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시간 정도, 안 자고 깨어 있을 수 있으신가요?” 어떤 직업군이길래 채용 면접장에서 이런 질문을 받을까. 멍한 면접자에게 보충 설명이 날아온다. “한 번 시스템이 바뀌면 나라마다 근무 안 하는 시간에 맞춰서 쭉 (작업분을) 반영하고, 모니터링도 해야 해서.” 감이 오시는지. 국내 게임회사 사내 시스템 운영 부서다.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휴머니스트출판그룹 펴냄)를 펴낸 지은이 조경숙씨가 이 질문을 받은 건 경력채용 면접 자리에서였다. 이전에 SI(시스템통합) 업체 사내 시스템 관리부서에서 일했던 그는 새벽에도 시시각각 울려대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회사만의 특성인 줄 알았다. 면접장에서 이 질문을 받고 나서야 이런 업무 패턴이 만연해 있음을 알게 됐다.
<한겨레21>은 제1464호 표지이야기(국비 전액 지원 코딩 교육은 어쩌다 ‘청춘의 덫’ 됐을까)를 통해 개발자를 꿈꾸는 청년들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마주한 현실을 다뤘다. 그 벽을 넘어 개발자의 길 위에 선 이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장이 그렇듯, 고난의 취업 준비 생활 끝엔 마냥 꽃길만 펼쳐지진 않는다.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는 서비스 유지보수 노동자였던 지은이가 테크 업계에서 어떻게 경쟁하고 밀려나는지를 보여준다. 또 여성의 시점에서 테크 업계가 말하지 않는 이면에 대해서도 다룬다.
지금은 부트캠프 등에서 실력을 쌓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입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입사 이후 교육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10년대 초 한 SI 기업에 입사한 지은이도 3개월가량 합숙훈련을 받았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프로그래밍 강의를 듣고, 저녁을 먹은 뒤 7시부터 개발실기 과제를 풀었다. 그러다보면 자정을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교육은 지식을 알려주기 위한 차원만은 아니었다. “야근과 주말 출근이 잦고 장기간 강도 높은 업무환경에 노출되는 실제 업무 강도를 모사”한 훈련이었다.
교육받고 배치된 현장에서 마주한 것은 ‘독성 말투’와 성과 위주의 남성 중심 문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것도 모르냐?” “이건 어차피 작동 안 할 거다”와 같이 거들먹거리는 태도나 감정이 담기지 않은 기계적인 말투가 일상이었다. 이런 말투는 “개인의 성향 차이도 한몫하지만 빡빡한 일정과 과중한 업무, 이로 인한 스트레스를 개인이 해결해야 할 책무로 전가하는 조직문화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회사 외부 활동을 통해선 성폭력을 조장하는 서비스와 같은, 테크업계 이면에 있는 것을 보게 됐다. 랜덤채팅 앱이 대표적이다. 십 대 여성인권센터 아이티(IT)지원단에서 모니터링하면서 본 랜덤채팅 앱은 성착취를 의도한 듯한 기능으로 가득했다. 앱은 최소한의 형식적 의무만 지켰을 뿐,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든 제재하지 않았다. 지은이는 개발사가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쉬운 부분을 정리해 가이드라인을 배포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런 문화를 겪으며 어느 순간 지은이는 자기계발과 성장을 포기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컵을 씻고 고장 난 전선을 고치는 것과 같은, 유지하고 보수하는 일임을.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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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탈가정’(가정폭력, 성폭력, 파산 등이 원인이 돼 원가정과 단절됨을 의미) 청소년을 위한 쉼터에서 지낸 경험을 그린 자전적 만화다. 양육자의 폭력 피해가 남긴 트라우마, 우울증을 앓은 경험 등을 담백하고 진솔하게 전달한다. 저자는 “비슷한 문제를 겪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쓴 편지 같은 작품”이라고 말한다.
흔히 산불로 타버린 숲이 기후위기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여겨지지만, 또 다른 지역에서 기후위기는 숲을 키우기도 한다. 기후위기는 생태계 ‘균형’을 깨기 때문이다. 저자는 스코틀랜드, 노르웨이, 러시아, 알래스카, 캐나다, 그린란드 등 북부 수목 한계선(나무의 생존 경계)을 찾아가 기후위기의 다층적 측면을 보여준다. 복합적 해결책을 찾는다.
역사는 진보와 보수, 누구의 ‘편’도 아니다. 저자는 역사를 “단순 가공이 필요한 중간재들, 장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소재와 원료들이 질서 없이 뒤섞여 있는 끝없는 대지”에 비유한다. 책은 역사가들이 어떤 자세와 도구로 역사를 가공하는지, 우리가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지 전공자가 아니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였다.
자칫 역사에 묻힐 뻔한 폴란드 유대인 여성 레지스탕스들의 이야기를 10년에 걸친 연구와 취재로 발굴해낸 책. 저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후손이다. ‘학살’ 대 ‘저항’의 이분법적 서사에 국한되지 않는 생생하고 입체적인 ‘삶’들을 기록했다. 폴란드 유대인 여성들이 지하 소식지 발간과 저항 계획 수립은 물론, 무기 밀수, 위장, 화염병 투척 등에 참여하는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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