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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이전의 민주주의가 진짜다

불순한 자유 대신 시민의 존엄 강조한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
등록 2023-03-17 12:38 수정 2023-03-23 04:36

“이 정권은 우리 헌법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내려 합니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고 자유는 정부의 권력 한계를 그어주는 것입니다.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요 전제입니다.”

2021년 6월, 전직 검찰총장이던 윤석열의 대선 출마 선언의 한 대목이다. 2022년 5월 대통령 취임사에선 ‘자유’라는 단어를 35차례나 말했고, 광주 5·18 기념식 연설에선 “오월 정신은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그해 12월에는 “자유민주주의를 깨려는 세력과는 절대 타협해선 안 된다. 이를 바로잡지 못하면 그건 국가가 아니다”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대한민국 헌법 어디에도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없다. 다만 헌법 전문과 제4조에 각각 한 차례씩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해석을 두고는 정설 없는 이견이 맞선다. ‘자유민주주의’가 뭘까. 그냥 민주주의와 다른 걸까. 그 ‘자유’는 누구의 어떤 자유일까.

자유민주주의의 엄밀한 개념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한 묶음으로 혼종된 용어다.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주의>(노경호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는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조사이아 오버 교수(역사학·정치철학)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원초적 민주정”부터 유럽의 계몽기와 근대를 거쳐 20세기 중반까지 민주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정치사상의 경합과 명멸을 조망하면서 민주주의의 참뜻과 가능성을 탐색한 책이다. 서구에서도 ‘자유주의적 민주정’이란 관념은 1930년대 들어서야 출현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인 1940~1950년대에야 보편화했다. “자유주의와 민주정이 양립할 수 있는지 상호 배타적인지를 알려면 우선 민주정과 자유주의를 따로 떼놓고 탐구해야” 하는 이유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정치체제를 일컫는 단어들은 ‘권력 주체’와 직결됐다. 일인 군주제는 오토크라시(auto+kratos) 또는 모나키(monos+arche), 소수 귀족 과두정은 아리스토크라시(aristoi+cratos) 또는 올리가르키(oligoi+arche) 등 합성어다. 민주주의(데모크라시)는 ‘demos’(인민)와 ‘kratos’(권력·힘)가 합쳐진 말이다. 이때 크라토스(kratos)는 ‘힘/권력’과 ‘억제/제약’의 뜻을 함께 갖는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에는 특정 세력이 아닌 모든 인민이 다스린다는 의미뿐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구속력을 지닌 규칙을 만들고 시행”한다는 함의가 있다. 다수의 횡포가 아니라 시민에 의한 절제된 통치다.

한편 “자유주의는 17~20세기까지 종교전쟁, 파시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등 여러 문제에 맞선 응답”으로 발전해왔다. 개인의 가치관과 권리, 재산 소유와 상속에 대한 외부의 간섭에 반대하고, ‘다수의 횡포’에 거부감을 보이며, 사회적 갈등의 불가피성과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일부 자유주의 정치 이론가들은 자유주의가 빠진 민주정을 마치 루소가 꿈꾼 ‘하나의 일반의지’ 혹은 ‘무제한적 다수결주의’, 심지어 ‘반자유주의’로 그린다. 그러나 “민주정과 자유주의를 혼동하는 것이 오해인 것처럼,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정을 자유주의의 반정립(안티테제)으로 간주하는 것도 오해”이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착종된 것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 대다수가 세습신분제를 철폐한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결실인 민주주의를 채택한 것과 맥락이 닿는다.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절대적 가치로 옹호한다. 현대 세계에서 거의 모든 나라는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그러나 그 앞에 ‘○○’ 또는 ‘△△식’이란 수식어가 붙는 순간 ‘원초적 민주정’은 왜곡될 가능성이 크다. 인류의 수천 년 민주주의 역사 중 100년도 채 안 된 ‘자유민주주의’도 그중 하나다.

지은이는 원초적 민주정의 조건으로 ‘정치적 자유’ ‘정치적 평등’과 함께, 공동체의 규칙과 협력에 참여함으로써 지켜지는 ‘시민적 존엄’을 특히 강조한다. 시민적 존엄은 “극단적 평등주의와 극단적 자유 지상주의가 분배 정의에 대해 저마다 내놓는 주장에 저항함으로써 (…) 스스로를 강화하는 사회적 균형”을 보전한다. 지은이가 “자유주의 없는 민주정이 다양성을 지닌 공동체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인간적 번영의 가능성을 가장 지지해주는 형태일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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