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역사 속 공간] 일제 총독 관저만 찾아다니는 한국 대통령실

윤 당선자, 1939년 지어진 경무대 총독 관저에서 1910년 지어진 용산 총독 관저로 옮기는 꼴
등록 2022-04-09 10:53 수정 2022-09-24 11:17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인 청와대는 1939년 지어진 일제의 총독 관저에서 비롯했다. 1960년대 청와대(옛 총독 관저) 모습. 공공 저작물(퍼블릭 도메인)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인 청와대는 1939년 지어진 일제의 총독 관저에서 비롯했다. 1960년대 청와대(옛 총독 관저) 모습. 공공 저작물(퍼블릭 도메인)

1905년 말 을사늑약을 맺은 일제는 1906년 2월 조선에 통감부(뒤의 총독부)를 설치했다. 1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통감부는 임시로 현재의 서울 광화문 앞 ‘외부’(외교부) 건물(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리)을 쓰다가 1907년 서울 중구 예장동 ‘왜성대’(서울애니메이션센터 일대)에 새 건물을 지어 옮겼다. 통감 관저는 처음부터 왜성대 일대에 마련됐다. 1885년부터 있던 일본 공사관 건물을 통감 관저로 바꿨다. 현재는 그 자리에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조성돼 있다.

이 통감 관저는 한-일 병합의 현장이었다. 당시 총리대신 이완용은 1910년 8월22일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에서 순종 이척을 모시고 내각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일본과의 병합 조약을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순종은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해 조약을 체결하도록 했다. 오후 4시 이완용은 왜성대의 조선 통감 관저로 가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과 만나 한-일 병합 조약에 서명했다. 이렇게 문서로 나라와 백성을 일제에 넘겼다.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엔 당시 상황이 이렇게 적혀 있다. “황제(순종) 폐하의 소명을 받들기 위해 흥복헌에서 만나뵈었다. 말씀(칙어)을 받들고 전권위임장을 받아 곧장 통감부(통감 관저)로 가서 데라우치 통감과 만나 일-한 합병 조약을 상호 조인하고 그 위임장을 궁내부에 다시 제출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들어가려는 용산 국방부 청사는 1910년 지어진 용산 총독 관저 부근에 있다. 일제강점기 용산 총독 관저.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가 들어가려는 용산 국방부 청사는 1910년 지어진 용산 총독 관저 부근에 있다. 일제강점기 용산 총독 관저.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김영삼 대통령 때 경무대 총독 관저 철거

이 통감 관저는 병합 조약과 함께 ‘총독 관저’로 이름이 바뀌었다. 통감부도 총독부로 바뀌었다. 이 ‘왜성대’ 총독 관저에서 1906년 이토 히로부미부터 1939년 미나미 지로까지 모두 9명의 통감과 총독이 조선을 지배했다. 1939년 미나미 총독은 관저를 경복궁 북쪽의 ‘경무대’(현재의 청와대, 경복궁 후원의 별칭)로 옮겼다. 앞서 1926년 총독부가 경복궁 안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1939~1945년 미나미 등 3명의 총독이 경무대 관저에서 살았다.

경무대 총독 관저는 1945~1948년 존 하지 미국 군정청 사령관의 관저를 거쳐 1948년부터 대한민국 대통령의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됐다. 여기서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등 6명의 대통령이 일했다. 1990년 새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지어진 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역사 바로세우기’ 정책에 따라 철거됐다. 새로 지어진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등 7명의 대통령이 사용했다.

그런데 일제의 총독 관저는 왜성대와 경무대 외에 한 곳이 더 있었다. 바로 조선 주둔군 사령부가 있던 ‘용산 병영’ 안이었다. 용산 총독 관저는 한-일 병합 시기인 1910년 지어졌는데, 왜성대나 경무대의 총독 관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아름다웠다. 건평이 본 건물 606평, 부속 건물 170평 등 776평이었고, 네오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건물이었다. 조선 민중에겐 ‘용산 아방궁’으로 불렸다.

애초 이 건물은 1904~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 주둔군 사령관(1904~1912년)이 자신의 관저로 지었다. 그러나 워낙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완공된 1910년부터 사령관 관저가 아니라, 사실상 총독의 영빈관과 연회장으로 사용됐다. 이에 따라 조선 주둔군 사령부는 1911년 총독 관저를 새로 지은 뒤 사령관 관저와 맞바꿨다. 결국 애초의 사령관 관저는 총독 관저, 총독 관저는 사령관 관저가 됐다.

일본군 사령관이 지은 ‘용산 아방궁’

그 뒤로 용산 총독 관저는 해방될 때까지 주로 총독의 영빈관과 연회장으로 사용됐다. 1930년대 말까지 순종과 순종 비, 외국 손님, 언론인, 장수 노인 등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남산 총독부나 경복궁 총독부와 떨어져 있어 관저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 뒤엔 미국 군사고문단의 장교클럽으로 활용되다가 6·25전쟁 때 폭격으로 크게 훼손됐다.

용산 총독 관저 자리는 조선 때 와서(기와 제조 관청)가 있던 곳으로 현재는 1971년 지어진 미군 121병원 건물이 남아 있다. 용산 조선 주둔군 사령관 관저는 조선 때 신촌(새말)이란 마을이 있던 곳으로 현재는 드래곤힐 로지라는 미군 호텔이 들어서 있다. 용산 총독 관저 자리는 머잖아 한국에 반환되지만, 드래곤힐 로지 자리는 미군의 요구에 따라 반환되지 않는다.

2022년 3월2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는 대통령 집무실을 현재의 청와대에서 용산 국방부 건물로 옮기겠다고 밝혔다. 1948년 경무대(현 청와대)가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된 지 74년 만이었다. 윤 당선자는 청와대를 떠나려는 이유 중 하나로 ‘제왕적 대통령’을 꼽았다. 그런데 청와대 공간의 제왕적 성격은 애초 이곳이 조선 총독의 관저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청와대뿐 아니라 대통령실이 새로 옮겨가는 용산 국방부 역시 일제의 조선 주둔군 사령부였고 조선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는 점이다. 현재의 국방부 건물에서 총독 관저는 500m 남쪽에 있었고, 조선 주둔군 사령관 관저는 300m 동쪽에 있었다. 현재의 국방부 자리는 일제강점기에 영관급 장교와 하사관의 관사 자리였다. 이곳은 6·25전쟁이 끝난 뒤 미국의 원조기구인 대외활동부(FOA)의 가족 주택으로 사용되다 1970년 국방부에 양도됐다.

대통령직인수위 “역사 문제는 답변 어려워”

전문가들은 대통령실을 새로 결정하면서 역사 문제에 대한 검토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용산이 일제의 강점과 관계가 깊다는 점에 대해 고려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일제의 경무대 총독 관저에서 용산 총독 관저로 옮기는 모습이 됐다. 대통령실을 옮긴다면 그 장소의 역사에 대해 살폈어야 한다”고 말했다.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도 “김영삼 전 대통령 때 일제 역사를 바로잡는다며 청와대 총독 관저와 총독부 건물을 모두 헐었다. 그런데 윤 당선자가 제왕적 대통령에서 벗어나겠다면서 다시 일제의 사령부와 총독 관저가 있던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몰역사적 결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윤 당선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원일희 부대변인은 “정책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그런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드리기 어렵다”고 밝혔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김천수,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 용산구청, 2017
이순우,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하늘재, 2010

*김규원의 역사속 공간: 역사와 정치, 공간에 관심이 많은 김규원 선임기자가 옛 서울의 공간에서 오늘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