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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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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안다’는 착각

‘이야기 공장’에 나가기 전 학생들이 해야 할 경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기 위한 경험
등록 2023-03-17 16:29 수정 2023-03-20 00:26
정해나의 만화 <요나단의 목소리>는 독자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독자에게 이야기의 희망이 있다. 딜리헙 화면 갈무리

정해나의 만화 <요나단의 목소리>는 독자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삶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독자에게 이야기의 희망이 있다. 딜리헙 화면 갈무리

정해나의 <요나단의 목소리>. 딜리헙 화면 갈무리

정해나의 <요나단의 목소리>. 딜리헙 화면 갈무리

전례 없는 대학의 위기 속에 개강을 맞았다. 내가 가르치는 대학은 문화 콘텐츠 창작에서 학생들이 선호하는 학교라 큰 문제는 없었지만 수도권임에도 주변 대학들은 학생 모집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몇몇 전문대학은 모집 학생의 절반을 겨우 채웠다. 이 때문에 어떤 학교는 입학생에게 파격적인 선물과 장학금을 주고 어떤 대학은 ‘입시 사관학교’를 표방해 사활을 걸고 학생을 모집한다. 이에 어떤 교수들은 “대학은 학문을 추구하는 곳이지 취업훈련소가 아니다”라고 항변한다.

코로나19 이후 처음 맞는 개강인지라 총장부터 학생회장까지 교문에서 학생들을 맞이했다. 아침에는 배고픈 학생들을 위해 쿠키를 준비하고 저녁에는 돌아가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라고 카네이션 꽃을 준비했다. 이른바 ‘덕후’가 많이 오는 학교라 교수들이 모인 것을 보고 흠칫 놀라기도 했지만 학생들은 꽃을 받고는 이내 웃는다. 교수들보다 학생회 일꾼들이 더 좋아하며 늦게까지 남아 동료 학생들에게 꽃을 선물했다. 첫 강의를 하러 가는 길, 웃는 학생들을 보며 저들에게 대학이 어떤 곳이 되는 게 가장 큰 선물이 될지 생각했다. 여기서 저들이 무엇을 해야 이곳을 ‘학교’로 기억할까. 학교란 무엇인가?

연극 속 사람을 직접 만나보니

지난 학기 같이 공부한 연출을 전공하는 현지가 떠올랐다. 현지가 지난 학기에 연출한 작품은 지역 소도시에 있는 가족이 운영하는 자동차정비 업소를 배경으로 한다. ‘첫 번째 관객/독자’로서 첫 번째 총연습을 보고는 어디서 어디까지를 이야기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소도시에서 자영업으로 생산직 노동을 하는 40대 남성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연출하는 현지나 배우들의 생활세계에 없던 인물이었다. 알지 못하는 세계를 어떻게 그려낼 수 있을까?

몇 주가 지나고 최종 연습을 다시 관극하다 깜짝 놀랐다.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버지는 가족에게 무뚝뚝했지만 아들을 위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는 비굴해 보일 정도로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이야기했다. 겉으론 대범한 척하지만 혹시나 아들에 대해 잘못된 말이 나올까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장면도 제대로 표현했다. 무대에 누가 등장하는지에 따라 아버지의 얼굴과 말과 동작이 다채롭게 변하면서 입체적 인물이 됐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사실 막막했어요. 제가 아는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헤매기만 했는데 마침 무대장치를 나르던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가까운 정비소로 갔어요. 딱 작품의 배경이 되는 정비소였어요. 거기도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일하더라고요. 그 아버지를 보며 제가 뭘 잘못 생각했는지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는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않더란다. 현지의 머릿속에 있던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인 그런 아버지였다. 그런데 정비를 맡기려고 손님이 들어오자 아버지의 태도는 180도로 달라졌다. 한 명의 고객도 놓치지 않고 그 비위를 맞추려 애쓰며 뭔가를 설명하는데 굽실거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는 순간 자기 머릿속에 있는 40대 남성 육체노동자의 모습이 얼마나 피상적인지 확 깨달았다고 한다.

현지의 머릿속에 있는 인물에게는 ‘생활’이 없었다. 생활하는 사람이 없고 단지 ‘남성’ ‘생산직’ ‘자영업’ ‘아버지’ 등 몇 가지 키워드로 분해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그 키워드들이 의미하는 특징만 잘 파악하고 잡아내면 인물이 살아나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이 키워드의 본질이 ‘정보’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 중 한 명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우울’이라고 하면 유튜브나 검색으로 우울의 특징에 대한 정보를 모은다. 우울한 인물의 특징적인 말과 행동에 대한 정보를 모아 그 정보를 잘 조합하면 우울한 인물이 구축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물을 이해하고 구축하려는 학생들조차 관성적으로 유튜브를 검색하고 그것에 의존한다.

빨치산‘이기에’ 그리고 빨치산‘임에도’

그러나 검색으로 모든 정보를 조합한다고 그 인물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한 인물을 이해한다는 건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그를 구성하는 정체성에 ‘의해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불구하고’ 나오는 게 있다는 점이다. 그가 가부장적 인물이라면 그의 어떤 행동은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고 반대로 그가 가부장적‘임에도 불구하고’ 나오는 말과 행동이 있다. 이 ‘때문에’와 ‘불구하고’를 가르는 것, 거기에 ‘관계’가 있다. 이 둘 사이의 변화를 포착하고 그에 따라 등장인물 사이에 긴장이 흐르며 무대에는 장면이 구성된다.

그렇기에 한 사람을 이해하고 장면을 구성할 때 사람의 내면에 파고드는 것이 한 축이라면 다른 축에는 그가 누구와 함께 있고 어떻게 행동하고 말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에 대해 최근에 나온 최고의 작품이 정지아의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다. 전봇대에 머리를 부딪치고 갑자기 돌아가신 빨치산 아버지. 그 아버지의 장례식에 아버지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한국전쟁에서 빨치산 시기에 아버지와는 반대로 우익 편에 섰던 사람부터 빨치산 동료까지, 아버지로 인해 연좌제에 연루돼 육사 꿈을 접어야 했던 사촌오빠부터 동네에서 만나 담배 친구가 된 베트남계 청소년까지. 장례식에 나타나는 아버지 주변 인물들과 그 인물들의 관계에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하나둘 만나가며 주인공은 아버지에 대해 알지 못하던 모습을 만난다. 이 만남과 부딪침이 바로 ‘사건’이다.

때로 아버지는 빨치산‘이기에’ 어떤 행동을 하고 때로 아버지는 빨치산‘임에도’ 전혀 다른 행동을 한다. 그것은 전혀 분열적이지 않다. 분열적임에도 통일돼 있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관계를 따라가며 ‘신실한’ 사람으로서 아버지를 만난다. 아버지는 빨치산이라는 자신의 진정성에만 몰두하며 관계를 돌보지 않은 사람으로 여겨졌지만 장례식을 통해 아버지의 관계를 만나면서 사실 아버지는 관계에 매 순간 충실하려고 했던 신실한 사람으로 새롭게 발견된다. 물론 그 진정성과 신실성은 어긋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겹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때문에 학생들에게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할 때 집요하게 묻는 말이 있다. 이 말과 행동을 하는 순간 주인공은 누구와 함께 있냐고 질문한다. 이 순간 그의 눈에는 누가 있으며 귀에는 누구 말이 들리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일 수도 있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누군가일 수도 있다. 누구와 함께 있는지에 따라 똑같은 대사와 동작이더라도 지문에는 표시되지 않는 주인공의 말과 행동이 결정된다.

정지아의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분열적으로 통일된 캐릭터가 등장한다.

정지아의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분열적으로 통일된 캐릭터가 등장한다.

체험을 능가하는 건 아직 없기에

그렇기에 주인공의 말과 행동을 살아 있도록 입체적으로 구성하려면 주인공이 누구와 함께 있을 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알아야 한다. 밥 먹으며 부인에게는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는 법 없이 타박을 놓다가도 밖에 손님이 오면 용수철처럼 뛰어나가 굽실거리는 모습은 키워드로 분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총체적인 생활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 생활세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대한 정보/의미가 아니라 느낌을 살릴 수 있다. 작품은 코드화된 의미로서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관객이나 독자가 느껴서 의미를 발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존재의 생활세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아직 체험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 체험은 글자가 의미하듯이 무엇을 만났을 때 그 무엇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가는 충격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충격이 없다면 느낌이 없다. 이 충격은 멀리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잘 생기지 않는다. 구경도 아닌 검색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물론 검색도 충격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검색으로 충격을 받으면 ‘아직’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그 만남에 대한 욕망을 촉발하고 만남을 주선하는 것, 그것이 학교가 아닐까.)

더구나 검색의 경우 그마저도 생략하고 농축한 ‘정보’만 얻는 것이기에 생활세계의 의미는 코드화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생활세계에서 삶에 대한 느낌을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정보/의미 영역으로 명확히 떠오르지 않는 인간의 몸에 덕지덕지 붙은 그 감각들, 그 감각을 작품에서 구현하려면 타인의 생활세계에 들어서야 한다.

물론 타인의 생활세계에 발 디딘다고 그 생활세계의 느낌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경험이든 검색이든 타인의 삶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한 진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검색으로 정보를 얻는 것은 ①그 정보로 의미를 명확하게 구축하고 관객이나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고 ②그러면 작품이 성공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타자를 명쾌하게 이해했다는 이 착각이 작품을 망친다.

이 착각이야말로 동시대성의 핵심이다. 몇몇 철학자의 말처럼 누구나 몇 번의 검색으로 자기가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냉소적 태도’가 이 시대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냉소라는 동시대성을 직시하는, 희귀한 소수지만 소중한 동시대인이 있다. ‘신중한 독자/관객’이다. 이들은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안다. 이 시대에 신중한 독자란 자신의 생활세계에서 이미 타인의 세계에 닿는 것, 그것이 불가능함에 깊은 절망을 느끼고 또한 이 절망을 이해한 사람들이다.

절망하고, 절망을 이해하는 독자/관객

이야기의 희망은 이 절망했지만 동시에 이 절망을 이해한 신중한 독자/관객에게 있다. 이해할 수 없고 만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 이 절망을 잘 알기에 이들은 함부로 이해한다거나 공감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말이 얼마나 무례할 수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명확한 이야기보다는 알 수 없다는 것, 그 가운데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선호하며 그것에 귀 기울인다.(이런 이야기로 얼마 전 출간된 만화 <요나단의 목소리>를 꼽을 수 있다.)

학생들에게 검색과 정보가 아니라 타인의 생활세계와 만나고 경험하는 일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 만남과 경험이 생활세계를 이해하게 하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로 학생들에게 만남과 경험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불가능함을 알기에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이 ‘신중한 독자/관객’을 만났으면 한다. 그런 독자를 만나는 작품을 만들려 시도하고 또 그 시도를 위한 만남의 경험, 이거야말로 ‘이야기 공장’에 나가기 전 학교에서 학생들이 경험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공장에서 이야기꾼으로 잘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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