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진은 독일 베를린에 사는 레즈비언 창작자다. <굉장한 여자 굉여>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익명의 베를리너린>이라는 팟캐스트를 만든다. 그가 주목받은 계기는 레즈비언 사회에서 한번쯤 봤을 법한 인물을 연기하는 롤플레잉 콘텐츠를 만들면서다. ‘예술밖에 모르는 바보 홍상수 레즈’ ‘8년 짝사랑 죽어도 못 잊는 에피톤 프로젝트 레즈’ ‘어머니 같은 여자가 이상형인 가부장 부치’ 등. 그는 어쩌다 타인을 연기하게 됐을까?
“어떤 상황에 처하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았어요. 저 사람은 왜 그럴까. 대부분 상대가 입체적인 인물일 때 그렇더라고요. 그걸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 게 제 삶이었어요. 그래서 롤플레잉도 한 것 같아요. 누군가의 행동을 곱씹어보면 나름의 뭔가가 발견되니까.”
그래서일까. 그가 주목하는 인물들은 조금씩 다 비호감이다. ‘이미지 메이킹의 달인 자기관리 레즈’ 편도 그렇다. “미라클 모닝 하고 주식에 빠져 있는 레즈와 소개팅하는 콘셉트예요. 주인공은 ‘긴머부’(긴머리 부치의 줄임말)예요. 자본주의적 성공으로 자신이 정상 사회에 편입될 수 있다고 믿죠. 그러면서 다른 레즈들에게도 ‘관리 좀 해라’ 하는 게 너무 싫은 거예요.” 하지만 캐릭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생각이 달라졌다. “막상 그 사람을 연기해보니… 너무 안타까운 거예요. 정상 사회에 끼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 자기가 생각한 자기관리에 계속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이구나. 정상 사회에 들어갈 수 없는데 계속 부딪히는 과정이구나, 이해하게 됐어요.”
타인의 안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통해 그는 인권 감수성 교육을 스스로 해버렸다. “이해 안 되는 지점에서 포기해버리면 상대는 내게 영원히 이해 안 되는 사람으로 남잖아요. 그렇게 되지 않고 그걸 해결하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일이거든요. 남들에게도 이야기하고 싶고. 우리 사회 간극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아요. ‘이런 사람 너무 싫어’ 싶을 때도 있지만, 동시에 그게 나이기도 하거든요. 나도 그런 면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까지 간다면 어떨까.”
그런데 2022년 12월5일 청천벽력 같은 공지가 올라왔다. 그가 유튜브 활동을 마무리한다는 것이다. “롤플레잉이 외부로 쏠린 관심이었다면, 이젠 집중해서 내면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제가 보기보다 제 이야기를 잘 못하거든요. 농담으로 때우거나, 화제를 돌리거나, 비아냥대거나. 광대들이 좀 그렇잖아요. 이제 용기가 생겼어요. 내부의 진짜 넘지 못하는 것들을 넘어보고 싶어요. 좀더 나를 관통하는 이야기. 이해가 안 되는 내 모습. 이런 것들까지도.”
우리는 누군가 멋진 걸 만들어내면 계속 그 비슷한 걸 만들어주길 원한다. 하지만 사람은 살아 있는 유기체다. 관심사도, 생각도 계속 변한다. 더 긴 호흡의 창작을 해보고 싶다는 그에게 어떤 꿈을 꾸는지 물었다. “베를린이 좋은 게 여기 살면 부자 안 돼도 되거든요. 소비가 부끄러울 수 있다는 것도 배웠고요. 그러니 너무 큰 욕심 가지지 말고, 세금 꼬박꼬박 내면서, 제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려고요. 창작자로서 꿈이 있다면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제가 만든 것을 관심 있게 다뤄주는 것, 그럴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거예요. 최근 ❶ <씨네21> 김혜리 기자님의 듣는 잡지 <조용한 생활>의 정서경 작가 편, 류성희 미술감독 편을 들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이렇게나 할 얘기가 많은 창작이라니, 동시에 이렇게나 알아봐주는 인터뷰어를 만날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다.”
베를린(독일)=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
❶ 김혜리의 <조용한 생활> 정서경 작가 편
<조용한 생활>은 ‘팟빵’에서 발행하는 오디오매거진이예요. <씨네21>의 김혜리 기자가 진행하는 팟캐스트고 유료 구독제로 운영되죠. 바로 구독을 추천하고 싶지만 확신이 없다면 유튜브에 무료 공개된 에피소드를 먼저 권하겠어요. 최근 베를린에서 <헤어질 결심>을 상영했어요. 정서경 작가 편, 류성희 미술감독 편을 주변에 보내주니 다들 구독을 결심하더라고요. 밀도 있는 기획과 정갈한 진행에 들을 때마다 감탄하곤 해요.
❷ <밥맛 없는 언니들> 수빙수 편
https://www.youtube.com/watch?v=7bJMt42rQ6E
저는 먹방을 보는 게 힘들어요. 온갖 재료를 섞어서 맛을 구분할 수도 없게 만든 메뉴를 입에 욱여넣는 장면을 보면 기운이 빠져요. 베를린에서 영주권을 따기 전까지 5년 동안 주방에서 일했었는데요. 밤에 일을 마치면 허기인지, 괴로움인지도 모를 감정에 홀린 듯 폭식을 하곤 했어요. 당연히 건강에 안 좋았죠.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어요. 어느 날 <밥맛 없는 언니들>을 보는데 제가 근래에 얼마나 과격하게 먹었는지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오롯이 맛을 즐기며 적당량을 먹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콘텐츠였어요.
❸ <지선씨네 마인드> 위플래쉬 편
https://www.youtube.com/watch?v=6QgoFHVzgr8
박지선 범죄 행동 연구자가 읽어 주는 영화 이야기에요. 범죄 행동에 대한 분석과 깊이 있는 영화 얘기를 들려줘요. <위플래쉬> 편에서는 플래처 교수가 얼마나 가스라이팅에 능한 가해자인지, <밀양>에서는 주인공인 신애가 어떻게 상실의 아픔을 극복하는지를 설명해주는 식이에요. 캐릭터를 읽는 새로운 방법을 배웠어요.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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