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을 지키고 성찰하는 데 공을 들였고
책 속의 성현을 저버리지 않았다
삼십 년 동안 어려운 일에 힘써왔는데
송정(송현)에서 한번 취하니 헛일이 됐구나”
-정도전, ‘스스로 비웃다’(자조), 1398년 8월26일
2021년 11월10일 문화체육관광부는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기증 작품을 소장·전시할 미술관을 서울 종로구 송현동에 짓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반대하고 있다. 정부가 공청회 등 공론화 과정 없이 졸속으로 밀어붙이고 있고, 국립 문화시설이 집중된 서울에 또 문화시설을 짓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송현동은 곡절이 많은 땅이다. 송현동이 가장 먼저 역사에 등장한 것은 1398년 4월16일이다. 그날 <태조실록>은 “경복궁 왼쪽 언덕(송현)의 소나무가 마르므로 그 가까운 언덕의 집을 철거하라고 지시했다”고 적었다. 이 땅이 풍수상, 보안상 중요한 자리임을 보여준다.
송현에서 일어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차 왕자의 난’이다. 요동 정벌에 따른 사병 혁파로 궁지에 몰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정안대군 이방원이 1398년 8월26일 당시 집권파이자 경쟁자인 정도전과 그의 세력을 모두 살해하고, 아버지 이성계를 강제로 퇴위시킨 일이다.
이성계-정도전과 이방원의 마찰이 시작된 것은 1392년 8월20일이었다. 이날 이성계는 세자를 막내아들인 이방석으로 결정했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한 달 사흘 만의 급한 결정이었다. 맏아들 이방우도 아니고, 공이 많은 다섯째 아들 이방원도 아니어서 결국 참극의 씨앗이 됐다.
이성계-정도전 세력과 이방원 세력의 충돌이 일어난 직접적 계기는 사병 폐지였다. 1398년 3월부터 정도전과 남은은 사병(시위패)을 폐지하고 관군을 만들라고 이성계에게 요청한다. 이에 따라 이방원이 보유했던 사병도 1398년 8월 중순 폐지됐다. 이로써 이방원은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마침내 이방원은 측근인 이숙번과 함께 쿠데타를 준비했다. <태조실록>은 정도전이 쿠데타를 먼저 모의해서 이방원이 “약자로서 선수를 쳤다”고 썼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꾸로였다.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역사학)는 “정도전은 당시 권력을 장악했고, 이방석을 세자로 세워놓은 상태여서 쿠데타를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쿠데타가 필요한 사람은 이방원이었다”고 설명했다.
1398년 8월26일, 이성계가 와병 중이어서 이방원 등 왕족들은 만일에 대비해 근정문 밖 서쪽 행랑에서 숙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 8시께 이방원이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화장실로 갔다가 준비한 말을 타고 경복궁 영추문으로 나가버렸다. <태조실록>은 당시 이방원이 “상황이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말을 타고 준수방 잠저(사저)로 간 이방원은 이숙번 등 측근이 모아온 병사들을 데리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군이라고 해봐야 기병 10명, 보병 9명, 시종과 노비 10여 명 등 30명 정도였다. 이미 사병을 빼앗긴 뒤였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암구호를 ‘산성’으로 정한 뒤 정도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경복궁 남동쪽 ‘송현’에 있던 남은 첩의 집이었다. 이때가 밤 10시께였다.
승자가 기록한 <태조실록>송현의 남은 집에서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이직, 이근, 장지화 등이 등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쿠데타군은 그 집을 에워싼 뒤 이웃집 세 곳에 불을 질렀다. 정도전과 남은, 이직은 몸을 피했고 심효생, 이근, 장지화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태조실록>은 이방원이 남은의 집 이웃에 지른 불로 송현 하늘에 불꽃이 가득했다고 적었다. 땅엔 피가 흘렀다.
정도전도 이웃집에서 붙잡혔다. 그 이웃집 주인이 쿠데타군에게 “배가 불룩한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다”고 신고했기 때문이다. <태조실록>은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예전에 공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살려주시오”라고 목숨을 구걸했다고 적었다. 그러나 원한이 가득했던 이방원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고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느냐?”고 꾸짖고 바로 죽였다. 쿠데타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태조실록>에 적힌 이런 이야기가 실제와 달랐을 것이란 의견이 많다. 1408년 이성계가 죽은 뒤 <태조실록>이 태종(이방원) 시절에 편찬됐기 때문이다.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정도전을 ‘만고의 역적’으로 만들기 위해 사실을 왜곡했을 것이다. 이 글의 맨 앞에 소개한 정도전의 마지막 시 ‘스스로 비웃다’가 정도전의 최후에 더 잘 어울린다. 이 시는 <태조실록>이 아니라, 정도전의 <삼봉집>에 실렸다.
송현이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 순조 때다. <한경지략>은 “북쪽 송현의 재상 심상규의 저택에도 능소화가 있다”고 적었다. 심상규는 조선 후기 서울의 대표적 권력 가문인 청송 심씨이며, 당대 제1의 문장가였다. 이 집은 순조의 딸 복온공주와 남편 창녕위 김병주(장동 김씨)에게 넘어갔고, 다시 손자뻘인 김석진이 상속받았다. 판서를 지낸 김석진은 1910년 한국강제병합에 항의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력의 부침에 따라 1910년 직후 송현동은 순종의 장인인 윤택영과 그의 형 윤덕영 등에게 넘어갔다. 윤씨 형제는 악질 친일파로 고종과 순종을 협박해 한국강제병합을 관철했다. 이들은 1920년 전후 송현동 땅을 일제의 식산은행에 넘겼고, 식산은행은 여기에 사택을 지었다. 해방 뒤 이 땅은 미국에 넘어갔고, 50년가량 미국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로 사용됐다.
송현동이 다시 한국 소유가 된 것은 2000년 삼성생명이 미국 정부로부터 이 땅을 1400억원에 매입하면서부터다. 당시 삼성은 이 땅에 미술관을 지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건희 기증관이 지어진다면 정부가 삼성의 꿈을 이뤄주는 셈이다. 2008년 삼성으로부터 이 땅을 2900억원에 사들인 대한항공은 호텔을 지으려 온갖 로비를 벌였으나, 역시 실패했다. 현재 이 땅은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대한항공에서 매입해 서울시의 서울의료원 남쪽 터와 교환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가격은 5천억원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대통령경호처,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 유산>, 2019
유본예 지음, 박현욱 옮김, <역주 한경지략>, 민속원, 2020
홍성태 엮음, <경복궁 옆 송현동 살리기>, 진인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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