보고 싶고,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잘해보고 싶어서 소설로 써요. 뭔가에 대해 쓴다는 건 그걸 오래 생각한다는 거잖아요. 여전히 뭔지 모르지만 생각해본 거랑 안 해본 거랑은 다른 것 같아요. 쓰고, 생각할수록 존재가 더 애틋해져요. 상상할수록 관대해지고요. 그래서 (제가 쓰는) 소설도 변해가는 것 같아요. 예전엔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라고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이 모양인 세상에서 난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하는 쪽으로 질문이 변했죠.”

그의 소설은 실제로 조금씩 달라졌다. 2019년 단편 ‘오늘의 커피’에서 오래 걷던 중 따뜻한 카페를 만나는 ‘조’는, 목적지에 닿지 못하고 헤매던 ‘어디쯤’(2013)의 주인공과 닮았다. 2013년의 인물은 끝내 목적지에 닿지 못했지만, 2019년의 ‘조’에게는 안식이 허락된다. 또래의 이야기를 쓸 때는 냉정하게 희망 없는 현실을 그려낼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어린 인물을 그려낼 때는 왜인지 매몰찰 수 없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두 작품을 썼던 2013년과 2019년, 두 시기의 작가님을 기억하나요. 두 시기를 비교할 때, 어떤 점이 가장 많이 바뀌었나요.

“지금보다 발랄했고 불만이 많았어요. 그땐 좌절하는 일이 있어도 금방 딛고 일어났죠. 지금은… 단념 같은 게 마음에 있어요. 현실 파악을 좀더 하게 됐죠. 어릴 땐 에너지만으로 훅 일어섰다면, 지금은 조금 더 담담하고 씁쓸하지만, 간편하다고 느껴요. 뭔가 더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땐 기다릴 줄 몰랐어요. 지금 바로 싸우고 해결해야했죠. 지금은 두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기다릴 수 있게 됐죠. 에너지가 달라진 것 같아요. 허무라는 걸 글자 이상으로 알아버린 거예요. 희로애락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됐어요. 모든 걸 알진 못하지만요.”

거리를 유지하는 다정함

그때나 지금이나, 최진영이 빚어내는 인물에게선 다정함이 자주 발견된다. 바짝 다가서서 머리를 쓰다듬는 다정함이 아니라, 늘 얼마간 거리를 유지하는 게 그가 그리는 다정함의 특질이다. ‘겨울방학’에서 조카를 돌보는 고모도, <이제야 언니에게>에서 제야의 곁을 지키는 강릉 이모도 사랑하는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다정함은 무엇인지 묻자, 그는 ‘존중감’이라 답했다.

“간섭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대놓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 그 존재에 대한 존중감이 있는 거죠. 그게 있으면 상대와 나를 동일시하거나 내 것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잖아요. 저는 그게 진짜 소중한 감각인 거 같아요. 존재 자체로 인정하는 거. 이 애도 그 자체로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라고 보는 거요. 저는 밥을 먹고 싶지 않은데 밥을 먹으라고 하는, 그런 다정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내게도 식욕이 있고 식성이 있다는 걸 인정해주는 다정함이 좋아요.”

사회 밖으로 밀쳐진 사람들이 작가님 작품엔 자주 나옵니다.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성폭력 피해자, 잘 기억되지 않는 고달픈 여성들, 자살 유가족… 힘든 면을 깊게 보는 일이 힘들진 않은가요.

“힘들다는 표현은 맞지 않고요. 계속 생각하다보면 지칠 땐 있죠. 그런데 저는 글을 써서 좋은 게, 글을 쓰지 않았다면 불편하고 괴로워서 생각하지 않았을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들여다볼 수 있단 거예요. 어느 순간 내가 되게 좋은, 괜찮은 직업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글쓰기의 쾌감도 있지만 사람이 살면서 해야 할 생각을 그래도 한 번은 해볼 기회를 얻은 거잖아요. 원래 눈이 밝았던 사람은 아닌 것 같고요. 글을 쓰면서 자세히 보게 되는 것 같아요.”

쓰면서 밝은 눈을 갖게 되었고, 쓰면서 다정함을 배워나갔다는 이 작가의 글은 앞으로 얼마나 더 다정해질 작정일까. 그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 써나갈 테니까.

천다민 유튜브 <채널수북> 운영자*21이 사랑한 작가들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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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요즘 생활에서 가장 좋은 일이 뭐냐는 질문에 그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좋다”고 답했다. 담담히 말하며 슬며시 웃는 작가의 모습이 천진하게 느껴졌다.

“저는 되게 행복의 기준이 얕아요. 그래서 산책할 때 너무 좋고 야구 볼 때 좋고 글 쓸 때 좋고, 맥주 마실 때 좋아요. <비상문>에 그런 대사가 나와요. ‘다들 행복하려고 안달이지, 끔찍해.’ 사실 그건 제가 생각했던 문장이 아니에요. 그 문장 전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쓰고 나서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행복할 필요 있나? 너무 행복하려니 불행해지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행복을 추구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오히려 일상이 더 좋아졌어요. 그중에서도 언제 제일 좋으냐고 물으면, 소설 쓸 때가 제일 좋아요. 몰두해 있을 때요. 힘들긴 한데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그때 가장 건강하단 느낌이 있어요. 쓸 때의 내가 가장 사람답고, 깨어 있는 것 같아요.”

온 마음으로 그의 사랑과 글쓰기를 응원하며 두 시간 넘는 인터뷰를 매듭지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인을 청했던 책 앞에 작가는 “우리의 사랑을 응원한다”는 메시지로 안녕을 바라주었다. 인터뷰를 마쳤을 때는 비가 개어 있었다. 창가에서 대롱거리는 유리로 된 풍경이, 바람을 담고 흔들릴 때마다 부드러운 쨍그랑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만들어내는 세계만큼이나, 단단하고 다정한 그의 눈빛도 함께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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