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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정도전의 경복궁, 이방원의 창덕궁

정도전은 성리학적 이상 대변, 이방원은 풍수적 관점 따라 건축
등록 2021-10-11 06:55 수정 2021-10-16 02:23
조선의 양대 궁궐 중 하나인 경복궁은 중국의 <주례고공기>에 따라 남북 중심축 위에 반듯하고 엄격하게 놓였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의 양대 궁궐 중 하나인 경복궁은 중국의 <주례고공기>에 따라 남북 중심축 위에 반듯하고 엄격하게 놓였다. 문화재청 제공

“판삼사사 정도전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이라 하고 (…) ‘오문’(남문)을 ‘정문’(현 광화문)이라 했다.”(<태조실록> 1395년 10월7일)

“다시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드디어 향교동 동쪽 가에 터를 잡아 이궁(현 창덕궁)을 짓도록 지시했다.”(<태종실록> 1404년 10월6일)

조선의 두 가지 길

애초 조선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정도전의 길이고, 둘은 이방원의 길이다. 정도전의 길은 사대부, 신하권, 성리학, 보편주의, 이상주의의 길이었다. 이방원의 길은 왕, 왕권, 풍수와 도참, 전통주의, 현실주의의 길이었다. 이 두 길의 충돌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500년 동안 두 길은 협력과 충돌을 반복했다.

두 길의 모습은 왕궁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실록>의 위 기록에서 보듯 경복궁의 터를 잡은 이는 정도전 등 신하들이고, 경복궁 건물들의 이름을 붙인 이도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경복’(큰 복)이란 이름을 <시경>의 시에서 따왔다.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히 그 ‘큰 복’(경복)을 도우리라’라는 구절이다.

그러나 10년 뒤 창덕궁을 짓는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개성으로 돌아가 왕이 된 이방원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때 신하들은 경복궁에 들기를 요청했으나, 이방원은 이궁(창덕궁)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경복궁은 정도전 세력이 지은 궁궐이고, 이방원이 정도전 세력을 살육한 곳이다. 그런 곳으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은 것이 창덕궁이다.

이런 연유로 애초 두 궁궐의 위상과 구조는 완전히 달랐다. 경복궁은 이른바 ‘법궁’(제1궁)이었고, 창덕궁은 ‘이궁’(제2궁)이었다. 경복궁은 중국의 <주례고공기>에 따라 지어졌다. 정도전 등은 북악 아래 반듯하고 너른 터에 남북으로 중심축을 긋고 외조(출입)와 치조(정치), 연조(왕실) 공간을 나란히 놓았다. 그리고 남문인 광화문 앞으로는 6조 등 궐외 각사(관청)를 역시 남북으로 나란히 놓았다. 이런 공간 구조는 통일성과 위계질서, 인공을 강조한 것이다.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북악의 응봉(매봉)에서 내려온 산줄기의 지형에 따라 지어졌다. 그리고 남쪽은 종묘에 의해 공간이 제한됐다. 따라서 서남쪽 끝에 있는 정문 돈화문을 들어서면 금천교를 건널 때 한 번 동쪽으로 꺾이고, 정전인 인정전으로 들어갈 때 다시 한 번 북쪽으로 꺾인다. 인정전 동쪽으로는 왕실 공간이 있어서 주요 건물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심축이 형성될 수 없다. 궁궐 건물들이 서에서 동으로 죽 늘어서 있다. 이런 공간 구조는 다양성과 평등, 자연성을 보여준다.

경복궁은 인간의 법도 따라 건물 중심

김왕직 명지대 교수(건축학)는 “중국의 궁궐은 좌우 대칭이고 건물을 크고 높게 짓는 권위주의가 강하다. 그러나 한국에선 산지뿐 아니라 평지에서도 일부러 건물을 비대칭으로, 꺾어서 짓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은 자유와 변화, 역동성을 중시한다”고 평가했다.

김한배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조경학)는 전통 풍수지리가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풍수로 보면, 도성 안에서 창덕궁이 앉은 자리가 경복궁보다 더 낫다. 이방원이 창덕궁을 새로 지은 것은 풍수적 관점에 따른 것이고, 정도전의 경복궁은 중국의 성리학적 이상을 대변했다.”

궁궐의 공간 구성도 경복궁과 창덕궁은 극적으로 대비된다. 경복궁(43만㎡)은 경회루와 향원정 일대를 제외하면 대부분 건물로 채워져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었을 때는 더욱더 많은 공간이 건물로 채워졌다. 흔히 현재 청와대 자리를 후원으로 말하지만, 궁궐 담장 밖이다.

반면 창덕궁은 전체 넓이 54만㎡ 가운데 10만~15만㎡ 정도만 궁궐 영역이고 나머지는 70% 이상이 후원(금원, 비원) 영역이다. 이 후원은 궁궐 정원으로서뿐 아니라, 전통 건축에서도 자연 조경의 백미로 꼽힌다. 자연 산골짜기에 여러 연못과 정자, 누각 등을 적절히 배치해 자연인지 인공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경복궁은 인간의 법도에 따라 건물을 중심으로 만든 공간이고, 창덕궁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지어진 공간이다.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무질서해 보이지만 우주의 질서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 시대는 법궁과 이궁의 양궐 체제였다. 양궐 체제는 제1궁이 화재나 전쟁, 전염병 등 재난을 당했을 때 옮겨갈 수 있는 제2궁을 두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전 법궁은 경복궁, 이궁은 창덕궁·창경궁이었고, 임진왜란 뒤 법궁은 창덕궁·창경궁, 이궁은 경희궁이었다. 결국 조선 시대 내내 보편적으로 사용된 궁궐은 경복궁이 아니라 창덕궁이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중인 1592년 불탄 뒤 1868년 다시 지어질 때까지 276년 동안 방치돼 있었다.

조선의 양대 궁궐 중 하나인 창덕궁은 전통적 풍수와 산세에 따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자리잡았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의 양대 궁궐 중 하나인 창덕궁은 전통적 풍수와 산세에 따라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자리잡았다. 문화재청 제공

자연법칙 따른 창덕궁엔 우주의 질서 담겨

홍순민 명지대 교수(역사학)는 “법궁은 제1의 궁궐로 공식성이 강하고 이궁은 다른 필요로 지어진 것이다. 아무래도 처음에 이궁으로 지어진 창덕궁이 경복궁보단 좀더 편안한 공간이다. 자연과 가까이하려는 공간 배치가 한국인의 정서에 잘 맞는다”고 말했다.

경복궁과 창덕궁의 규모는 시대에 따라 변화가 극심했다. 먼저 터의 넓이는 의외로 창덕궁이 54만㎡로 43만㎡인 경복궁보다 크다. 1395년 태조 때 처음 지어진 경복궁의 건물 규모는 775칸으로 1868년 고종 때 다시 지은 7225칸(500여 동)의 11% 수준이었다. 1868년 대원군은 경복궁을 애초보다 훨씬 더 크게 지었다. 그러나 일제의 노골적인 훼손으로 36동까지 줄었다가 1990년 시작된 복원 사업으로 현재 146동까지 늘어났다. 문화재청 곽수철 궁능유적본부 복원정비과장은 “2045년까지 복원 사업을 마치면 경복궁의 건물은 모두 205동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창덕궁은 처음 지어진 1405년 태종 때 287칸에 불과했으나, 헌종 시절(1834~1849년)엔 1838칸으로 6배 이상 늘어났다. 건물 숫자로도 순조 재위(1800~1834년) 때 300여 동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훼손으로 79동까지 줄어들었다. 창덕궁은 1991년부터 복원 사업을 해 현재 137동까지 다시 늘어났다. 2020년 11월엔 주변 도로의 높이를 낮춰 창덕궁으로 들어가는 상징적 공간인 월대를 온전히 복원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의 건축,창덕궁 학술 연구’, 2011
김규순, ‘조선 궁궐 입지 선정의 기준과 지형에 대한 연구’, 2019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9, 창비, 2011·2017
홍순민, <홍순민의 한양 읽기 궁궐 상>, 눌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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