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리 오랑캐 모래땅에 날마다 바람 부니
천지가 모두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내 집은 본디 맑고 깨끗한 땅에 있으니
날리는 붉은 먼지 하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상헌, ‘날마다 바람 부니’(일일풍), 1641년 청나라 선양에서 쓴 시
왜란과 호란을 거친 조선 후기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둘은 과거 조선에 조공을 바치던, 무식한 오랑캐(청나라)에 항복한 치욕을 잊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이념의 창시자이자 화신은 김상헌(1570~1652)이다. 김상헌을 대의명분의 상징으로 만든 일은 1636~1637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일어났다. 인조와 신하들이 남한산성에 들어간 지 한 달쯤 지난 1637년 1월17일, 청 태종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강경한 국서를 보냈다. “네가 내 나라를 도적이라 했는데, 내가 과연 도적이면 네가 어찌 도적을 잡지 못하느냐? 네가 살고자 하면 성에서 나와 명령에 따르고, 싸우고자 한다면 한번 싸우자. 두 군사가 서로 싸우면 자연히 하늘의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항복하든지 싸우든지 결정하라는 협박이었다.
다음날 1월18일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은 답서를 쓴다. “황제께서 만물을 살리는 천지의 마음을 갖고 계신다면, 작은 나라(조선)가 어찌 살려주고 길러주는 대상에 포함되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용서하실 것이기에 공손히 은혜로운 분부를 기다립니다.” 이미 항복한 것과 같으니 인조가 직접 성을 나가 항복하는 일만은 봐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답서를 비변사 사무실에서 본 예조판서 김상헌은 통곡하며 찢어버리고 최명길에게 항의했다. “대감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시오?” 그러자 최명길이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대감이 편지를 찢었으니 우리가 당당히 죽겠군요.” 최명길은 찢어진 국서를 모아 붙였다. 병조판서 이성구는 김상헌에게 화내며 “대감이 전부터 척화(협상 배척)해서 이렇게 됐으니 대감이 적진에 가시오”라고 공격했다. 그러자 김상헌은 “적진에 보내져 죽을 곳을 얻는다면 대감의 은덕이요”라고 맞받아쳤다.
김상헌은 이날부터 닷새 동안 남한산성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면서 항복반대·결사항전을 요구했다. 그러나 최명길 등 주화파(협상파)는 청과 협상을 계속해 결국 왕이 성을 나가 항복하기로 합의했다. 1월27일 인조는 청에 항복 문서를 보냈다. “신이 300년 동안 지켜온 종묘사직과 수천 리 땅의 백성을 폐하께 의탁합니다. 황제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소서.” 항복하니 목숨을 살려주고 선양으로 끌고 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 국서를 청에 보내자 김상헌은 목을 매달았다. 사람들이 줄을 풀어 살려놓았으나 다시 목을 매달았다. 다시 풀어놓고 아들 김광찬 등이 옆에서 지키고 있었다. 다음날 조정에서 척화파 인사들을 적진으로 먼저 보내자는 논의가 시작되자 김상헌은 자결 시도를 멈췄다. 적진에 가서 죽겠다는 뜻이었다. 애초엔 김상헌이 포함됐으나, 결국 윤집과 오달제만 보냈다. 삼학사 중 홍익한은 이미 보낸 상태였다. 김상헌은 당시 나이가 67살로 많았기 때문에 잡혀가는 신세를 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상헌은 굽히지 않았다. 1월30일 인조가 항복하기 위해 삼전도(세밭나루)로 향했으나, 김상헌은 따르지 않았다. 병을 핑계로 남한산성에 며칠 남아 있다가 관향(본관)인 안동 풍산으로 가버렸다. 삼전도의 항복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항복 뒤 한양으로 찾아가 왕을 뵙지도 않았다. 나중에 김상헌은 ‘풍악문답’이란 글에서 “나는 성안에 함께 들어갔다가 내 말이 행해지지 않아 떠났다. 어찌 작은 예절에 구애되겠는가”라고 말했다.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왕은 왕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안동 풍산에 머물던 김상헌은 인조가 명나라를 치려는 청나라에 군사를 보내려 하자 다시 반대 상소를 보냈다. “선조 대왕께서 지극정성으로 대국(명나라)을 섬겨 임진년에 은혜를 입었는데, 지금 은혜를 잊고서 이 일을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지하에서 선왕을 뵙겠습니까? 또 어떻게 신하들에게 국가에 충성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김상헌은 이 상소로 인해 1640년 청나라 수도 선양으로 끌려갔다. 당시 70살이었다. 선양에 도착해 청 관리의 심문을 받으면서 그는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나는 내 뜻을 지키고, 내 왕에게만 보고한다. 어찌 묻느냐?” 죽이려면 죽이라는 이야기였다. 심문하던 청 관리들이 “가장 골치 아픈 늙은이”라며 혀를 찼다. 70대의 김상헌은 5년 동안 선양 감옥에 갇혀서도 끝내 굽히지 않았다. 나중엔 청 관리들도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고 칭송했다. 김상헌의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저항과 투쟁으로 점철된 김상헌의 인생에서도 화해와 용서의 시간은 있었다. 바로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최명길과의 화해였다. 1643년 주화파 최명길도 선양으로 끌려와 북관 감옥에 갇혔다. 삼전도의 항복 뒤 명나라에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청에 항복했다”는 해명 국서를 몰래 보냈다는 이유였다. 천하의 정적 두 사람이 한 감옥에 갇혔다.
북관 감옥에 갇힌 두 사람은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나이가 어리고 너그러웠던 최명길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진작부터 마음 깊이 우러렀으니/ 남은 빚을 다 갚으리라/ 묘한 시구 삼매경에 들었으니/ 나그네 마음 서로 같음을 알겠네” 그러자 김상헌도 화답했다. “좋은 시구 볼수록 더 묘하니/ 고심한 게 바로 여기 있었구나/ 두 세대의 호감을 다시 찾아/ 백 년의 의심 모두 풀어버렸네” 두 세대는 두 사람의 아버지가 친구였다는 뜻이다. 조선 역사에서 보기 드문 정적 간의 화해였다.
오랑캐 땅 선양에서 최명길과 화해한 김상헌은 5년 만인 1645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끝내 청에 굽히지 않은 김상헌의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인조는 1646년 76살의 김상헌을 ‘대로’(큰 어른)라고 부르며 좌의정에 임명했다. 그러나 김상헌은 사양하고 경기도 남양주 석실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1649년 인조가 죽고 즉위한 효종 역시 김상헌을 좌의정에 임명했다. 이때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벌을 꿈꾸던 효종과 척화파 지도자 김상헌의 만남은 청나라를 자극했다. 다시 남양주 석실로 돌아갔다. 3년 뒤 1652년 김상헌은 석실에서 세상을 떴다. 82살이었다.
<효종실록>은 한문으로 2천 자(한국어로는 5천 자)가 넘는 김상헌의 졸기를 썼다. 아마 역사상 가장 긴 졸기일 것이다. 사관은 마지막에 이렇게 논평했다. “옛사람이 ‘문천상이 송나라 삼백 년의 바른 기상을 거뒀다’고 말했다. 지금 세상의 논자들은 ‘문천상 뒤에 동방에 오직 김상헌 한 사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문천상은 송나라 관리로 남송이 원나라에 망한 뒤에도 원에 맞서 싸우다 결국 죽음을 맞은 인물이다. 악비와 함께 한족의 대표적 애국자로 꼽힌다.
김상헌이 죽자 대동법을 추진한 대정치가 김육이 제문을 썼고, 산림당(재야당)의 젊은 리더 송시열이 묘지명(죽은 이의 삶을 돌에 새겨 무덤에 함께 묻는 글)을 썼다. 효종이 죽은 뒤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김상헌과 김집을 함께 모셨다. 효종의 평생 꿈이던 북벌의 뜻을 함께한 동지였기 때문이다. 김상헌은 죽어서 더 신화가 됐다.
죽기 전 김상헌은 “묘 앞에 비석을 세우지 마라. 작은 묘표만 세우고 관향과 성명만 적으라”는 유서를 남겼다. 그러나 후손은 그가 미리 써놓은 묘지명을 무덤에 묻지 않고 비석에 새겼다. 이 글엔 김상헌의 평생 원칙과 꿈이 잘 묘사돼 있다. “지극한 정성은 쇠와 돌에 다짐했고/ 대의는 해와 달에 매달았다/ 하늘과 땅이 내려다봤고/ 귀신에게 물어도 안다/ 옛 가르침에 맞추기를 바랐는데/ 거꾸로 오늘과 어그러졌다/ 아, 백 세대 뒤에는/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 것이다”
송시열로 계승되며 서인 천하 시대로김상헌의 이념은 송시열이 계승했다. 효종은 송시열과의 독대를 통해 북벌 의지를 밝혔다. 송시열은 김상헌의 대의명분론을 조선 후기의 지배 이념으로 확립했다. 송시열의 시대를 거치면서 조선은 사실상 서인의 일당 독재국가로 바뀌었다. 송시열과 협력한 김상헌의 집안은 조선 최대의 권력 가문이 됐다. 이른바 장동(신안동) 김씨의 탄생이었다.
김상헌이 살던 곳은 크게 3곳인데, 하나는 나고 자란 서울의 장동(종로구 효자동, 궁정동)이고, 둘은 은거하던 남양주의 석실이며, 셋은 관향인 안동의 풍산이다. 그의 장동 집 이름은 ‘무속헌’(속됨이 없는 집)이었다. 이 글의 맨 앞에 소개한 시는 청의 선양에 끌려간 김상헌이 무속헌을 그리워하며 지었다. 이 집은 손자 영의정 김수항, 다시 김수항의 손자인 참판 김용겸에게 상속됐다.
무속헌 일대엔 김상헌의 후손이 몰려 살았다. 주변에 손자 김수흥이 독락정, 증손인 김창흡이 낙송루, 김창립이 중택재를 지었다. 무속헌은 19세기 말까지도 남아 있었다. 조선 말기 대신 김윤식도 1870년대 장동에 살면서 “지금 우리 집은 김상헌의 옛집 무속헌 옆에 있다”고 썼다. 김윤식은 김상헌의 제문을 쓴 김육의 후손이다.
400년 뒤 군사정권 시절 김상헌의 집 무속헌 터엔 안가(안전가옥)가 들어섰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안가 ‘나’동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쓰러졌다. 김상헌이 ‘맑고 깨끗한 땅’이라고 자랑한 곳에서 한국 현대사를 뒤흔든 총성이 울렸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김상헌 지음, 정선용 옮김, <청음집>, 한국고전번역원, 2016
김현정, ‘19세기 말 20세기 초 김윤식의 교유망과 서울 북촌의 공간변화’, 2014
이경구, <조선 후기 안동 김문 연구>, 일지사, 2007
지은이 모름, <산성일기>, 서해문집, 2004
*역사와 정치, 공간에 관심이 많은 김규원 선임기자가 옛 서울의 공간에서 오늘의 의미를 찾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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