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의 일생’ 표지. 새의노래 제공
아무도 안 궁금할 테지만, 만화평론가의 업무 일상을 추출해보면 이렇다. 2주 간격으로 출판만화 신간을 체크한다. 일본 만화가 대부분인 가운데 한국, 미국 및 프랑스 작품이 간혹 눈에 띈다. 한정된 예산에 사야 할 것의 목록은 너무나 길어서 그중 ‘정말 꼭!’에 해당하는 것만 산다. 나머지는 도서관 등에서 빌려 본다.
웹툰 플랫폼에는 거의 매일 들어간다. 특히 신작은 1화만이라도 읽어보려 한다. 실시간으로 읽는 게 의미 있는 작품은 매주, 한번에 보는 게 좋은 작품은 어느 정도 쌓였을 때 한꺼번에 챙겨 본다. 의식적으로 노력해도 웹툰은 너무 많아서 다 읽을 수 없다. 중간 하차율이 매우 높고 플랫폼에 따라서는 아예 보지 못한 작품도 꽤 생긴다. 이렇게 웹툰과 출판만화를 챙겨 보면서 추천할 작품, 이야기할 작품을 한 해 스무 작품 남짓 건진다. 그럼에도 놓치는 작품은 늘 있다.
마스다 미리의 2024년 출간작 ‘누구나의 일생’(새의노래)은 놓친 작품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마스다 미리 작품은 나와도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한동안 이어졌다. 2012년 한국어로 소개된 뒤 30종 넘는 만화를 선보이며 한국 독자와 만난 베스트셀러 작가지만, 출간 속도를 따라가기 버거웠다. 일상 곳곳에서 이야깃거리를 길어와 픽션과 논픽션 사이 어딘가에서 크고 작은 감상을 선사하는 좋은 작가임이 분명하지만, 몇 권 읽고 나니 더 궁금하지 않았다. 신간 체크에서 마스다 미리 만화가 나오면 고민도 하지 않고 넘겼을 정도로. ‘누구나의 일생’도 그렇게 넘겼을 테지만, 우연한 계기 덕에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계기는 사소했다. 운동 겸 산책 중에 만화를 키워드로 한 팟캐스트를 틀었는데, 마침 ‘며느라기’와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의 수신지 작가가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정성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읽어야만 했다. 이유는 모두 셋이지만, 결정적인 스포일러 하나는 빼고 나머지 둘만 소개한다. 어차피 안 볼 생각이라 스포일러 경고를 무시하고 이어 들었다가 후회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들었기에 읽을 결심을 내렸지만, 보면서는 내내 모르고 봤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첫 이유는 주인공이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시리즈마다 주인공이 다른데, ‘누구나의 일생’의 주인공 쓰유쿠사 나쓰코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만화가이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모두 읽진 않았지만 내가 아는 한 주인공이 만화가였던 적은 없었다. 나쓰코는 낮 동안 도넛 가게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화과자 가게의 하루코’라는 제목의 만화를 그려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있다. 일상을 잘 담아내는 전업 만화가 마스다 미리가 그리는 비전업 만화가의 일상이라니, 현실이 굴절돼 반영되는 과정을 볼 수 있을 듯해 우선 구미가 당겼다.
다른 이유는 나쓰코가 살아가는 세계다. 코로나19 대유행기를 한창 통과하던 무렵의 일본. 그러니까 마스크를 쓰고 예방주사를 맞고 비대면으로 학교 수업을 받던 바로 그 시절이다. 반면 만화 속 만화인 하루코의 세계엔 코로나가 없다. 코로나 시절 우리가 ‘뉴 노멀’로 불렀던 그 낯선 일상을 만화 속 만화의 익숙한 ‘올드 노멀’의 일상 감각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코로나 팬데믹이 전생처럼 느껴지는 지금, 당시의 일상을 웅숭깊게 관조하는 이야기를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누구나의 일생’은 코로나19가 한창 유행이던 시기 낮에는 도넛 가게에서 일하고 밤에는 ‘화과자 가게의 하루코’라는 제목의 만화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쓰유쿠사 나쓰코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새의노래 제공
‘누구나의 일생’은 실제로 코로나가 한창일 때 연재됐다. 원제는 ‘쓰유쿠사 나쓰코의 일생’으로 잡지 ‘소설신초’(小説新潮)에 2021년 4월호부터 2022년 12월호까지 연재됐고 이듬해 6월 단행본으로 엮여 출간됐다. 그만큼 코로나에 휘둘리는 시기를 실시간으로 살아가며 느끼고 생각해서 만든 이야기다. 게다가 동시대 독자와 나누고픈 말도 담겼다. 가령 ‘커피’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를 마스다 미리는 이렇게 그린다.
만화 속에서 코로나 세계를 살아가는 나쓰코는 여행을 가고 싶은데 갈 수 없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가 끝나면 대만에 가고 싶다. 퇴근길에 마스크 쓴 꼬마를 지나치며 문득 생각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면 난 저 꼬마에게 웃어줬겠지.’ 그리고 내레이션이 흐른다. ‘저 아이의 인생에 주어졌을 타인의 미소를 대체 얼마나 잃어버린 걸까.’ 이런 생각 끝에 집에 도착하면, 나쓰코는 2층 자기 방에서 만화를 그린다. 그 속에선 하루코가 다음주에 홀로 떠날 3박4일의 대만 여행을 기대하고 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도착하면 무엇을 먹을까 생각한다. 그러다 또 문득, 생각한다. ‘만약, 여행을 할 수 없는 세상이 된다면?’ 그는 코로나가 오지 않은 세계에서 상상의 형태로 이상한 세계를 추측한다. ‘역시 괴롭겠지. 안 가는 것과 못 가는 것은 다르니까.’ 길에서 만난 아이에게 방긋 웃어주고 하루코는 다시 생각한다. 그런 세계를 살아갈 마음가짐에 대해서.
현실과 닮은 만화 속에서는 코로나가 끝난 세계를 기대하고 코로나 없는 만화 속 액자 만화에서는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격리된 세계의 삶을 추측한다. 비일상이 일상이 돼버린 자리에서 이전의 일상을 이야기로 만들며 지금의 비일상을 활용한다. 이 오락가락을 마스다 미리는 실시간으로 그리고, 우리 독자는 어느 만큼의 시차를 두고 읽는다. 그러면서 코로나가 타격한 일상에 대한 특정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잃는 경험이 없었다면, 몰랐을 소중한 것에 대한 감각을 동반한 이해다. 따라서 실천의 차원에서 그것은 길에서 만난 아이에게 방긋 웃어주는 일이고, 할 수 있을 때 여행이나 만화 그리기 같은 좋아하는 무언가를 하는 일이다. 이처럼 코로나의 비일상을 사소한 일상적 용기로 연결해내는 ‘누구나의 일생’은 마스다 미리의 작품군에서 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 2024년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단편상이 이 작품에 주어진 것은 그 자리에 대한 인정이자 그 자체로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 일이다.
그래도 내게 결정적이었던 권유는 상이 아니라 팟캐스트였다. 듣지 않았다면 놓친 줄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놓치는 작품은 늘 있고, 그걸 건져 올리는 건 누군가의 부추김이다. 수신지 작가가 그랬던 것처럼 만화를 아는 사람이 정성껏 낸 목소리가 타인의 일상에 부재했을 만화 한 편을 들여놓는다. 신간을 체크하고 웹툰을 챙겨 보는 내 일상도 결국 그러려고 쌓아온 것이다. 이것이 할 수 있을 때 하고 싶은,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그러니 하나만 덧붙이자. 일본에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이 있다면 한국에는 ‘오늘의 우리만화’가 있다. 마침 15편의 최종 후보작이 공개됐으니 살펴보길 권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꼽은 ‘오늘’의 ‘우리’ ‘만화’를 놓치지 않길.
조익상 만화평론가·서원대 웹툰콘텐츠학과 교수
* 만화의 칸과 칸 사이, 칸새에서 출발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6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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